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42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
.
.
구르베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루게에서 가까운 분 제사가 있었나 보죠? 매년 이맘때 가신다더니.......”
수나 마구스는 여전히 대답을 생략한 채 구르베스가 가져온 과자만 씹었다. 하지만 구르베스는 항상 차갑고 당당하기만 하던 그의 표정에 잠시나마 슬픔, 혹은 외로움이 스치는 것을 알아챘다. 어쩌면 상대의 약점을 찔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르베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이오타.”
뜻밖에도, 먼저 입을 연 건 수나 마구스였다.
“예?”
구르베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이오타’요? 사람 이름인가요?”
말을 뱉어놓은 구르베스는 자신의 물음이 퍽이나 바보같다고 여겼다. 하지만 누군가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실험실이나 수학책에서 기호로 오가는 편이 더 어울릴 해괴한 이름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수나 마구스는 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엉뚱한 말로 뒤를 이었다.
“나를 잘 따르던 특별한 존재였지.......”
“특별한.......”
구르베스는 다음 질문을 입에 머금은 채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수나 마구스가 ‘사람’이라는 극히 일상적인 어휘 대신, ‘특별한 존재’라는, 어색한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무언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물어도 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곳 생활은 이제 적응한 겁니까?”
다시금 사무적인 표정으로 돌아간 수나 마구스가 억양 없는 밋밋한 발음으로 물었다.
“그럭저럭.......이젠 마음도 편해졌고......”
“소중한 사람의 일부가 곁에 있으니 그것도 힘이 되겠지요.”
수나 마구스가 구르베스의 배를 쳐다보며 그 보기 힘든 미소를 살짝 내보였다. 구르베스는 무안한 듯 얼굴을 붉히며 한 손으로 배를 살짝 감쌌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수나 마구스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 그의 마음도 그다지 편치는 않았다. 역사를 공부했던 그인 만큼, 수나 마구스의 2세들 역시 다른 마구스의 자식들처럼 제국 건국 과정에서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조만간 황궁에 가 볼 예정입니다.”
“예? 아케메니아요?”
별 생각 없이 되물었던 구르베스는 자신이 어느새 이곳 사람들의 어휘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거기는 다 전쟁터들인데 왜........”
“황제를 만나러 가지 뭣 하러 가겠습니까.”
수나 마구스가 태연하게 대답한 순간, 구르베스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카렐 황제.......말씀이신가요?”
“제국에 황제가 그 분밖에 더 있습니까.”
묘한 괴리감에 구르베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그의 남편 수우는 누군가에게 지금까지 황제라 불리고 있고, 구르베스 자신 역시 한때 황비였고, 명목상 아직 그 지위에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수나 마구스는 그런 그에게 모질만큼 단호하게 대답한 것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엔지, 그런 그가 밉거나 야속하지는 않았다. 아니, 도리어 속이 후련해지기까지 했다.
“당신의 남편은 주어진 운명을 거역할 정도의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당신이라면 모르지만.”
수나 마구스의 검고 큰 눈동자가 어느새 구르베스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시선에 겁먹은 구르베스의 속내를 알아챈 듯, 다시 웃음을 지으며 과자 한 개를 집어 입에 넣었다. 구르베스가 더듬더듬 물었다.
“카렐 황제는 왜 만나시려고요?”
“그것이 제 운명이니.”
짧게 대답한 수나 마구스는 차를 삼키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거긴 전쟁터라 들어갈 수도 없고.......황제가.......만나 줄까요?.......그러니까, 제 말은......”
이젠 몰락해버린 그의 처지를 너무 노골적으로 지적했다는 뒤늦은 생각에 구르베스가 민망한 웃음과 함께 무어라 둘러대려 했지만 수나 마구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나 줄 겁니다. 틀림없이 제게 호감을 보이겠지요. 그분의 운명이고 이번 전쟁에서 제가 수행해야 할 역할이니.”
