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36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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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자한 공이 ‘공격 중지 여부’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한 건 제롬의 기습대가 슈로 기사단 수뇌부를 바로 무너뜨리지 못하고 질질 끌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같은 시간, 지금까지 웅크리고만 있던 플라칼 가 역시 사방을 포위한 동부기병들을 향해 천천히 진격을 개시했고, 조금 더 지난 후에는 제롬이 중상을 입었다는 연락까지 그의 결정을 옥죄고 있었다.
“제롬 공이 의식을 잃어 더 이상 지휘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젠.......”
참모의 보고에 샤자한 공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하필 이런 때 지휘권이 내 차지라니.......달갑지 않은 악역만 내 차지가 되었군.”
샤자한 공은 조금씩 전진해오는 플라칼 가 보병대를 노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공동 사령관인 제롬까지 쓰러졌으니, 이제 모든 결정권, 그리고 결정의 책임까지도 그의 손에 있었다. 사령부에서 도망친 마누엘 역시 세닉 가 보병대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연락이었다.
“슈로 기사단은?”
“남부기병 잔여 병력과 교전중입니다만 이미 전세는 기운 것 같습니다. 단장의 근위기병대는 가디언 전차대에 당해서 피해가 컸지만 남부기병들과 맞붙은 주력병력은 큰 타격을 입지 않은 모양입니다.”
참모가 겁먹은 듯, 조금씩 다가오는 플라칼 가와, 슈로 기사단이 있을 동쪽 언덕 너머를 초조한 얼굴로 번갈아 쳐다보며 가까스로 알아들을 정도의 빠른 말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샤자한 공은 평소처럼 진중한 표정 그대로였다.
“남부보병은 둔하고, 슈로 기사단은 지휘관이 무더기로 쓰러진데다가 전투도 다 끝나지 않았으니 당장 오줌이라도 지릴 것처럼 난리칠 것 없다.”
“아, 알겠습니다.”
참모가 무안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슈로 기사단은 누가 지휘중인가? 단장이 중상이고 부단장이 죽었다면서?”
“흐음........단장의 수석 부장인 발리 크룩스 힐거 중랑장이 지휘중입니다.”
“훗, 서부 무장이 중장기병대를 지휘한다니. 쓸 만한 놈인가?”
샤자한 공이 피식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기병이라는 병종 자체가 전무하다시피 한 서부 출신들은 그간 ‘기병 전문’으로는 이렇다 할 지휘관을 낸 일이 없었다. 급히 자료를 검색해 본 참모가 여전히 초조한 얼굴 그대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서부 테나토 출신이고 아쉬드 하지즈 장군과 함께 플레렌 가에서 최고로 꼽히는 맹장이었습니다. 한때 ‘은발의 미치광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물불 안 가리는 격한 성격으로 유명했습니다만 제네르 하크로딘 밑에 있으면서 이제 많이 달라진 모양입니다.”
“하긴, 제네르 그것이 수석부장으로 둘 정도면......”
샤자한 공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플라칼 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견고한 중장보병대를 선두로, 그들이 동부기병대를 슈로 기사단 쪽으로 천천히 몰아붙이고 있었다.
“플라칼 가를 공격하려면 슈로 기사단이 아직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지금 해야 합니다. 놈들이 남부기병대를 다 쫓아내고 나면 바로 우리 쪽으로 칼을 돌릴 테니......”
“저 돌덩이 같은 보병대를? 글쎄, 내일 아침까지 두들기면 조금 무너질지는 모르겠군. 그때까지 슈로 기사단은 남부기병대 정도는 5번도 넘게 쫓아낼 걸.”
지난 동부에서의 전투에서 플라칼 가 보병들을 이골나게 겪어 온 샤자한 공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마치 남의 일처럼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플라칼 가에 나머지 기병대까지 다 합류하면 총 6만이지. 여기서 저네들을 공격하지 않고 최소한 중립으로 묶어둘 수 있다면 연합군은 6만의 손해를 보는 걸로 끝나지만, 저네들이 동맹군에 합류하면 12만, 아니 그 이상의 손해가 될 거야.”
“하지만.......”
“제네르 그년이 공성중인 근위대 후미를 치지 않고 우리를 먼저 치려 한 속셈이 무엇 때문이라 생각하나?”
샤자한 공의 뜬금없는 물음에 참모들이 나름대로 한 마디씩 대답했지만 내용들은 거의 비슷했다.
“그야 근위대의 전력이 워낙 막강해서 시민 출신 기병대로는 후미를 쳐도 쉽사리 무너지지는 않을......”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그년이 너희들보다는 확실히 똑똑해.”
샤자한 공이 참모들을 돌아보며 혀를 끌끌 찼다.
