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34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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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손의 공격 때문에 제네르를 죽일 기회를 놓친 제롬은 멍해진 정신을 가다듬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보통의 시민이었다면 이 정도의 충격이면 온몸의 뼈가 부서졌거나 쓰러져 몇 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겠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깊은 흠집이 패인 방패를 쳐다보며 대뜸 욕을 내뱉었다.
“그 빌어먹을 꼬맹이년.”
라손 때문에 첫 번째 기회를 놓쳤던 제롬은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들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 여전히 쓰러져 있는 제네르에게 다시 돌아섰다. 특별히 다친 곳은 없었지만 창에 튕겨나 굴러가면서 받은 충격 때문인지 머리도 어질어질하고 다리가 쇳덩이라도 단 듯 무거웠다. 하지만 숙부 마누엘에게 그렇게까지 큰소리를 치고 왔으니 이번엔 어떤 일이 있어도 제네르의 목을 직접 잘라 가져가야만 했다.
“헉, 헉.”
조금씩 의식을 되찾아가는 제네르가 가늘게 고개를 까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그에게 다가가고 있는 웬 핏덩이, 아니 필사적으로 기어가고 있는 웬 놈을 발견했다.
“저년이!”
잠시 비틀거렸던 제롬이 칼을 짚고 그곳을 향해 악을 쓰며 걸음을 내밀었다. 하지만 제네르에게 먼저 다가간 라손이 친구의 얼굴을 급히 흔들며 일어나라 재촉하고 있었다. 짜증을 내려던 제롬은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단장하고 부단장을 나란히 죽여주는 것도 좋겠어.”
제네르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키려던 라손은 가늘게 눈을 뜨는 친구의 모습에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는 제롬의 모습에 그는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팔과 다리에 중상을 입은 그도, 쇼크 상태의 제네르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구.......야?”
희미하게 정신을 차린 제네르가 바닥에 엎드린 채 어눌한 발음으로 물었다. 하지만 아타르의 고삐를 급히 붙든 라손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젠 친구도 못 알아보냐, 이 헛똑똑이년아.”
라손은 뒤에서 다가오는 제롬과, 적병들과 한참 격전을 벌이고 있는 아군 진영을 번갈아 쳐다보며 이와 한 손으로 아타르의 고삐를 제네르의 목과 어깨에 묶었다. 급해서인지, 부상 때문인지, 그의 숨이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쇄도해 온 제롬의 모습을 확인한 라손은 꽉 쥔 고삐를 확 흔들며 아타르에게 쥐어짜듯 말했다.
“제발 가! 빨리 가!”
신호를 받은 말은 주인과 라손을 바닥에 질질 끌고 아군 진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악에 받혀 쫓아오던 제롬 역시 쉽사리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어딜 도망가냐!”
제롬이 칼을 치켜들며 둘의 뒤를 쫓아왔다.
“네 두 년 모가지를 같이 걸어놓을 테니.......앗!”
도망치는 아타르의 엉덩이를 향해 힘껏 칼을 내지르던 제롬은 놀란 말의 거친 뒷발질에 놀라 중심을 잃고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넘어지던 그의 오른손은 말에 끌려가던 제네르의 발목을 덥석 붙들었다.
“씨발! 떨어져!”
놀란 라손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제롬을 마구 걷어찼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버둥거리며 말에 잠시 함께 끌려가던 제롬은 바닥에 있던 죽은 나무둥치를 덥석 움켜쥐었다. 그의 우악스런 힘에 저지당한 아타르가 달리다 말고 휙 돌아서며 자리를 잠시 맴돌았다.
“아, 아악......”
계속 움직이려는 말과, 발목을 붙들고 잡아당기는 제롬 사이에서 제네르가 본능적으로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냈다. 달아나던 말을 멈춰 세운 제롬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제네르의 발목을 힘껏 잡아당겼다.
“끄, 아악......”
의식이 조금 더 맑아진 제네르가 야수같이 으르렁대는 제롬을 눈을 매섭게 쏘아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제네르와 라손, 둘 모두의 목숨이 이제 제롬의 손아귀에 완전히 쥐여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쫓아오던 2기의 남부기병들이 어느새 그의 눈에 보일만큼 접근해 있었다.
