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531화 (530/1,132)

< -- 531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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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언덕 위쪽에 미리 자리를 잡고 기다리던 슬레이프니르의 경기병들은 땅을 새카맣게 뒤덮고 달려드는 7천여의 남부기병들을 향해 투창 끝을 똑바로 겨누었다.

“발사!”

경기병들의 집중사격에 선봉에서 달려오던 남부기병들의 대오 곳곳에서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지는 자들이 속출했지만 그들은 무모할 정도로 정면을 향해 계속 돌진해 들어왔다.

“기사단 돌진!”

선두에 선 발리의 손짓에 2선에서 기다리던 5천이 조금 넘는 슈로 기사단 본대가 돌격을 시작했다. 땅을 온통 뒤덮고 자신만만하게 돌진한 기사단 중장기병들은 이미 반쯤 기세가 꺾인 남부기병 본대를 무참히 산산조각내며 돌진해 1대1의 격전을 시작했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동맹군 기병대의 압도적인 승리였지만 후방에서 지켜보던 제네르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라손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제네르는 애가 타는 듯 동쪽 언덕 너머를 돌아보았다. 2천의 기병대를 이끌고 있는 라손이 빨리 적의 뒤를 틀어막아 주어야만 확실하게 적들을 끝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애타는 몇 분이 지난 후, 두 개의 보고가 거의 동시에 그의 귓가를 때렸다.

“상장군님! 동쪽에서 라손 부단장님의 기병 2천과 시로 대장군님의 아메샤 스펜타가 오고 있습니다! 기병은 10분 후에, 아메샤 스펜타는 20분 정도 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제네르가 채 반가움의 표정을 짓기도 전에, 또 다른 보고가 그와, 기사단 지휘부를 뒤흔들었다.

“적 후방에 가디언 전차대 같습니다! 측면을 돌아서 우리 지휘부로 돌진해 옵니다!”

제네르는 예상했다는 듯, 최소한 겉으로는 그다지 놀란 표정이 아니었지만 입가를 씰룩거리는 것만은 감출 수 없었다.

“나를 노리는군. 경기병들로 일단 앞을 막아.”

제네르가 자신의 근위기병들을 손짓해 불러냈다. 지금 그의 곁에는 근위기병 5백 정도, 그리고 슬레이프니르 경기병 1천여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기병들은 발리의 지휘 하에 남부기병들과 교전 중에 있었다. 제네르의 예상대로, 가디언 전차대는 이쪽의 주력군을 남부기병들과 싸움붙인 후, 그 틈새를 노려 후방의 제네르를 우회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기병진을 최대한 두텁게 짜도록 해. 가디언과의 정면대결은 피하고 경기병들이 주축이 되어 멀리서 기수와 말을 노려라. 가디언은 전차를 쓰러뜨리던지 멈춘 이후에 중장기병들이 공격하도록 해.”

“가디언 전차대 중앙에 적 최고제후 제롬 공인 것 같습니다!”

제네르의 눈가에 순간 주름이 깊이 패었다. 그는 말을 천천히 움직여 돌격해오는 적이 잘 보이는 언덕에 올랐다. 보고대로, 어둠 속에서 질주해오는 많지 않은 전차대, 그리고 그 중간에 마치 보호받듯 자리잡은 2백여기의 기병들도 보였다.

“근위기병 2백에 전차대 2백이라.......그런데 숫자에 비해 훨씬 많아 보이는군.”

제네르가 얼굴을 찡그렸다. 적게는 2마리, 많게는 6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 자체의 위압적인 크기 때문인지, 숫자에 비해서 병력규모가 훨씬 커 보였다. 언뜻 별것 아닌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맞붙어 싸울 기병 입장에서는 심리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거리가 가까워오면서, 그들이 일제히 간격을 넓히기 시작했다.

마음을 가다듬은 제네르는 아군 원병이 오고 있을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며 침착하게 말했다.

“라손 부단장한테 2천 중에 5백만 이리로 보내서 저놈들 후방을 치라고 해. 아메샤 스펜타는 적 본대 기병의 후방을 차단하고 궤멸시킨다.”

제네르는 그들 모두에게 일단 최대한 교과서적인 지시를 내렸다. 사실 그 역시 가디언 전차대와 맞서 싸운 일이 없다보니 상대의 전력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물론 탄현성에서 당초 5백이었던 숫자가 겨우 2백으로 줄어드는, 큰 타격을 입은 부대라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편이 더 솔직하기는 했지만.

“경기병 1선으로!”

갈라크 도비치의 명령에 투창을 든 경기병들이 돌격해오는 전차대의 앞을 일단 막아섰다. 제네르 역시 저들이 전차대를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는, 아니 최소한 흐트러트려 놓을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근위대의 가디언 전차대 자체가 애당초 기병을 주 타겟으로 만들어진 부대였다는 사실을 간과한 그는 자신의 근위기병 5백, 슬레이프니르 1천 정도만으로도 저들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것이 황성에서 주페를 구하지 못했던 그 날에 이어 자신의 일생 가장 큰 실책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날을 편다!”