“호, 호감이요? 역할이라뇨?”
구르베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수나 마구스는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목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곳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작은 자수정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자수정?’
구르베스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나뭇가지, 그리고 자수정은 트라카 교단을 상징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건장한 X들의 손에 붙들린 채 옥상에서 질질 끌려와 엘리베이터 안에 동댕이쳐진 오르마즈는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라 여겼다. 그들은 오르마즈의 허리에 채워져 있던 카타나와 단검부터 빼앗았다. 비록 시민이었지만, 오르마즈는 X에게도 충분히 위협적인 상대임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젠장.”
오르마즈는 얼굴에 떡이 진 핏덩이를 털어내며 그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오르마즈의 칼을 빼앗아 든 2명의 8그룹 X들은 조금 놀란 듯 칼을 위아래로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호오, 이거 멋진데?”
소재를 알 수 없는 검은빛 칼집에는 섬세하게 조각된 구름과 용 문양이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져 있었고, 용의 어깨부터 꼬리까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바람(Bahram) 문자, 그리고 10개가 넘는 또 다른 작고 섬세한 조각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져 있었다. 무기에 관해 어느 정도 아는 X들이라면 눈이 뒤집어지고도 남을 물건이었다.
“전리품은 전리품이지?”
그들이 키득거리며 칼날을 뽑아보았다. 보통의 카타나보다 훨씬 긴 옅은 파란빛 날은 쇠라기보다는 마치 반투명한 유리처럼 보였다. 소재가 희한한지 그 X도 날에서 잠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거 도대체 뭘로 만든 칼이야? 혹시 그냥 장식품인 거 아냐?......어? 이것 봐, 이놈들만 빼서 팔아도 돈 제법 되겠는데?”
X 한 명이 칼의 혈조를 따라 죽 박혀있는 13개의 보석들을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오팔, 사파이어, 토파즈 등등의 순서대로 박혀 있는 보석들은 단 한 개도 같은 것이 없었지만 언뜻 보기에도 잘 세공된 최고 품질의 보석들이었다.
“이건 내꺼야.”
“집어 쳐, 베흔 녀석이 가만히 있겠어?”
“그 새끼는 이미 헤크마 놈이 쓰던 거 뺐었는데 이것까지 탐내면 개새끼지.”
“근데 솔직히 이게 더 값나가 보이는데? 그런데 정말 이게 쓸 수 있는 칼 맞아?”
다른 X가 오르마즈의 크리스 단검을 뽑아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구불구불하고 날렵한 칼날의 그 단검 역시 카타나처럼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반투명의 묘한 소재로 만들어져 있었고, 혈조를 따라 13개의 보석이 차례로 박힌 것도 똑같았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자리에 멈추자 그 X들이 움찔했다.
“뭐야? 여기서 왜 서?”
그들이 고개를 들어 판넬을 올려보았다. 샤미르의 처소와 직결된 이 보안엘리베이터가 서는 곳은 어차피 몇 군데 되지 않았다. 그리고 판넬에는 베흔의 집무실이 있기도 한 민병대 정보사령부를 가리키고 있었다.
“혹시 이놈 심복은 아니겠지?”
X들이 반사적으로 자신들의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이 엘리베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금 오르마즈가 호송중이라는 것을 안다면 돌발행동을 할 만한 그의 옛 심복들은 사방에 널려있었다.
“어쨌든 조심해."
그들의 서슬퍼런 경계 속에서, 막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너머 웬 사람의 형상이 불쑥 나타났다.
“이놈이!”
칼을 막 뽑아들려던 X들은 어딘지 낯익은 얼굴에 순간 움찔했다.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 있던 사복 차림의 키 큰 미남자 역시 그들의 적대적인 태도에 어깨까지 들썩하며 한 발 물러났다. 잠시 후, 그 남자가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타, 타.......도 되는 겁니까? 베흔 소장이 눈에 안 띄려면 이걸 이용하라던데......”
