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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532화 (531/1,132)

< -- 532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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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따라하란 말이다!”

기병들의 제일 선두에서 창을 들고 돌진한 제네르는 공포스럽기까지 한 전차대의 측면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어깨를 휘둘렀다.

“조심하십시오!”

누군가의 고함이 뒤에서 메아리쳤지만 제네르로서는 얼어붙은 기병들을 움직이게 하려면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가 던진 육중한 돌격창은 전차를 움직이던 전차병의 목덜미를 그대로 찢어내며 그 몸뚱이와 함께 붕 날아가 얼어붙은 땅바닥에 꽂혔다.

“아앗!”

전차병 뒤에 있던 가디언이 쓰러진 전차병을 대신해 급히 고삐를 잡으려 했지만 한 손에 방패, 한 손에 창을 든 상황에서 쉽지 않았다. 방향을 잃고 옆에 있는 다른 전차의 후미로 돌진한 전차마는 동료 전차의 톱날에 발이 걸리며 찢어지는 울음소리와 동시에 거친 바닥을 사정없이 굴렀다.

“피해! 피해!”

전차대 병사들이 놀라 고함을 질렀다. 추돌한 2대의 전차가 부딪히며 말과 사람, 전차가 동시에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말이 쓰러지면서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진 전차에서 쨍 소리와 함께 톱날이 부러져 나와 공중으로 확 날아올랐다. 흙과 눈이 뒤섞인 뿌연 먼지가 사방으로 날아올라 제네르의 눈앞을 가렸다.

“뛰어!”

눈앞으로 날아드는 전차 파편과 톱날을 방향을 돌려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제네르가 애마 아타르의 목에 몸을 바싹 붙였다. 주인의 명을 받은 이 충실한 말은 눈앞으로 쇄도하는 엄청난 장애물 앞에서도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공중으로 힘차게 뛰어올랐다.

“장군님!”

뒤따라온 부장들의 절규가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메아리쳤다. 하지만 하얀 눈안개 속에서는 거친 말굽소리를 내며 휙 돌아서는 건장한 얼룩빛 말, 그리고 긴 망토를 두른 기병의 희미한 실루엣이 곧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너도 죽어!”

허리에서 칼을 번쩍 뽑아든 제네르는 전복한 전차에서 떨어져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가디언을 향해 바로 돌진했다.

“제기랄! 뭐야!”

충격 속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 가디언이 급히 뒤로 돌아서려 했지만 다른 가디언들과는 달리 중장갑을 차려입은 상황이라 몸이 둔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황제에게서 하사받았던 제네르의 검은빛 명검은 꽝 소리를 내며 가디언의 목 경갑, 그리고 근육과 인대를 사정없이 찢어냈다. 반쯤 떨어져나간 목을 너덜거리며, 가디언은 매정하게 옆을 스쳐가는 제네르의 옆으로 천천히 쓰러졌다.

“단장님이 가디언을 쓰러뜨리셨다!”

제네르 주변 병사들의 환호성소리가 거의 공황 상태까지 몰려 있던 슈로 기사단 기병들의 분위기를 일순간 뒤흔들었다.

“돌격!”

제네르의 선전에 늦으나마 힘을 내 측면으로 돌진해 온 기병들이 말 혹은 전차병을 노리고 힘껏 창을 던졌다. 그리고 후미의 경기병들이 날리는 지근거리 사격 또한 중장기병들의 사이사이 직사로 공기를 매섭게 갈랐다.

돌파력을 위해 최대한 밀집해 돌진하던 전차 중 몇 대가 전도되면서 그 주변의 전차들 역시 그에 뒤엉켜 쓰러지거나 충돌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적을 피하지 못한 수십의 기병들이 뒤엉켜 눈 깜짝할 새 토막난 시체가 되어 흩어졌다. 언뜻 무적처럼 보이던 전차대의 약점을 재빨리 발견한 제네르가 사이트에 엉겨붙은 먼지를 급히 털어내며 피를 토하듯 소리를 질렀다.

“대오에서 한 대만 집중적으로 노려라! 한 대만 잡으면 주변의 놈들까지 모조리 흔들린다!”

“흩어져! 간격을 벌려!”

예상 밖으로 피해가 커지면서 당황한 전차대장이 팔을 옆으로 향하며 다급히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이때, 뜻밖의 변수로 등장한 건 따로 있었다.

“이제 난전에 들어가. 제네르 저년을 잡아야 한다.”

제롬의 굵직한 목소리에 전차대장이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저자의 근위기병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

“우리 뒤에서 적 추가병력이 오고 있는 것이 안 보이나.”

전차대장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제롬의 말대로, 기사단의 5백여 원병들이 멀리 언덕 아래에서 이곳으로 몰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조금 더 뒤에는 생각하기도 싫은 시로의 아메샤 스펜타 보병들이 방패와 창을 짊어지고 달려오는 모습도 보였다.

“이런, 제기랄.”

