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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541화 (540/1,132)

< -- 541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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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 성소 분위기에도 이제 제법 익숙해진 구르베스는 예배에 들어가서도 전처럼 눈치를 보거나 당혹스러워 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는 아직까지 ‘자신은 신도가 절대 아니다’라며 우기고는 있었지만 사교를 믿는 것이, 특히나 사교도가 많은 이곳 쿠트라스에서는 딱히 손가락질당할 일도 아니었다.

사실 구르베스도 신도가 아니라는 앞뒤 안 맞는 고집과는 별개로, 그저 ‘마음이 편해진다’는 그럴싸한 이유를 내세워 꼬박꼬박 예배에는 참석하고 있었다.

“이젠 일하는 게 많이 능숙해졌네.”

“푸훗, 그래?”

예배가 끝난 후, 제단을 치우던 구르베스는 옆에서 말을 걸어 온 새 친구에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 구르베스와 함께 성소 관리를 맡고 있는 견습성직자 겸 5년차 수련의(醫)인 살람은 ‘평화’를 뜻하는 그 이름의 어원은 물론이고 생김새까지도 전형적인 서부 사람이었다.

구르베스가 제단 한쪽에 수북하게 쌓인 책과 문서들을 가리키며 살람에게 말했다.

“이건 내가 치울 테니까 성직자님께선 저 책들이나 좀 정리하시지. 난 아직 바람 문자는 잘 못 읽는다고.”

“성직자는 무슨, 견습딱지 떼려면 아직 멀었는데.”

살람이 낄낄대며 웃음을 지었다. 제국에서 서부 출신의 사교 성직자를 보는 것이 드문 일이기는 했지만, 따져보면 요동 출신 구르베스 역시 이곳에서 별난 존재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구르베스는 서부 출신 어머니를 둔 덕에 자기 입으로 밝히지 않는 한 최소한 겉모양만으로 ‘요동 사람’임을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북부라는 곳 자체가 워낙 많은 혈통이 뒤섞인 ‘애매모호함’이 그 특징이다 보니, 누가 보기에도 ‘서부 사람’ 티가 확 나는 살람이나 어지간한 북부 사람보다 구르베스가 도리어 더 ‘북부사람 같은’ 아이러니도 없지 않았다. 물론 두 사람 모두, 대화중에 툭툭 튀어나오는 자기 지역의 사투리만은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가 없기는 했지만.

“옛날엔 모간 되면 머리 빡빡 깎았다더니, 지금도 그랬으면 너 큰일 날 뻔했네?”

구르베스는 길고 치렁치렁한 검은빛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넘기는 살람에게 장난처럼 말을 건넸다.

“그래도 ‘치욕의 해’ 이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기꺼이 빡빡 깎겠어.”

살람의 한 마디에서, 구르베스는 사교 성직자인 그와, 지금 신세야 어쨌건 제국의 최상류계급인 자신 사이에 놓인 묘한 거리감을 순간 느꼈다.

“훗, ‘치욕의 해’라.......”

구르베스는 짧은 쓴웃음으로 이런 기분을 애써 감추었다. 사교도들이 ‘치욕의 해’라고 부르고 있는 그 때는 보통의 제국민들이 ‘성전의 해’라고 부르는 기원 52년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치욕의 해는 아케메니안 시에 배신당해 버려진 5명의 마구스들이 샤미르에게 처형당하고, 그들을 지키려던 오르마즈가 민병대 사령관에서 쫓겨났던 기원 53년이었다.

구르베스는 내친 김에 호기심을 풀어볼 양 대뜸 물었다.

“그런데 참 이상해. 53년이면 동료 마구스들한테 배신당한 5명의 마구스들이 처형당한 해인데, 그 해를 ‘치욕의 해’로 정하는 데 12개 교단들이 다 동의했다는 거야? 그럼 그때 배신했던 6개 교단이 이제는 잘못을 반성했다는 뜻 아냐?”

“쉿. 누가 들을라. 마구스님들한테 누가 그런 표현을 멋대로 하래?”

