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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533화 (532/1,132)

< -- 533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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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르와 가장 가까이 있던 건 5백여의 지원 기병을 이끌고 달려오던 부단장 라손이었다. 친구가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에 앞뒤 가리지 않고 다급히 달려온 라손은 제롬의 창에 얼굴이 명중당하고 휘청거리는 친구의 모습에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빌어먹을!”

그는 뒤따르는 기병들을 큰 소리로 독려했지만 쓰러지는 제네르와 그와의 사이에는 접근을 저지하며 주변을 돌고 있는 무시무시한 가디언 전차대가 이미 산개해 있었다.

“시로! 시로! 제네르가 위험하니 제발 빨리 좀 와 줘요!”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임을 깨달은 라손이 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도움 요청을 뒤늦게 받았던 아메샤 스펜타 보병대는 아직 한참 뒤처져 있었다. 제네르가 위험하다는 말에 놀란 시로가 급히 말에 뛰어올라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지만 기마술도 서툰 그가 이곳에 도착할 무렵에는 제네르의 머리가 몸통에 그대로 붙어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걸.......이걸.......”

앞을 무섭게 선회하는 전차대와, 뒤처진 아메샤 스펜타를 번갈아 쳐다보며 라손은 자리에서 어쩔 줄 몰라했다.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만으로도, 기병들만으로 전차대에 돌격하는 것이 바보짓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그에게는 이것저것 따질 시간이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는 제네르보다 최소한 일기투 실력에서는 틀림없이 한 수 위였고, 기마 실력도 떨어지지 않았다.

“제기랄! 너희! 날 따라와! 경기병대! 내 앞을 뚫고 중장기병 나머지 놈들이 엄호해!”

다급해진 라손이 가장 가까이 있던 30여기의 기병들을 가리키며 팔을 앞으로 향했다.

“상장군을 구하러 간다! 빨리!”

유난히 작은 체구의 라손과 그를 태운 말은 다른 기병들을 무섭게 앞서가며 앞을 가로막은 전차대에 돌진했다. 눈앞에서 무섭게 회전하는 전차 바퀴의 날이 귀청을 찢듯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지만 위험에 처한 제네르의 모습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응?”

큰 환호성에 놀라 다시 제네르 쪽을 돌아보았던 그는 말에서 맥없이 미끄러져 떨어지는 친구의 모습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제기랄! 투창!”

라손을 바싹 뒤쫓아온 경기병들이 전차대의 측면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지근거리 사격에 놀란 전차 몇 대가 순간 자리에서 움찔거렸고, 말의 급소에 명중한 전차 3대가 급히 멈춰서며 제자리를 거칠게 맴돌았다.

“비켜!”

선두의 라손이 작은 창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며 앞에서 서성대던 전차마의 눈을 향해 힘껏 내리찍었다. 라손 특유의 빠르고 매서운 일격에 머리가 단번에 관통당한 말이 다리가 꺾이며 부러져 날아가는 창과 함께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계속 나가!”

쓰러지는 말을 힘차게 뛰어넘은 라손이 부러진 창을 내던지고는 말에 바싹 속도를 붙였다. 전차대를 돌파한 그의 앞에는 제롬의 근위기병들이 이미 진을 치며 기다리고 있었다.

“저놈들을 맡아!”

라손을 뒤따라온 기사단 기병들이 돌격창을 앞세우고 그들에게 거세게 돌격하며 고함을 질렀다.

“저희가 맡을 테니 가십시오!”

기사단 기병들과 남부 근위기병들이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사방에서 땅을 울리는 충격음, 부러져 날아가는 창, 그리고 말과 사람의 비명소리가 긴박한 주변을 뒤흔들었다. 라손은 난전으로 난장판이 벌어진 그들 사이를 재빨리 빠져나가 다시 제네르에게 돌진했다.

이제 그의 눈앞에는 말에서 뛰어내려 큰 도끼를 들고 쓰러진 제네르에게 다가가는 제롬이 당장이라도 닿을 듯 가까워져 있었다.

“이 새끼야! 지금 누구한테 손을 대는 건지 알아!”

라손이 안장 뒤에 있던 두 번째 창을 번쩍 뽑아들고 제롬에게 돌진했다.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적의 존재를 깨달은 제롬이 휙 돌아섰다.

“씨발! 저건 또 뭐야!”

제네르의 목을 치려 다가가던 제롬은 옆에서 돌격해오는 무장에게 겁을 내기는커녕 도끼를 바로 어깨 위로 치켜들며 분노로 화답했다. 이 둘 역시 제네르와 동거하던 시절 이미 얼굴을 익힌 사이였지만, 이젠 아무 의미가 없었다.

