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37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
.
.
“테나토의 귀족 발리 크룩스 힐거 경, 경을 기사단의 새 부단장으로 삼겠다. 축하한다. 이제 당당한 ‘장군’이니 ‘은발의 미치광이’ 이름값을 해 다오.”
“망극하옵니다. 소장 오직 폐하만을 위해 충심을 바치겠나이다.”
기사단의 신임 부단장 발리가 바닥에 꿇어앉으며 가슴에 얼른 손을 가져갔다. 카렐은 꿇어앉은 그의 어깨에 손을 가져가며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제네르와 라손 둘 다 쓰러진 상황에서 발리라도 있어 준 것이 이토록 고맙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발리의 우람하고 당당한 어깨가 오늘따라 듬직하게 느껴졌다.
“상장군이나 신임 단장이 병상에서 복귀할 때까지 경이 기사단을 이끌도록.”
“과분한 중임이오나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발리가 처졌던 목소리에 최대한 힘을 주며 침울해진 황제에게 강한 자신감을 내보였다.
카렐이 명령을 이었다.
“근위대가 1차로 물러나면 남부보병대가 2차로 퇴각해서 파괴된 사령부를 재장악하려 할 거다. 그리고 동부기병들도 곧 너희를 공격하려 할 거다. 퇴각하는 적들이 모두 너희를 노리고 덤벼들 테니 지금 그들과 맞대결하는 건 바보짓이다.”
“그러하오면.......”
“하지즈 장군이 건무성에서 이끌고 온 배에 충분한 여유가 있다 하니 더 이상의 추격과 교전은 포기하고 최대한 빨리 남하해서 서부연합군과 합류하도록 해라. 그리고 건무성으로 퇴각해서 다음 명령을 기다려라.”
“예, 알겠습니다.”
“중상을 입은 제네르 경은 선편으로 황궁에 보내도록. 라손 경의 유해도 함께.”
짧은 말꼬리를 붙이며 카렐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후우.”
조금씩 사라지는 발리의 형상을 말없이 지켜보던 카렐은 한때 동북문이 있었던 폐허를 다시금 돌아보았다. 이번 전투 전에는 부실한 성벽이나마 남아있었지만 이제 다음번 공격은 그나마 성벽과 성문조차 없이 막아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우리의 승전입니다. 힘을 내십시오, 폐하. 적들이 물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축 처져있는 카렐을 올려보며 베아트릭스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글쎄, 승전이라고는 해야 하겠지.......어쨌든 우리는 지키는 쪽이었으니.”
잠시 쓴웃음을 지었던 카렐은 전투 내내 계속 자신의 곁을 지킨 가장 충직한 무장, 그리고 그에 앞서 가장 든든한 배우자이기도 한 그를 품에 꼭 안았다.
“황궁에서의 첫 승전을 하례드리옵니다.”
황제의 품에 잠시 얼굴을 기댔던 베아트릭스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꿇어앉으며 노획한 셈의 검을 황제에게 공손히 올렸다.
“고맙소, 황빈.”
어두운 하늘을 한 번 올려보았던 카렐은 큰 숨을 탁 내쉬며 손뼉을 짝짝 쳤다. 황제의 박수 소리를 들은 주변에서 장병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적을 몰아냈으니 승전나팔을 불어라! 도망가는 놈들 오금이 저리도록 함성도 지르고! 최대한 크게!”
카렐이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우렁찬 포효로 이 동북문 광장을 울렸다. 바닥에 흩어진 무수한 핏자국, 그리고 죽어 쓰러져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시체와 살점들 위로 황제의 큰 함성소리가 메아리쳤다.
“세나우스 4세 카렐 대제 만세!”
아메샤 스펜타 장병들 사이에서 터져나온 이 외침이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세나우스 2세, 유평 대제에게만 허용되어 온 ‘대제’라는 호칭을 제국 최초로 ‘자력’으로 제위에 오른 이 강인한 지배자에게도 붙이는 데 그 누구도 거부감을 내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황제 스스로조차도.
무너진 성벽을 대신해 황궁 전역에서 끓어 넘치는 열기와 격한 환호성, 그리고 퇴각하는 근위대를 뒤쫓는 경기병대의 빠른 말굽소리가 어느새 자정을 넘긴 ‘제1차 황성전투’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뒤이어질 전투---혹시 그것이 있게 된다면---에서 또다시 겪게 될 지도 모르는 어려움은 일단 모두 잊은 채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죽어가는 샤미르, 그리고 오르마즈를 아케메니안 궁 옥상에 놔둔 채 잠시 자리를 비워주었던 베흔은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30여분이 지난 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그는 다시 옥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번은 혼자가 아니었다.
아케메니안 궁 옥상에 다시 올라선 베흔은 노란 수선화 꽃밭을 쳐다보며 마지막으로 마음을 굳혔다. 크지 않은 꽃밭 가운데, 샤미르는 마치 잠든 것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미소를 띤 채 누워있었고, 오르마즈는 그 앞에 꿇어앉은 채 이미 죽은 지도자의 식은 가슴을 눈물로 적시고 있었다.