“빌어먹을.”
한 발로라도 일어서려 버둥거리던 라손은 아직 흐릿한 친구의 눈빛을 마지막으로 올려보았다. 그는 무슨 이유엔지 눈물로 젖어들기 시작한 얼굴에 잠시 미소를 지었다.
“총리께서 내 잘린 머리에도 입 맞춰 주실까......”
“재수 없는 소리 집어 쳐, 이년아.”
제네르가 고통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몸을 묶은 고삐의 매듭을 풀려 했다. 하지만 아직 의식이 희미한 그보다는, 라손의 손이 그나마 조금 더 빨랐다. 라손은 왼손으로 쥐고 있던 아타르의 고삐, 아니, 생명줄을 확 놓으며 허리춤의 단검을 대신 뽑아들었다.
흐릿해져있던 제네르의 눈이 순간 놀라움에 확 커졌다.
“가! 아타르!”
라손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는 제네르의 발목을 붙들고 있던 제롬의 굵은 손목을 있는 힘을 다해 내리찍었다.
“악!”
놀란 제롬이 얼른 손을 놓았지만 그의 칼끝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오른쪽 손목을 관통당한 제롬이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렸고, 동시에 풀려난 아타르가 다리에 힘을 주며 주인을 매단 채 아군 진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한 명만을 매단 아타르의 걸음은 조금 전보다 훨씬 빨랐다.
“서! 씨발! 개 같은!”
제롬이 피가 흐르는 손목을 싸쥐며 다시 제네르를 붙들려 했지만 그의 굵은 오른팔에 한 손으로 결사적으로 매달린 라손이 순순히 놓아주지 않았다.
“가! 빨리 가!”
라손은 말에 매달린 채 버둥대며 멀어져가는 친구를 돌아보며 울부짖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계속 자신의 눈에 고이던 눈물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마술처럼 의식을 찾은 제네르는 라손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부르며 악을 쓰고 있었다.
“그래, 잘 한 거야......”
라손은 갑자기 공중으로 솟구치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입가에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렇게 죽더라도, 절대 고통에 추해진 표정만은 짓지 말아야겠다고 맘먹었다. 언젠가 자신의 시체를 찾기 위해 돌아와 줄 제네르에게 쓸데없는 죄책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순간, 끔찍한 충격이 그의 머리를 사정없이 짓이겼다.
“이년이!”
급해진 제롬이 그 굵은 팔을 힘껏 휘둘러 이 조그만 적을 바닥의 큰 돌 위에 머리부터 사정없이 내리꽂았다. 이미 반쯤 부서져 있던 라손의 투구가 피, 살점과 함께 공중으로 산산이 날아올랐지만 마치 쇳덩이처럼 굳어버린 그의 한쪽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씨발! 떨어지란 말이야!”
제롬은 왼손으로 단검을 뽑아 라손의 가슴을 악을 쓰며 찔렀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악에 받쳐 라손의 가슴과 배를 마구 난도질하던 제롬은 그의 숨이 이미 끊어져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뭐야.......이게.......”
온몸에 소름이 돋은 제롬이 천천히 팔을 떨구며 비틀비틀 뒷걸음쳤다. 제롬의 팔을 껴안은 그 자세 그대로, 그의 작은 몸이 팔에서 미끄러지며 바닥을 굴렀다. 힘없이 꺾이는 목 위로, 라손의 부서진 머리에서 피와 뇌수가 주르르 흘러내렸지만 마치 굳은 시체처럼 뻣뻣해진 팔만은 그대로였다.
“학, 학......”
시체와 눈이 마주친 제롬이 놀라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직 동그랗게 뜨고 있는 라손의 두 눈은 무언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의 입에는 이해할 수 없는 엷은 웃음이 번져 있었다.
슈로 기사단 부단장이며 단장 제네르의 오랜 친구인 라손 비에이라 바얀 장군은 황성의 잔혹한 전장에서 군인으로서, 그리고 누군가의 벗으로서도 전혀 부끄러움 없는 최후를 맞은 한 명의 당당한 탈라스 귀족으로 남게 되었다.