“제롬 그 새끼가 2제후의 딸을 왜 죽였는지는 알 수 없지. 하지만 그런 정도의 일이라면 카나르 경의 분노도 언젠가는 누그러들 거야. 그때 플라칼 가가 못이기는 척 되돌아올 핑계를 만들어 주려면 우리로서는 차라리 저네들하고 싸우지 않는 게 이득이야. 제네르 그 교활한 년이 우리를 먼저 치려고 했던 것도 그런 상황을 예방하려는 속셈이었겠지. 플라칼 가를 어떡해서든 싸움에 빨리 끌어들이려고 말이야. 훗.”
샤자한 공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슈로 기사단이 막바지 싸움을 벌이고 있을 동남쪽 언덕을 다시금 돌아보았다.
“그렇게 보면 제롬 녀석이 슈로 기사단을 친 것이 소득이 없는 건 아냐. 최소한 플라칼 가하고 연합군이 교전을 벌이고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상황을 꽤 오래 막을 수 있었으니.”
“하지만 플라칼 가 놈들이 먼저 공격을 해 오고 있는데.......맞서 싸우든 퇴각하든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초조해진 참모들이 당장이라도 말을 돌릴 것처럼 제자리를 맴돌며 이구동성으로 목소리를 높였지만 샤자한 공은 마치 무엇이라도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들의 애타는 간언에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바로 그때, 샤자한 공의 할룩스에 나타난 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베흔의 얼굴이었다. 거의 몇 시간동안 계속된 황성 동북문 안쪽의 전투가 여전히 지지부진하면서 그 역시 탈진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호, 그쪽 상황은 어떤가? 근위대장.......얼굴이 별로 좋지 않군. 당장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군 그래?”
샤자한 공이 태연한 얼굴로 대번 물었다. 그의 무책임한 조롱에 베흔이 이를 빠득 갈며 눈가의 걱정을 애써 감추었다.
아들 제롬이 중상을 입고 팔까지 잘렸다는 소식에도 그는 애써 태연하려 하고 있었지만 스스로도 모르게 드러나는 속내만은 완전히 감출 수 없었음을 뒤늦게 깨달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관심은 제롬이 치료를 받고 있을 보병대 후방을 자꾸 향하고만 있었다.
“공께서 연합군의 지휘권을 가지고 계시니 상의는 해야겠기에.”
베흔은 행여 감정이 드러날까 말꼬리를 최대한 빨리 끊었다.
“무얼 말인가.”
“빤히 알면서 외면하시는 건 이번 결정에 있어서 책임을 지지는 않겠다는 속내이십니까.”
베흔이 짜증스레 따져 물었지만 샤자한 공 역시 여전했다.
“이번 전투에서 난 한 게 없어. 배신한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는 가문 하나 붙들고 그 주변만 빙빙 맴도느라 이젠 어지럽기만 해. 공격도 그 잘난 남부 최고제후께서 멋대로 결정하신 것 아닌가. 나와는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말이야.”
샤자한 공이 이번 전투 내내 묵혀놓았던 감정을 드러내며 베흔에게 대번 쏘아붙였다. 실제로, 이번 공격을 시작하면서 제롬은 명색이 공동사령관인 샤자한 공에게도 막판에 일방적인 통지만을 했을 뿐이었다.
“내 듣기로 자네도 통지만 받았다면서? 하긴, 공동사령관도 모른 척 한 인간이 자네라고 제대로 알렸겠나.”
베흔은 지금 이 순간, 경솔한 공격결정을 내린 아들을 나무라는 데 맞장구를 쳐야 하는지, 아니면 이 중요한 순간에 고작 내분이나 벌이자며 시비를 거는 샤자한 공에게 화를 내야 하는지 헛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그는 지나간 일을 붙들고 묵은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일은 나중에 논하시고 지금 결정할 것부터 생각하시죠.”
베흔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샤자한 공을 재촉했다.
“좀 더 솔직해지시죠. 퇴각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는 않으신 겁니까?”
“자네가 먼저 제안하면 진지하게 고려해 보지.”
샤자한 공이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음을 지었다. 순간 욱해진 베흔은 저 사내가 코앞에 있었다면 목을 비틀어 죽이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런 식이시군요. 하지만 공의 그 잘난 신중함이 매번 큰일을 그르쳐 왔다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셨나요?”
베흔의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에 샤자한 공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베흔이 그런 그에게 손을 저으며 짜증스레 내뱉었다.
“그래요,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죠. 근위대장으로서 진지하게 건의합니다. 지금 전군을 퇴각시켜야 합니다. 놈들의 성벽을 무너뜨렸고, 한쪽 성문도 파괴했으니 애초 기대했던 정도는 아니어도 1차 공성전으로서는 나름대로 전과를 얻은 셈입니다. 플라칼 가를 더 이상 자극하지 않고 이번 전투를 끝내면 다음 전투를 충분히 기약할 수 있습니다.......이제 됐습니까?”