라손은 제롬의 심장을 향해 자신의 창을, 제롬은 돌격해오는 라손의 말 어깨를 향해 도끼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앗!”

힘에서 밀린 라손의 오른쪽 어깨가 뒤로 휙 꺾였다. 두 다리로 땅을 굳게 딛고 선 이 맹수 같은 남자는 한참을 붕 날아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는 했지만 그의 육중한 방패와 강철 같은 근육은 동맹군에서 손꼽히는 이 무장의 예리한 돌격에도 급소까지는 결코 내어주지 않았다. 목표를 뚫지 못하고 부러진 라손의 창이 무기력하게 공중으로 흩어졌다.

“으, 으앗!”

같은 순간, 흔들리는 말 위에서 중심을 잃은 라손이 고삐를 움켜쥐려 했지만 의미없는 짓이었다. 제롬의 무시무시한 도끼질에 목과 어깨가 두 조각이 난 그의 말은 거친 울음소리를 내며 공중을 빙 맴돌고는 바닥에 머리부터 내리꽂혔다. 중심을 잃은 라손 역시 즉사한 말 위에서 한참을 날아가 단단한 바닥에 사정없이 동댕이쳐졌다.

“적 부단장이 낙마했다!”

바닥에 꽂히는 라손을 발견한 남부 근위기병, 그리고 전차대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멍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힘겹게 고개를 든 라손은 이제 적병들에게 가장 탐나는 사냥감이 되어 있었다.

“저년은 내 꺼다! 공격하지 마라!”

그를 제일 먼저 발견하고 달려든 건 무려 6마리의 말이 끄는 가디언 전차대장의 육중한 전차였다. 자신을 향해 돌격해오는 전차의 요란한 소음에 당황한 라손이 빈 말을 찾았지만 쓰러진 제네르 곁에서 혼자 울고 있는 아타르가 전부였다.

“이런 씨발......”

그는 풀린 다리에 힘을 주어 아타르를 향해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전차의 소름끼치는 울림은 그보다 훨씬 빨리 가까워졌다.

“학, 학.......”

아타르에게 도착할 시간이 부족함을 깨달은 라손은 어쩌면 멍청하기까지 한, 아니 당연한 선택으로 바꿔야만 했다.

“그래! 계속 와라!”

바닥에 뒹굴고 있던 누군가의 양손검을 급히 집어든 라손은 방향을 대뜸 휙 돌렸다. 전차마 6마리, 그리고 그 뒤에 연결된 육중한 전차와 그 위에 오른 전차병, 가디언 전차대장이 그의 코앞으로 비스듬히 돌격해오고 있었다.

“뭐야? 저년이.......”

무력하게 도망가는 적을 뒤에서 사로잡을 생각에 창을 놓고 올가미를 대신 들고 있던 전차대장은 거의 키만한 긴 검을 움켜쥔 채 자신을 노려보는 조그만 상대의 모습에 순간 움찔했다.

“이거나 처먹어!”

라손은 들고 있던 긴 양손검을 힘껏 휘둘러 선두의 전차마, 그리고 두 번째 말의 앞다리까지 잘라내 버리고는 바닥에 몸을 날렸다. 전력질주하던 말 두 마리가 쓰러지면서 완전히 통제를 상실한 육중한 전차는 그대로 라손의 머리 위를 덮쳤다.

“으아악!”

아무리 체구가 작은 라손이었지만, 그 무시무시한 톱날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낫 모양의 날 끝은 막 엎드리던 라손의 왼쪽 어깨를 완전히 토막냈고, 허벅지와 투구 한쪽을 갈가리 찢어내 공중에 산산이 날렸다. 한쪽 팔과 다리의 살점이 찢겨나가는 지독한 고통에 라손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세워! 세워!”

라손을 짓이긴 전차는 통제를 벗어나 한참을 더 달려가 기병들끼리 난전이 벌어지고 있는 한복판에서야 어렵게 자리에 멈춰 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전차는 이번만은 운이 없었다. 사방에서 난전이 벌어진 상황에서 그 전차는 자리에 정지한, 아니 가장 큰 무기인 ‘속력’을 잃은 상태였다.

“저놈 잡아!”

기사단의 누군가가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자리에 멈춘 전차는 흥분한, 아니 전차대에 끔찍하게 죽어간 동료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반쯤 광기에 사로잡혀 있던 기사단 기병들의 훌륭한 표적이었다.