간격을 벌린 가디언 전차대는 전차대장의 명령에 와아 하며 우렁찬 함성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들의 바퀴 날 양쪽으로 2척(60cm) 길이의 낫 모양의 톱날을 뻗어내며 그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냈다. 탄현성의 전투에서도 비록 큰 피해를 입기는 했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북부보병들의 몸을 토막내기도 했던 살인마였다.

“놈들 경기병이 집결합니다!”

전차대장이 제롬에게 큰 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제네르가 있는 언덕 초입에 1천 정도의 경기병들이 새까맣게 포진해 이미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경쓰지 마라.”

제롬이 눈을 가늘게 뜨며 태연하게 명령을 내렸다. 근위기병 중 가장 믿을만한 2백여 기에 둘러싸인 그는 당장이라도 전차대를 앞서나갈 듯 기세등등한 모습이었다. 전방에 포진했던 경기병들이 검은 깃발의 움직임과 함께 전차대의 정면으로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딴에는 우리 전차마(馬)를 노리려는 모양인데.......어차피 몇 발 쏘고 나면 도망갈 겁니다.”

전차대장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전차마는 한 마리가 감당하는 무게가 적다보니 보통 기병 군마의 몇 배나 되는 육중한 장갑을 두르고도 그 속도에서 중장기병에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어마어마한 예산이 들어가 만들어진 전차대의 가장 큰 강점이었다.

“돌격!”

제롬이 창을 앞으로 향하며 말에 최대한의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언덕을 꽉 채운 경기병들이 누군가의 구령에 맞춰 일제히 투창을 쏘아올렸다. 짙은 어둠 덕분에 그 무시무시한 형상은 눈에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전차병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무시무시한 사격이 1선을 달리는 전차 위에서 비스듬히 내리꽂혔다.

“흐읍!”

놀라움의 신음소리를 낸 건 전차대가 아닌, 슬레이프니르 경기병대 쪽이었다. 전차마 몇 마리가 놀라 휘청거렸고, 운 없는 전차병 몇이 가벼운 부상을 입고 잠시 고삐를 놓쳐 대오에서 처졌지만 2백여대의 전차대는 여전히 견고한 모습 그대로 계속 돌진해오고 있었다.

“계속 쏴! 난사라도 해라!”

당황한 갈라크 도비치 부단장이 전차대를 가리키며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경기병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계속 사격을 퍼부었지만 그들의 육중한 중장갑 앞에서 원거리, 혹은 중거리 사격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50척(15m) 이내의 지근(至近)거리 사격이 아니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부장의 보고에 갈라크가 버럭 화를 냈다.

“저 빠른 놈들이 지근거리에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다 죽으란 말이냐!”

갈라크의 격앙된 목소리를 들은 듯, 그들은 경기병대를 당장이라도 덮칠 듯 어느새 0.3스타디아(45m) 안쪽의 거리까지 쇄도해 들어왔다.

“퇴각! 퇴각!”

갈라크가 팔을 흔들며 경기병대에 다급한 지시를 내렸다. 결국 전차대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한 슬레이프니르가 황급히 방향을 돌려 2선의 중장기병대 쪽으로 무력하게 도주하기 시작했다.

슈로 기사단의 참모진들은 단장 제네르의 눈빛이 이렇게까지 공포로 물든 건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다급한 순간에도 조금 전 자신의 내린 명령을 기꺼이 수정할 정도의 정신은 갖춘 사람이었다. 비록 때가 조금 늦었다고는 해도.

“기병만으로는 어렵다.......아메샤 스펜타에서 1개 연대만 보내라고 해. 최대한 빨리.  보급대는 당장 예비용 창을 최대한 확보하고.......”

그의 지시는 침착했지만 그 목소리만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메샤 스펜타는 보병이라 적어도 20분 이상 걸릴 겁니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적당할 수도 있어. 빨리!”

제네르는 말을 조금 앞으로 움직였다. 1천여 경기병대의 사격을 어렵지 않게 물리친 2백여 전차대와, 그 비슷한 숫자의 남부 근위기병대는 이제 그의 5백여 기사단 근위기병들을 향해 똑바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경기병대가 무기력하게 물러나면서 이제 전세는 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해져 있었다.

“바얀 부단장의 기병들은 얼마 후에 도착할 것 같나?”

“최소한 10분.......상장군님, 일단 퇴각하는 편이.......”

참모의 조언에 제네르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우리가 물러나면 저네들이 우리 주력기병대 후미를 칠 텐데 주력군이 전멸하는 꼴을 보고 싶나?”

제네르는 발리가 7천여 남부기병대와 어울려 한참 접전을 벌이고 있는 전방의 전장을 가리켰다.