“훌륭하군. 내 총사령관으로서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샤자한 공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참모들에게 돌아서며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전군 퇴각한다! 성 안으로 진입한 근위대가 제일 먼저 물러나고 남부보병대가 그 뒤에 퇴각한다. 플라칼 가는 공격하지 말고 이대로 놔두도록.”
“알겠습니다.”
그제야 기다리던 명령을 얻은 지휘관과 참모들이 황급히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그리고 동북문 안쪽에서 교전중인 근위대 쪽에서 제일 먼저 울려온 퇴각나팔 소리가 어느새 짙은 어둠 속을 무겁게 흔들었다.
황성의 첫 전투는 늦은 오후부터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계속된, 연합군과 동맹군에게는 개전 이래 가장 치열한 혈전이었다.
동북문 안쪽에서는 물러나는 근위대의 뒤를 맹렬히 몰아붙이는 아메샤 스펜타 전사들의 의기양양한 고함소리와 승리의 환호성이 메아리치며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근위대는 부상병, 그리고 전사자들의 시체까지도 꼼꼼히 챙긴 후에야 대오를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고 정연하게 물러나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총 지휘를 위해 잠시 물러난 카렐을 대신해 동북문 광장의 전투를 지휘하던 베아트릭스는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동북문 양쪽 누각과 성벽을 올려보며 욕을 내뱉었다.
비록 물러나고 있었지만, 근위대는 다음 공성전을 대비해 자신들이 점거했던 모든 지역을 초토화시킬 정도로 충분히 용의주도하고 집요했다. 동북문은 이미 크레인 장치까지도 근위대 사역병단 손에 산산조각나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그 양쪽 누각과 성벽까지 그들 손에 철저하게 부서졌으니 재공격을 받게 된다면 이곳은 또다시 취약지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러나! 물러나! 대오를 지켜라! 우리는 거둘 만큼 거두었다! 급할 것 없으니 대오를 지키란 말이다!”
근위대의 가디언 사관들이 퇴각령에 사기가 한풀 꺾인 병사들을 앞장서 격려하며 일사불란하게 부대를 통제했다. 지금껏 근위대들의 진로를 오직 정면으로만 묶어놓고 있던 동북문 광장의 양쪽 옹성은 이번에는 편을 바꾸어 그들의 퇴로 측면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어벽이 되어 있었다. 양측면의 옹성 때문에 동맹군 역시 퇴각하는 그들의 측면을 칠 수가 없었다.
“어떡할까요? 적을 쫓아 성 밖까지 나가야 할지 명령을 주십시오!”
황빈에서 한 명의 무장 자격으로 돌아간 베아트릭스가 황제의 앞에 꿇어앉으며 물었다.
“동부기병들이 플라칼 가를 내버려둔 채 물러난다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동부기병들이 반격을 할 수 있으니 경기병대가 최대한 조심해서 뒤쫓고 보병대는 무너진 성 위치를 사수해라.”
성문이 무너지는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보고 있던 카렐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리며 힘없이 대답했다. 그의 손에 들린 ‘기사단 1차 전사자 목록’의 맨 위에는 너무도 익숙한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잠시 휘청거리던 카렐은 무너진 돌더미 위에 털썩 앉으며 그 큰 손으로 얼굴을 싸쥐었다. 라손의 전사 소식을 접한 황제가 비록 겉으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 그가 왜 얼굴을 가리는지 정도는 측근들 모두가 눈치 챌 수 있었다.
“남부기병들은?”
애써 침착함을 되찾은 카렐이 앞에 연결되어 있던 발리의 형상에 물었다. 제네르의 참모들을 뒤에 거느리고 있던 발리가 전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지금 거의 도주했고, 1개 연대가 놈들의 뒤를 쫓으며 재집결을 막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카렐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사방에서 벌어진 전투다보니 마무리하는 것만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수고했다, 힐거 장군. 단장과 부단장이 쓰러진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해 주었구나. 지휘부 모두 고생이 많았다.”
“감사하옵니다. 모두 상장군께서 평소 가르침을 주신 덕분입니다.”
발리가 머리를 조아리며 모든 공을 제네르에게 돌렸다. 하지만 얼떨결에 기사단 전체의 지휘를 맡게 된 그는 물론이고, 지휘부 전체가 침울한 분위기였다. 발리의 떡 벌어진 넓은 어깨는 흙먼지와 피얼룩, 그리고 이런저런 흠집으로 가득한 채 지난 전투의 처절함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테나토의 귀족 발리 크룩스 힐거 경, 경을 기사단의 새 부단장으로 삼겠다. 축하한다. 이제 당당한 ‘장군’이니 ‘은발의 미치광이’ 이름값을 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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