남자의 물음에 X들이 잠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동료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입소리를 주고받았다.
“누구였더라? 전에 본 것 같은데.......”
“지난번 테번 놈하고 만났을 때 그놈 바로 뒤에 있던 코메트 장성이야.”
“아, 그렇지.”
일단은 안도한 X들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오르마즈를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거칠게 차내며 한 발 물러섰다.
“코메트 놈이 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베흔 놈이 불렀다잖아. 이젠 적도 아닌데 뭐.”
X들이 계속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았다. 같은 시각, 아케메니아 한편에서는 베흔과 손잡고 동시 쿠데타를 일으킨 테번 역시 주변을 정리하느라 바쁠 터였다. 그런 테번이 이번 일의 마무리를 위해 베흔에게 파견한 측근 무장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외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남자는 X들에게 다시금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엘리베이터에 발을 들여놓았다. 구석으로 밀려난 오르마즈는 그 남자를 올려보며 긴장한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데.......저런 놈이 장군이라니. 풉.”
X들이 기가 막힌다는 듯, 남자의 등까지 내려온 길고 반짝이는 생머리를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작은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그 남자는 이들의 비웃음을 못 들었는지, 아니면 기가 눌려 입을 차마 못 여는 것인지, 엘리베이터 한구석에 선 채 그들 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근데, 진짜 죽이지 않냐? 생긴 거 보니 여자 꽤나 울렸겠다.”
X들의 비웃음, 혹은 괜한 질투, 묘하게 끈적한 호기심대로, 이 남자의 미모는 같은 남자의 눈길을 빼앗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적어도 8척3촌(189cm)은 될 크고 날씬한 몸매만으로도 워낙에 눈길을 끌기는 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희고 고운 얼굴에 여자처럼 갸름한 턱, 황금비(比)대로 조각한 듯 완벽한 이목구비는 그저 스치던 사람도 한 번쯤 놀라움에 고개를 돌리기에 충분했다.
“아나히타 교단 맞지?”
X한 명이 남자의 귀 밑에 있는 나뭇가지 문양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뭇가지는 승리를 뜻하는 교단 제7신 ‘아나히타’의 상징이었다. 상대가 겁먹은 것이라 넘겨짚은 X들은 이 좁은 공간에서 마치 들으라는 듯 자기들끼리 떠들어댔다.
“그런데 성직자야?”
“성직자가 머리를 길렀을 리가 없지.”
“이마야 간택자 표시지만 귀 밑에 문장은 성직자만 하는 거잖아?”
“가발 아냐? 속에는 대머리 아닐까?”
X들의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호기심 속에서, 가벼운 진동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웬 빨간빛 사탕을 꺼내 입술 사이에 살며시 넣고는 오물거리며 빨기 시작했다. 뒤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오르마즈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입을 꾹 다물었지만 X들은 아직 알지 못했다.
“어린애냐? 하긴, 앳되게 생겼다 했어.”
기가 막혀진 X들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던 그때, 언뜻 겁먹은 듯 보였던 남자가 뒤에 선 이 건장한 X들을 돌아보며 그 짙은 분홍빛 입술에 대뜸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8그룹 X들은 거세를 안 했다지요?”
그에게만 온통 정신을 팔고 있던 X들의 당황한 얼굴이 순간 빨갛게 상기되었다. 겁먹고 침묵하는 듯 보였던 이 남자와, X들의 위치가 순식간에 뒤바뀐 순간이었다.
“예?”
놀란, 아니 얼떨떨해진 X들이 대답도 못 하고 머뭇거리고 있던 그 순간, 남자가 입가 가득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의 비상정지 버튼을 꽉 눌렀다. 덜컹 하는 충격이 엘리베이터 안의 작은 공간을 흔들었지만 여전히 웃음 띤 표정의 그 남자는 입고 있는 외투의 어깨에 스스럼없이 손을 가져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