제네르를 매단 채 난전이 벌어진 전장에 확 뛰어든 아타르에게 남부 기병들이 우루루 달려들었지만 기사단 기병들 역시 단장이 그대로 당하도록 놔두지는 않았다. 동료들이 적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새, 몸을 날려 아타르를 붙들어 세운 기사단 기병이 말에서 급히 뛰어내려 제네르를 살폈다. 이미 눈물에 범벅이 된 제네르가 고개를 마구 저으며 악을 썼다.
“라손! 라손을 구하러 가란 말이다! 명령이야! 씨발 명령이라니까!”
“상장군님! 제발, 제발 진정하시고.......”
“당장 가! 당장!”
이성을 잃은 제네르를 기병들이 급히 달려들어 뜯어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친구의 끔찍한 죽음을 눈앞에서 그대로 목격한 그는 부상마저도 잊은 듯 바닥에 마구 머리를 찧었다.
“상장군님! 무사하십니까!”
아메샤 스펜타 보병들과 함께 막 도착한 시로가 놀란 표정을 감추며 제네르에게 허둥지둥 달려왔다. 하지만 연인을 안아주려던 시로를 기다리고 있는 건 매서운 따귀 한 대였다.
“이 못난 새끼!”
멍해진 시로에게 제네르가 다시 악을 썼다.
“왜 이제.......왜 이제야.......왔냐고.......왜, 왜!”
제네르가 소리를 지르며 시로의 뺨을 다시 후려쳤다.
“왜 이제야.......왜.......”
당혹해하는 시로의 뺨과 가슴을 몇 대나 후려친 제네르는 탈진한 듯 자리에 축 늘어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멍해져있던 시로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말에 뛰어올랐다. 그는 최소한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무얼 해야 할 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라손 바얀 대장군을 찾으러 간다! 날 따라와!”
앞장서는 시로를 따라, 아메샤 스펜타의 보병과 가디언들이 창을 높이 치켜들며 악 소리를 질렀다.
“돌격!”
보병, 기병을 데리고 제롬을 향해 돌진하는 시로의 어딘지 불안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제네르가 거친 숨을 헐떡였다. 시로가 온 이상, 그리고 지금까지 기사단이 버티어 준 이상, 제롬의 돌격은 실패였다. 그리고 이제 이 길고 긴 황성 전투의 승부는 사실상 결정되었고, 제롬을 잡느냐, 놓치느냐에 ‘다음 전투’가 또 벌어질지 아닐지가 결정될 터였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던 제네르는 옆에 있던 근위병의 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나를.......일으켜다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단장님께선.......”
“닥치고 아타르 위에 날 다시 올려달란 말이다. 명령이다.”
“보십시오, 장군님께선 팔도 부러지셨고......”
근위병은 부러져 뼈까지 드러난 제네르의 팔, 그리고 산산조각난 흉갑과 투구를 가리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네르가 순간 이를 드러내며 악을 쓰며 근위병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씨발! 난 탈라스 사람이다! 내 다리 위보다 말 등이 더 편하단 말이다! 시로 대장이 저 형편없는 기마술로 제롬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상관의 이 어처구니없는 명령에 당혹스러워진 근위병은 옆에 있는 동료의 얼굴을 잠시 돌아보았다.
“빨리!”
제네르가 아타르의 고삐를 움켜쥐며 혼자서라도 일어나려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당황한 근위병들은 하는 수 없이 그의 몸을 일으켜 아타르의 등 위에 힘껏 올렸다. 거의 버둥거리듯 아타르 위에 오른 제네르는 말의 갈기를 움켜쥐고 힘겹게 중심을 잡았다.
“헉, 헉.”
제네르는 고삐를 당겨 부러진 왼팔에 이로 꽉 묶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고 아직 성한 오른팔에 검을 뽑아들며 말을 되돌렸다.
“돌아가자, 아타르, 마지막 싸움이 아직 남았으니.......”
주인의 명을 받은 이 충직한 말은 비틀거리는 제네르를 실은 채, 조금 전 그렇게도 힘겹게 떠나 온 그 지옥을 향해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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