아메샤 스펜타의 모습에 전차대장이 크게 당황했다. 지난 탄현성에서의 악몽 때문인지, 전차대 장병들은 견고한 보병대, 그것도 북부보병대나 아메샤 스펜타같이 ‘악과 깡으로 똘똘 뭉친’ 자들과 상대하기는 죽기보다 싫어했다. 게다가 저쪽에도 근위대처럼 가디언들이 포함되어 있을 터였다.

“제네르 저년은 차라리 저희가 잡을 테니 각하께선.......”

“너희놈들한테 맡기려고 내가 여기까지 직접 온 줄 아나! 내 사냥감에 멋대로 손대는 놈은 내가 살려두지 않겠다!”

제롬의 호통에 할 말이 없어진 전차대장이 팔을 휘저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이제 난전이다! 최고제후께서 적 단장을 잡을 동안 흩어져서 놈들이 집결하지 못하도록 해라! 뒤의 적 추가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이놈들을 끝내고 빠져나간다!”

전차대가 흩어지자 그 중앙에서 보호받고 있던 제롬과 2백여 남부 근위기병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제네르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상장군님! 적들이 나옵니다!”

전차 1대를 쓰러뜨리고 부장들 사이로 어렵게 돌아온 제네르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근위대 전차대 사이로 단단한 밀집대오를 이룬 2백여 남부 근위기병대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델루지 가, 정확히는 최고제후를 뜻하는 주작이 새겨진 은빛 깃발이 높이 펄럭이고 있었다.

“제롬.......”

제네르가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기사단 3중대! 상장군님을 지켜라!”

부장들이 기사단 기병들을 가리키며 악을 썼지만 전차대에 쫓겨 다니느라 사방에 흩어져 있다 보니 제네르의 주변을 지키러 달려올 수 있는 기병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전차대와의 돌격전에서 이미 절반 가까운 기병들이 쓰러지면서 숫자상으로도, 전력상으로도 기사단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상장군님! 저희가 지킬 동안 물러나십시오!”

부장들이 제네르의 앞을 막아서며 고함을 질렀다. 비록 상대가 남부기병이지만, 최고제후의 측근을 지키는 정예기병들이라면 슈로 기사단과의 기량 차는 없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도망을 어디로 간단 말이냐!”

뒤로 물러나려던 제네르는 그의 정면을 위협하듯 쌔액 하며 스쳐 지나가는 근위대 전차에 놀라 급히 말을 멈춰 세우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전차대와 남부근위기병들을 모두 감당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그의 기병들이 쓰러진 상황이었다. 절박해진 제네르는 급히 말을 돌려 부장들 사이로 돌아왔다.

“물러나기는 어차피 어렵다! 부단장이 와 줄 때까지 자리를 지킨다! 전차대는 나를 공격하지는 않을 거다!”

전차대가 자신에게 돌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제네르가 부장들, 그리고 그의 곁에 고작 70여명 남은 중장기병, 그리고 1백여기의 경기병들을 한 자리로 모으며 급히 명령을 내렸다.

“제롬 공입니다!”

돌격해오는 2백여 기병들의 선봉에서 유난히 우람한 체구의 무사를 발견한 부장 한 명이 당황한 듯 소리쳤다. 시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떡 벌어진 어깨와 우람한 가슴, 보통 사람의 허벅지만한 굵은 목과 팔만 보아도 웬만한 기병은 감히 덤벼들 엄두조차 들지 않을 정도였다. 경기병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지만 대여섯 명의 남부기병들을 말에서 떨어뜨린 것이 전부였다.

“제네르 네 이년 당장 나와!”

제롬은 땅이 울릴 듯 쩌렁쩌렁한 고함을 지르며 자신에게 날아드는 투창 중 한 개는 창으로, 또 한 개는 방패로 너무도 시시하게 쳐내버렸다. 거의 가디언에 맞먹는 그의 엄청난 속도가 믿어지지 않는 듯 부장들 중 몇이 고개를 저었다.

“저놈을 막아! 상장군님을 지켜!”

부장들, 그리고 70여기의 기병들이 창을 치켜들며 제롬, 그리고 그의 기병들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제롬을 향해 기병들이 왼쪽에서 내지른 창은 상대의 육중한 방패에 비껴나며 무기력하게 꺾여 날아갔다. 그 사이 오른쪽에서 제롬의 얼굴을 향해 뻗었던 부장의 공격 역시 그가 교묘하게 비껴내며 휘두른 창과 무서운 마찰음을 내며 스쳐지나가고 말았다.

경기병들의 위협사격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가운데, 제롬을 뒤따라온 2백여 근위기병들, 그리고 기사단의 얼마 남지 않은 기병들과의 처절한 접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거기 있었냐!”