갑자기 표정이 험악해진 살람이 재빨리 입을 가려 보였다. 깜짝 놀란 구르베스 역시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구르베스는 자신의 부주의함을 탓하며 살람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지금 이곳은 트라카 교단이었고, 당시 이들을 배신하고 테번과 협잡해버린 일부 마구스들을 살람 역시 혐오하고 있으리라는 짧은 생각에 생각 없이 입을 연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 뭐 너야 아직 분위기에 익숙지 않으니 말실수 정도야 할 수 있겠지.”

살람이 험해졌던 표정을 다시 풀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앞으로는 조심해. 그분들이 어떤 선택을 하셨든, 12분의 마구스 모두가 신의 현신이시라는 데는 변함이 없어. 그분들께서 자멸의 길을 가신 것 역시 무언가 목적을 위한 신들의 뜻이었을 테니까. 그러니 그분들의 선택에 누가 멋대로 반성 따위를 감히 할 수 있겠어?”

구르베스는 순간 대꾸할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어쨌든 먼저 실수를 한 것은 자신이었고, 살람은 견습이나마 곧 성직자 겸 의사가 될 사람이었다. 게다가 종교 문제로 살람과 논쟁을 벌이는 건 여러 모로 구르베스에게 손해였다. 그는 유학과 사교 모두에 정통한, 말 그대로 인텔리중의 인텔리였다. 아이러니하지만, 살람은 귀족 신분이었고, 한때 파예드 아카데미, 그것도 코리온의 문하에서 박사 과정까지 수학했던 인재였다.

지금도 살람은 당초 자신이 이곳에 와 트라카 교단 부설 의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사교 ‘따위’에 관심을 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장난스레 말하곤 했다.

사교도 의사들이 독점하고 있는 고급 의학지식을 제국에 널리 펴겠다는, 나름대로 거창한 뜻을 품었던 젊은 유학자가 어쩌다가 이런 황당한 탈선을 하게 되었는지까지는 구르베스도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파예드의 촉망받는 유학자였던 살람은 이제 사교도, 아니 한술 더 떠 성직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걷고 있었다. 언젠가 구르베스가 듣기로도, 요즘은 살람을 비롯해 한때 유학을 깊이 공부했던 사람들을 교단에서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살람이 손가락을 치켜들며 경고하듯 말했다.

“그때 일을 입 밖에 내는 건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터부에 가까워. 우리 교단은 물론이고 다하카르나 스루바라 교단도 그때 일은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거든. ‘치욕의 해’를 53년으로 정한 것도 그저 윗분들이 그렇게 결정한 것이 전부야. 그 이상의 이유는 나도 몰라.”

“거참.”

구르베스가 촛대를 걸레로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살람이 기도문들을 정리해 한쪽에 쌓으며 말을 이었다.

“뭐 뻔할 뻔자 헛소문이겠지만, 마구스님들 중에 아직 살아계신 분도 있다고 수군거리는 놈도 있고, 그때 테번이 실제로는 마구스님들과 그 후손들을 다 시해한 건 아니라는 말도 있어. 글쎄, 53년이 ‘치욕의 해’가 된 것도 그런 것하고 무슨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지.”

순간 구르베스는 하고픈 말이 목구멍으로 확 솟았지만 다시 꾹 눌러 참았다. 대신, 이전부터 너무도 궁금해 했던 주제를 슬그머니 꺼냈다.

“아참, 그럼 지금도 12개 교단이 이전처럼 만나서 무슨 모임 같은 거 한다는 거야? 네가 말한 그 ‘윗분’들이 말이야.”

“그런 거야 당연히 있지.”

살람이 별 시답잖은 걸 묻는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각 교단 2신관님부터 5신관님까지 4명이 각각 대표자가 된 ‘크바르나’ 회의가 있어. 총 12개 교단이니까 모두 합치면 48명이지. 여기에 제1신 다하카르 교단에서 한 명이 의장으로 나오고, 우리 교단에서도 한 명이 부의장으로 나가서 총 50명이지.”

“크바르나?”