“여기서 최대한 시간을 끈다. 라손과 시로가 와 줄 때까지만이라도......”

마지막 한 마디를 유달리 자신없게 중얼거린 제네르가 투구의 사이트를 내리며 자신의 창에 한 번 입을 맞추었다.

“중장기병들이 적들을 묶는 동안 경기병들이 지근거리 사격으로 놈들을 잡는다.”

전차대가 가까워지면서, 그들의 바퀴에 달린 무시무시한 톱날의 날카롭고 서늘한 회전음이 제일 먼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 그들에게 쫓겨 온 1천여 경기병들이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기사단 뒤에 다시 2선을 형성했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어느 위치도 안전치 못했다. 1선에서 전차대를 맞게 된 5백여 제네르의 근위기병들은 하나같이 창백해진 표정으로 옆의 동료의 얼굴을 본능적으로 확인했다.

“바퀴를 조심해라, 절대 정면으로 돌진하지 말고 창을 던져 말을 노려라. 그리고 최대한 빨리 물러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이런저런 명령을 내리면서도, 제네르는 자신의 명령이 어느 정도 실현될 수 있을는지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전차대의 바퀴가 내는 요란한 소음이 그와 기사단 근위기병들의 울렁대는 심장처럼 바닥을 쿵쾅거리고 울렸다.

“돌격!”

제네르가 창을 앞으로 향하며 찢어져라 외쳤다. 그리고 5백여 근위기병대가 악 하는 절규에 가까운 함성을 울리며 전방의 전차대를 향해 돌격했다. 바로 베흔이 전차대를 만들면서 노렸던, 그 모습 그대로.

“너무 접근하지 마라! 저 톱날에 걸리면.......”

앞서 달려나간 하급 사관들이 악을 썼다. 돌격해오는 전차대와, 동맹군의 기병이 처음으로 맞붙는 순간이었다.

“던져!”

그들은 평소 겨드랑이에 끼고 돌진하던 육중한 기병용 돌격창을 전차마를 향해 힘껏 던지고 말을 급히 돌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가속이 붙은 말들 중 주인이 원하는 만큼 빨리 선회할 수 있던 준마는 채 절반이 되지 못했다.

“아아악!”

긴 창을 앞세우고 돌진해오는 가디언 전차병 앞에 동댕이쳐진 기사단 기병들의 표정에 무시무시한 공포가 스쳤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다. 전차 옆에 돋은 톱날에 말의 다리가 사정없이 찢겨나가며 기병들이 비명과 함께 공중에 내던져졌다.

“맙소사, 피해!”

2선에서 달려오던 기병들은 순간 공포감에 얼어붙고 말았다. 전차대에 휩쓸린 150여기가 넘는 슈로 기사단 1선 기병들의 귀를 찢는 비명소리가 언덕을 처절하게 울렸다. 가디언 기병의 창에 꿰여 죽은 시체들, 그리고 뒤에 달려오던 전차의 톱날에 조각조각난 기병들의 사지와 피보라가 하얀 눈먼지와 함께 공중에 치솟았다.

“결과가.......도대체.......”

할 말을 잃은 제네르는 입을 벌린 채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150여 기병들이 일순간 목숨을 바쳐 건진 결과는 고작 20여필의 전차마를 자리에서 잠시 맴돌게 한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쓰러진 말을 고삐에서 바로 풀어낸 그들은 다시 방향을 돌려 본대와 합류해 공격을 해 오기 시작했다.

“물러날.......까요?”

참모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다시 물었지만 이미 맞붙은 이상, 제네르로서는 이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뒤이어 돌격해야 할 2선의 기병들은 자리에 완전히 얼어붙은 채 공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당황한 제네르가 2선 기병들에게 팔을 저으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왜 바보같이 정면으로만 돌진하는 거냐! 양쪽 측면으로 접근해서 조금 더 멀리서 던지고 물러나! 그리고 경기병들은 뭐 하는 거냐!”

보다 못한 제네르가 악을 쓰고 말에 박차를 가하고 몸소 앞장서 나아가며 다시 공격령을 내렸다. 단장인 그가 앞장서는 모습에 기겁을 한 2선 기병들이 거의 반사적으로 다시 돌격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남은 기사단 전체가 2갈래로 갈라지며 양쪽으로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 투창을 든 경기병들이 후미를 엄호하며 따랐다.

“단장님! 뒤로.......”

부장들이 창을 쥔 제네르를 말리려 했지만 그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릴라크 경이 왜 바보같이 황상께 돌진했었는지 이제야 이해하겠어!”

제네르가 그 묵직한 창을 어깨 위로 번쩍 올리며 찢어지듯 함성을 질렀다. 그는 자신을 뒤따라 다시 돌격을 시작한 부하들을 잠시 돌아보며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미소를 지었다.

최소한, 그는 가망이 거의 없는 무시무시한 상대를 향해 단신으로 돌진해야 했던 릴라크와는 달랐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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