제롬은 자신에게 공격을 해 오는 적들을 휘하 기병들에게 맡겨둔 채 오직 제네르만을 노리고 계속 질주했다. 고작 대여섯기만을 거느린 채 물러나있던 제네르는 주춤주춤 뒷걸음치며 일단 창을 치켜들었지만 자신이 그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도주한다는 것은 자신만을 믿고 절반이 넘는 동료를 잃어가면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 병사들을 모두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문득 고개를 치켜든 제네르의 푸른빛 시선과, 그를 향해 돌진해오는 제롬의 초록색 눈동자가 서로에게 정확히 고정되었다. 한때나마 연인으로 있었던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제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네놈은 꺼져!”

돌진하던 제롬은 앞에 확 뛰어든 기사단 기병의 목을 단번에 창으로 꿰어 바닥에 동댕이치며 악을 썼다.

“빌어먹을.”

제네르는 부장에게서 건네받은 예비용 창을 겨드랑이에 끼며 이를 빠득 갈았다.

“그래, 상대해주지.”

그는 일단 말에 박차를 가했지만 정말로 싸울 생각은 없었다. 물론 쓸데없는 묵은 정 따위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만을 노리고 있는 저 야수가 자신의 기병들을 모조리 도살하는 것을 막고 천금 같은 시간, 시로가 보병대를 이끌고 와 줄 때까지 제롬을 붙들고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건 그 자신뿐이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제네르는 얼굴, 그리고 가슴을 방패로 가리고 제롬에게 맞바로 돌진했다. 제네르가 자신에게 반격을 해 온다고 생각한 제롬은 악 소리를 지르며 창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허! 감히 나한테 덤벼?”

“내가 미쳤냐!”

질세라 바로 대꾸한 제네르는 격앙된 제롬과 그의 말이 최대한의 속도를 받은 순간, 창을 빼며 바깥으로 재빨리 말을 옆으로 돌렸다.

“앗!”

당황한 제롬이 얼른 그를 따라 고삐를 틀려 했지만 워낙 육중한 제롬을 실은 말은 제네르의 아타르처럼 빨리 방향을 선회할 수가 없었다. 거의 넘어질 듯 가까스로 방향을 돌린 제롬의 말은 바닥에 뽀얀 흙먼지와 언 눈발을 하얗게 공중에 날리며 자리에 가까스로 멈춰섰다.

“이년이!”

그새 시야에서 사라진 상대의 움직임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제롬의 눈동자가 뒤로 휙 돌았다. 루쿠스탄 전투에서 하지즈 장군을 일기투로 쓰러뜨렸을 때처럼, 제네르는 유연한 기마술과 아타르의 빠른 발놀림으로 어느새 제롬의 등 뒤로 달라붙어 있었다.

“잔꾀까지 부리냐!”

제롬은 그 때, 예상치도 못하고 당했던 하지즈 장군이 아니었다. X의 피를 물려받은 그가 굳이 뒤로 말을 돌려 상대를 눈으로 확인하며 공격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마치 뒤에도 눈이 달린 듯, 자리에 그대로 선 채 찢어지는 기합소리와 함께 그 육중한 창날 뒤쪽 자루를 제네르를 향해 정확히 뻗었다.

“아읍!”

예상조차 못했던 변칙적인 공격에 제네르는 미처 몸을 돌려 완충을 시킬 여유조차 없었다. 방패를 단번에 두 조각낸 제롬의 무시무시한 창은 제네르의 왼팔 뼈까지 으스러뜨리며 위로 튀어올랐다.

“아악......”

가슴의 흉갑마저 산산조각낸 창 자루 끝은 제네르의 목과 턱의 갑주, 그리고 귀까지 종잇장처럼 찢어내고서야 그의 어깨 위로 빠져나갔다. 행여 창 앞쪽의 날이었다면 그의 팔과 가슴과 어깨를 완전히 잘라내고 단번에 절명시켰을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안 돼, 안 돼.......”

귀에 치명상을 입고 균형감각을 잃은 제네르는 본능적으로 제롬의 창이라도 붙들려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일격에 제네르를 저항불능으로 만들어놓은 제롬은 그제야 몸을 휙 돌리며 창을 옆으로 거칠게 휘둘렀다. 제네르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가까스로 날은 피했지만 자루까지는 아니었다.

창 자루에 이미 다친 귀와 머리를 또다시 얻어맞은 제네르는 머릿속이 순간 텅 비며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하악.......”

그는 자신의 몸이 뒤로 천천히 기우는 것을 느꼈지만 중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말에서 조금씩 미끄러져 떨어지던 그의 눈에 멀리서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달려오는 시로,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며 가늘게 눈가를 떨고 있는 제롬의 알 수 없는 시선이 스코프 너머 희미하게 보였다. 제네르는 무언가로 꽉 막힌 듯한 목구멍으로 숨을 깊이 들이키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장군님!”

주변에서 저항하던 부장들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찬 공기를 쩌렁쩌렁 울렸지만 마치 멀리 구름 꼭대기에서 들려오는 울림 같았다. 축 늘어진 그의 몸은 안장에서 미끄러지며 차갑게 얼어붙은 땅 위에 큰 소리를 내며 굴렀다. 주인이 쓰러진 것을 안 아타르가 큰 울음소리를 내며 자리에 급히 멈춰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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