베흔은 화단 한쪽 흙에 앉아 혼자 꽃을 꺾으며 놀고 있는 작은 갓난아기를 잠시 돌아보았다.
“지 아비가 죽은 것도 모르니 차라리 다행인가.”
베흔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샤미르의 유언대로라면, 저 아기는 이제 콜로니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국상을 준비하라 일렀습니다.”
베흔은 성큼성큼 걸어 오르마즈에게 다가갔다. 그의 뒤에는 동기 8그룹 X 2명이 동행하고 있었다.
“마시야스 왕제가 상주가 되어 장례절차를 맡을 겁니다.”
“뭐라고?”
그제야 고개를 치켜든 오르마즈가 베흔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냐. 후계자가 이미 유언으로 지명되어 있으니 상주는 유평 전하께서 되셔야 한다는 걸 모르나.”
베흔은 오르마즈를 내려다보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르마즈는 그의 묘한 표정에서 순간 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이 새끼가......”
베흔에게 바로 목소리를 높이려던 그는 일단 샤미르의 시체를 병상에 다시 눕혀주고 흰 천으로 얼굴을 덮었다. 오르마즈는 미소 띤 고인의 얼굴이 완전히 가려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천천히 베흔을 향해 돌아섰다. 최소한 이 상황만은 비록 고인이라 해도 그의 눈앞에서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분께서 후사에 관해 밝히셨을 때 네놈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냐? 혈통을 떠나서 후계자가 전임자의 상주가 된다는 불문율을 알 텐데?”
“물론 그 자리에 있었지요.”
베흔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눈짓을 받은 3명의 동기들이 오르마즈의 양 옆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설마 저 한 살 반짜리 핏덩어리가 지도자 자리를 지킬 수 있으리라 믿으시는 건 아니시겠죠?”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함을 깨달은 오르마즈는 멍한 얼굴로 조심스레 뒷걸음쳤다. 하지만 베흔과 그의 동기들은 그런 그를 위협하듯 무기를 든 채 그에게 계속 다가왔다.
“이리 와.”
오르마즈는 바닥에서 혼자 놀던 어린 유평을 덥석 팔에 안아들었다. 베흔의 이런 수작이 자신을 단순히 ‘설득’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 훨씬 위험한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인지, 당장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장군님, 충분히 현명하신 분이시니 좀 현실적으로 생각하시죠.”
베흔이 숨결마저도 느껴질 듯 가까이 다가오며 오르마즈에게 다시 미소를 지었다.
“강경파는 일단 숨을 죽였지만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는 건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이 꼬맹이를 데리고 무얼 어쩌시려고요?”
“그게 지금 저분의 시신 앞에서 감히 할 소리냐?”
오르마즈가 눈을 부릅뜨며 베흔을 노려보았다. 숨이 끊어진 샤미르의 시체는 아직 채 식지도 않은 채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마시야스는 일단 섭정으로 세우고 너와 내게 대신 나라를 세울 책임을 주신 것 아닌가! 길지도 않아! 20년, 아니 15년만 우리가 애써 준다면 준발현자인 저분께는 지도자 수업으로 충분해!”
“전 그렇게는 못 기다립니다.”
베흔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동기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들은 아기를 안고 있던 오르마즈의 팔을 낚아채려 했지만 그 역시 지지 않고 팔을 거칠게 떨쳐냈다.
“네놈이 감히 누구 사주를 받아서.......”
“글쎄요, 굳이 사주 따위를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새 지도자로 제가 올라도 이상할 건 없을 텐데요?”
베흔은 마주선 오르마즈의 낯빛이 창백해지는 것을 마치 즐기듯 묘한 미소를 품었다.
“아기를 빼앗아.”
X 한 명이 달려들어 오르마즈의 목을 뒤로 확 비틀었다. 그 사이 다른 한 명이 그의 팔에서 어린 유평, 그리고 주머니에 있던 샤미르의 유언장을 거칠게 빼앗아들었다. 완력에 끌려간 아기가 놀란 듯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위험한 씨는 애당초 없애는 게 낫죠. 장군님을 포함해서요.”
베흔이 안됐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오르마즈를 붙든 동기들에게 옥상 구석을 가리켰다.
“군주가 죽으면 신하들이 따라죽었던 때도 있었다죠. 투신하기 아주 좋은 곳입니다. 높이도 딱 좋고.”
베흔의 눈짓에 X들이 오르마즈를 옥상 구석으로 질질 끌고가기 시작했다. 베흔 역시 시끄럽게 울어대는 아기의 뒷덜미를 한 손에 쥐고 흔들며 능글능글한 미소와 함께 그 뒤를 따랐다.
“장군님, 부르셨습니까.”
뒤에서 들려온 웬 목소리에 깜짝 놀란 베흔은 아기를 얼른 품에 안아들며 휙 돌아섰다. 오르마즈의 목을 조르고 있던 X들도 재빨리 팔을 풀며 딴청을 피웠다.