“바람 어로 ‘신의 영광’이라는 뜻이야. 원래는 12분의 마구스들께서 가지시던 정기모임을 부르는 말이었다지. 그런데 그분들께서 다 돌아가신 이후로는 그 밑의 신관님들이 꾸려나가고 있어. ‘치욕의 해’를 정한 것도 거기에서일거야.”

“그럼 누가 오는지는 이미 빤히 알려진 거네? 신관들이야 이미 다 신분이 알려져 있으니. 그럼 별것도 아니잖나.”

“그런 셈이지.”

별 생각없이 대답했던 살람이 갑자기 구르베스를 흘겨보았다.

“근데, 넌 도대체 뭘 상상했길래? 쭈글쭈글한 노인네들이 시커먼 후드 뒤집어쓰고 축축한 지하실에 모여서 벌이는 음침한 모의라도 생각했냐?”

살람의 기가 막힌 비유에 구르베스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껏 생각하고 있던 교단의 ‘최고모임’은 살람의 이 우스꽝스런 비유에서 사실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우리 교단하고 다하카르 교단에서는 한 명씩 더 나간다고? 그럼 여기선 6신관님까지 나가는 거야?”

“그건 나도 잘 몰라.”

살람의 조금은 무책임한 대답에 구르베스가 눈을 흘겼다. 살람이 머쓱한 표정으로 얼른 대답을 추가했다.

“추가된 그 2명의 멤버가 누군지는 아무도 몰라. 우리 교단 ‘크바르나 멤버’는 제5신관 니사 라말라 박사님이 끝이니까.......네 질문에 굳이 대답하자면 ’아니오‘가 맞겠지. 하지만 내가 듣기로는 그 2명이 회의에 직접 참석한 일은 한 번도 없어. 그래서 회의장에서도 의장석과 부의장석은 관례적으로 항상 비워둔다지.”

“뭐야? 그럼 명부에만 올라 있는 유령 멤버인 거야? 명색이 의장이?”

“뭐, 비슷하긴 하지만 먼 옛날에 몇 번인가는 대리로 의견발표도 한 일 있다고 들었어. 언뜻 듣기로는 직접 만났다는 신관님도 몇 계신 것 같고.......실체가 아주 없는 유령은 아닌 모양이야. 왜 참석 안하는지는 나도 몰라.”

구르베스의 시선은 평소 수나 마구스가 기대어 서 있곤 하던 기둥 한쪽을 향했다. 언뜻 생각해 보아도, 트라카 교단의 ‘제5멤버’는 수나 마구스 자신임에 틀림이 없었다. 물론, 크바르나 회의에서도 당연히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을 그 ‘유일한 생존 마구스’가 왜 직접 참석하지 않고 있는지 의문이기는 했지만.

물론, 다하카르 교단의 ‘크바르나 멤버’까지는 그로서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마구스 그 양반이 어디 갔을까.’

구르베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틀 전인가부터, 수나 마구스가 자리에서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호기심이 동한 구르베스는 그 기둥을 가리키며 살람에게 물었다.

“예배 때 항상 저기 서 있는 사람 누군지 혹시 알아?”

“그 키 큰 여자분? 우리 병원 병리학 실장님이셔. 워낙 말도 없고 무뚝뚝해서 수련의들도 웬만하면 피하는 양반이야.”

“그분도 성직자 아니었어?”

구르베스의 질문에 살람이 정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천만에, 유능한 분이신 거는 같은데 성직자는 아니야. 여기 의사들이라고 다 성직자는 아니거든. 근데 왜?”

“지금 휴가 중이셔? 맨날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안 보여서.”

“그럴걸. 이맘때쯤 꼭 한 번씩 휴가를 내서 어디 다녀오시는 것 같아. 아참, 오늘 저녁부터 다시 나오신다던데?”

예배당 정리를 끝낸 구르베스는 간단한 다과를 급히 준비해 들고 종종걸음으로 예배당을 나섰다. 생각해보니 자신의 목숨까지도 구해 주었던 수나 마구스에게 지금껏 따로 감사를 표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휴우.”