“빨리 출발.......”

전차병에게 무어라 소리를 지르려던 전차대장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경기병들의 집중사격에 놀라 방패를 치켜들었지만 그의 목을 노리고 벌떼처럼 몰려드는 기사단 중장기병들 또한 막아야만 했다.

“빨리 가라니까!”

쓰러진 말을 풀어낸 전차병이 다시 말들을 급히 출발시켰지만 미처 가속이 붙기도 전, 5명이나 되는 광기어린 중장기병들이 내지른 창이 말, 그리고 전차병과 전차대장의 심장을 향해 꽂혀왔다.

“여기 다 덤벼!”

가슴으로 날아드는 창을 막아내려던 전차대장의 등을 다른 기병의 긴 창이 꼬치처럼 푹 꿰어버렸다. 뒤이어 거의 3명 가까운 기병들이 달려들어 비틀거리는 그의 몸을 사방에서 꿰뚫었다.

“전차대장을 잡았다! 살인마가 죽었다!”

가디언을 쓰러뜨린 기사단 사관은 이미 숨이 끊겨 쓰러진 가디언의 몸을 수십 번도 넘게 계속 찌르며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 ‘꼬맹이’ 부단장의 손에 어처구니없이 대장을 잃은 가디언 전차대는 지금까지의 위세등등한 모습에서 처음으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온통 난전으로 번져버린 그 와중에도 한 팔이 잘려나간 채 바닥에 쓰러졌던 라손은 자신이 무너뜨린 전차가 어찌되었는지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아니, 알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기병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를 도우러 달려오던 기병들은 모두 전차대에 저지당하거나 남부기병들과 어지럽게 어울려 싸우고만 있었다. 지금 그는 도움은 고사하고 쓰러진 자신의 등을 당장 찌르러 달려오는 적병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용맹하게 싸워주는 부하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라손은 쓰러져 죽어 있는 말의 시체 사이에 그 작은 몸을 최대한 숨기고는 그 지독한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일단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닌가보다, 라손.”

그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지만 이대로 죽은 척 조금만 기다리면, 그리고 그동안 적병의 주의를 끌지 않는 약간의 행운만 따라준다면 시로가 아메샤 스펜타와 함께 도착해 적들을 쫓아낼 상황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공격에 튕겨 날아가 쓰러진 제롬도 누군가가 달려와 죽여 줄, 아니 최소한 얼마간은 움직이지 못할 터였다.

“제네르?”

라손은 말의 시체 너머로 살며시 눈을 내밀었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친구 제네르가 쓰러져 있었고, 아타르가 여전히 주인을 툭툭 치며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머리를 얻어맞은 충격에 완전히 의식을 잃었던 제네르는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지 고개를 좌우로 가끔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숨어있는 곳에서 나가 그에게 다가가볼까 생각했던 라손은 일단 생각을 접었다. 어렵게 몸을 숨겨놓고 이제와 괜히 적의 주의를 끌어 좋을 것이 없었다.

“그래.......이 정도면 운이 좋은 거야.”

뒤통수에서 묘하게 찬 기운을 느낀 라손이 다시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단단한 투구가 아니었다면 그의 머리 역시 톱날에 조각이 나면서 즉사했을 테지만 이번은 운이 좋았다. 투구 한쪽이 깨지고 살점도 약간 찢긴 듯 했지만 최소한 머리에 치명상을 입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잘려나간 왼팔, 그리고 마비된 다리의 출혈이 심했지만 얼마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그는 멀찍이에서 몸을 일으키려 발버둥치는 누군가의 유달리 육중한 존재감을 느꼈다. 고개를 돌린 라손은 부서진 스코프와 사이트 너머로 웬 건장한 사내의 모습을 확인했다.

“뭐야......”

라손은 혹시 헛것을 본 것이 아닌가 하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부서져 전복된 전차 뒤에서 칼을 뽑아들며 비틀비틀 일어나고 있는 남자는 조금 전 그의 돌격에 나동그라졌던 그 괴물이었다.

“이런, 제길, 빌어먹을.”

라손이 이를 빠득 갈았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덩어리피가 희미해진 라손의 시야를 더 흐려놓았다.

“제네르 저 바보 헛똑똑이년........저런 개새끼를 도대체 뭣 하러 사귀었었을까......,”

자신의 잘린 팔을 잠시 돌아보았던 라손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아니, 적들에게서 그를 감춰주고 있던 말의 시체 위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남아있는 오른팔, 그리고 한쪽 다리만으로 친구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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