“무슨.......일 있습니까?”
엘리베이터 출구에 서 있던 야전사령관 케레사스 솔로스 중장은 옥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묘하게 싸늘한 분위기에 대번 경계서린 시선을 보냈다.
“소, 솔로스 장군님께서 오셨군요.”
억지미소를 지은 베흔은 오르마즈가 자신이 오기 전 미리 그를 불러들였음을 깨닫고는 이를 빠득 갈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건 솔로스 장군을 선두로 한 30여명의 고위급 장교들, 베흔과 그다지 친하지 않은 온건파 사람들, 리쿠 가 사람들, 혹은 내분에 관계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지도자 전하께서 돌아가셨다.”
X의 손에서 풀려난 오르마즈가 애써 표정을 고치며 베흔의 손에서 유평을 급히 빼앗아 안았다. 안 그래도 쿠데타 소식에 충격을 받았던 솔로스 장군은 멍한 표정으로 베흔을 돌아보았다.
오르마즈가 베흔에게서 떨어지며 입을 열려 했다.
“그분의 유언에 따라 후계자는.......”
“더 이상 입을 놀리시면 이 옥상도 아래층 강당처럼 피바다가 될 겁니다.”
낮은 귀엣말에 순간 입술이 굳은 오르마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등 뒤에 바싹 달라붙은 베흔의 단검이 어느새 그의 옆구리까지 와 있었다. 베흔이 그의 귀에 입술을 가져가며 속삭였다.
“강경파를 몰살시킨 제가 장군님이라고 못할 것 같습니까. 이 핏덩이나 회색분자 솔로스 녀석도 마찬가지고. 지금 궁에 주둔한 병력이 누구 휘하의 부대인지를 생각하시고 현명하게 판단하시죠.”
“네 야심대로는 안 될 거다. 네겐 그럭저럭 쓸 만한 부대와 무식하고 말 잘 듣는 동기들은 있을지 모르지만 조직을 정치적으로 장악할 능력은 없어. 그것도 몰랐나?”
오르마즈의 일갈에 베흔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가 파악하고 있는 스스로의 가장 큰 약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지방 세력은 이미 네 손을 떠났고, 폭주하는 것만 남았는데, 그나마 남은 건 유교집단 제니안뿐이야. 그 고루한 유학자들이 널 지도자로 따를 것 같나? 정통성도 없고, X출신인 너를?”
“그래 봤자 결국은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죠.”
“힘으로 다 해결할 수 있었으면 민병대는 교단 손에 옛날에 무너졌지.”
오르마즈가 코웃음을 지으며 유평을 안은 팔에 힘을 꼭 주었다. 베흔 역시 지지 않고 대꾸했다.
“한 살 반짜리 이 핏덩이를 지도자로 받들라는 것보다는 현실적일 겁니다.”
오르마즈는 어느새 자신의 옆구리를 바싹 파고들어온 베흔의 칼끝을 느끼며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는 그동안 숨겨두었던 베흔의 야심을 말만으로 꺾기는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최소한 유평만이라도 이 위기에서 구해내야 했다.
오르마즈는 등 뒤의 베흔을 돌아보며 아직 눈물자국이 남은 그 얼굴에 갑자기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었다. 놀란 베흔이 움찔하는 새, 오르마즈는 이 거구의 종아리를 구두 뒷굽으로 힘껏 걷어차고 그의 칼끝에서 무작정 빠져나왔다.
“뭐야!”
베흔의 칼끝에서 빠져나와 거의 넘어질 듯 달려오는 오르마즈의 모습에 솔로스 장군, 그리고 그를 뒤따라온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저놈이!”
비틀거리며 뒤따라오는 베흔을 급히 돌아보았던 오르마즈는 여전히 어리둥절해져 있는 솔로스 장군에게 어린 유평을 불쑥 내밀었다.
“유평 나이킨 리쿠 아씨네........내 다른 중요한 일이 있을 듯 하니 자네가 좀 맡아주고 있게나.”
“예?”
베흔이 오르마즈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그의 뒷덜미를 붙들어 바닥에 쓰러뜨린 것이 고작이었다. 얼떨결에 아기를 받아든 솔로스 장군은 오르마즈의 공포어린 시선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똑똑한 사람이었다.
“뭐 하는 짓인가! 베흔 소장!”
그는 아기를 빼앗으려는 베흔의 손을 뿌리치며 재빨리 경호원들 뒤로 물러났다. 오르마즈가 입을 틀어막는 베흔을 힘껏 밀어내며 마지막으로 소리를 질렀다.
“지도자 전하께서 지명하신 후계자니 목숨을 걸고.......”
“아기를 빼앗아!”
격앙된 베흔은 무어라 더 말하려는 오르마즈의 얼굴을 칼자루로 힘껏 후려쳐 쓰러뜨리고는 아기를 안은 솔로스 장군에게 달려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