어두운 밤길을 가로질러 걸어 온 그는 병원의 독신 의사들, 성직자들의 관사로 쓰이는 공동주택을 올려보며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4층짜리 이 조립식 건물은 특별히 허름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때 제국을, 아니 콜로니를 지배했던 2인자 마구스가 머무르고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말 그대로 ‘평범한’ 공동주택이었다. 게다가 명색이 이 큰 병원의 병리학 실장이라는, 최소한 학자로서는 나름대로 성공했다 싶은 사람이 머물기에조차 많이 부족해 보이는 공간이었다.

그는 손에 든 다과를 재차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계단을 올랐다.

“차라리 결혼이라도 하지. 도대체 얼마를 외롭게 혼자 살았을까.”

침침한 계단을 걸으며 구르베스가 뜬금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독신자용의 이 관사는 주로 젊은 수련의나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견습 성직자들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 실장급이나 되는 사람이 산다는 것부터가 좀 어색했다. 구르베스는 벨을 누르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들어오시오.”

문 안에서 들려오는 이전같은 밋밋한 목소리가 구르베스에게는 차라리 편하게 느껴졌다. 천천히 열린 문 안에서는 6척이 넘는 큰 키와 단단하게 다듬어진 날씬한 몸, 그리고 여전히 무표정한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자가 서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는 듯, 크지 않은 집안에는 가방과 몇 가지 개인용품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지난번 구르베스를 암살하려던 자들을 죽였던 그 남자신도 중 한 명이 한쪽에서 집안을 치우다 말고 구르베스에게 경계어린 시선을 주었다. 수나 마구스는 그에게 나가 있으라며 눈짓을 보냈다.

“경호원 겸.......하인이군요?”

잠시 얼토당토않은 상상을 했던 구르베스는 자신의 한심한 생각을 탓하며 먼저 말을 건넸다.

“내 앞에서는 그대나 저 남자나 모두 똑같은 한 명의 보통 사람일 뿐이요.”

그의 말에서 배어나는 지독한 특권의식에 구르베스는 잠시 불쾌감마저도 느꼈지만 이번에도 일단 입을 다물기로 했다. 어쨌든 상대는 한때나마 제국, 아니 당시 콜로니를 지배했던 사람이었다.

‘아직도 옛날 생각에 빠져 사나보군.’

응접실에 들어선 구르베스는 수나 마구스가 가리킨 자리에 조심스레 자리를 잡았다.

‘하긴,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이지.’

구르베스는 잠시나마 느꼈던 불쾌감을 이런 생각으로 애써 자위했다.

‘맘만 좀 고쳐먹으면 괜찮은 귀족 남자를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수나 마구스의 수려한 외모를 재차 확인한 구르베스는 다시 엉뚱한 생각에 잠겼다. 물론, 아직까지 자신이 ‘인간과는 다른 종의 생명체’라고 믿고 있을 그에게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테지만.

수나 마구스 역시 어린 시절에는 다른 마구스의 자녀들처럼 차기 마구스가 되기 위해, 아니 살아남기 위해 형제자매들, 때로는 부모와도 치열한 피의 경쟁, 혹은 전략적인 협력을 했을 터였다. 그리고 마구스가 된 후에도 다른 마구스들처럼 근친들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하렘을 두고 그 사이에서 호사를 하며 살았을 것이 뻔했다.

어쨌든, 최소한 몰락 전까지는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고 치열하게 살아왔을 그가 이런 조그만 관사 따위에서 신분도 숨긴 채 수백 년을 홀로 외로이 지내고 있다는 것이 언뜻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구르베스가 더듬더듬 먼저 입을 열었다.

“며칠 안보이시던데.......”

“루게에 잠시 다녀왔소.”

“남부 루게요? 왜요? 연합군에 가담한 세닉 가 영지라 자칫......”

구르베스의 물음에 수나 마구스는 눈썹만 살짝 치켜떴을 뿐,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에 당황한 구르베스는 괜히 머리를 긁적거리며 재빨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그는 반쯤 열린 수나의 가방에 들어있는 금빛 촛대, 그리고 검은빛 로브를 발견했다. 정확치는 않지만, 비슷한 물건, 그리고 옷을 성소에서 있었던 장례나 제례에서 본 기억이 언뜻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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