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43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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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 뭘.......”
당황해 뒷걸음치던 X들은 자신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는 데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우읍.......”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은 그들이 다시 무기에 손을 가져가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자의 어깨, 계급장 밑에서 새어나온 짙은 유독가스가 좁은 엘리베이터 안을 순식간에 채우면서 전장을 호령하던 이 무시무시한 전사들도 그대로 의식을 잃고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미리 숨을 참고 있던 오르마즈 역시 잠시 의식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들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괜찮으십니까?”
급히 뒤로 돌아선 남자는 바닥에 쓰러져 있던 오르마즈를 껴안아 무릎 위에 눕혔다. 질식한 오르마즈는 눈이 뒤집힌 채 몸을 떨고 있었지만 다행히 의식은 반쯤 남아있었다.
“휘산 성분이니 깊이 들이키셔야 됩니다.”
남자는 오르마즈의 반쯤 열린 입을 급히 벌리고 그에게 입술을 맞대고는 사탕의 톡 쏘는 느낌이 그대로 어려 있는 자신의 숨결을 힘껏 불어넣었다. 자극적인 약물이 비강과 폐에 확 스며들면서 놀란 오르마즈가 몸을 조금 비틀었다.
“학, 학.......”
남자는 가늘게 눈을 뜬 오르마즈의 입에 새 사탕을 넣어주며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조금씩 정신을 되찾은 오르마즈는 손을 뻗어 이 남자의 이마 중간에 박혀있는 나뭇가지의 형상의 자수정 조각을 더듬었다. 남자는 아직까지도 붉은 피가 흐르는 오르마즈의 관자놀이를 손수건으로 감싸 주며 그의 찬 손을 꼭 쥐었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콜로니 제일의 미남을 내 잊을 리 있나, 이오타.”
오르마즈가 쓴웃음을 지으며 이 남자의 매혹적인 입술이 잠시나마 닿았던 자신의 입술을 더듬거렸다.
“그분께서 보내셨습니다.”
남자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오르마즈의 칼들을 다시 챙겨 그 주인의 허리에 채워 주었다.
“제게 업히십시오. 빨리 이곳을 떠나셔야 됩니다.”
그는 아직 설 기운이 없는 오르마즈를 등에 업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길고 고운 머리칼에서 무언가 향기를 맡은 오르마즈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분과 같은 향수가 느껴지는군........훗, 복도 많은 양반이지.”
어깨까지 들썩이며 움찔했던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나? 자네 같은 남자가 평생 숫총각으로 사는 건 세상 여자들에 대한 모욕이야.”
오르마즈의 짓궂은 농담에 여전히 얼굴만 붉히고 있었던 남자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꼭 이런 때 민망한 농담을 하시는 건 여전하시군요.”
천천히 하강한 엘리베이터는 ‘지하 1층’ 표시를 깜박이며 자리에 멈췄다.
“여긴 전사들이 드글거릴 텐데......”
오르마즈가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지만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문이 확 열렸다.
“자, 장군님?”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오르마즈를 뒤따라 급히 내려온 헌병감 바스토프 베멜러 준장이었다. 그는 오르마즈를 업고 서 있는 이 미모의 남자를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엘리베이터 안에 쓰러져 있는 2명의 X들, 그리고 오르마즈를 업고 서 있는 이 남자 앞에서 베멜러 준장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잠시 망설여야 했다. ‘오르마즈를 살리고 싶으면 지하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려라’는, 출처불명의 연락을 받고 무작정 달려왔던 그였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그가 오래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오르마즈부터 내밀었다.
“베흔 소장이 눈치 채기 전에 빨리 모시고 나가시오. 내가 모시고 나가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을 것 같으니.”
오르마즈를 베멜러 준장에게 넘겨준 그 남자는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에서 재빨리 빠져나가 어디론가 홀홀히 사라졌다.
“유평 아씨는?”
베멜러 준장의 등에 업힌 오르마즈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솔로스 장군께서 보호하고 계시니 걱정 마십시오. 장군님께선 일단 이곳을 나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떠나면 자네는.......”
“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장군님과 운명을 함께할 생각이었으니.”
제일 믿을만한 2명의 전사만을 동반한 베멜러 준장은 한쪽에 세워두었던 차에 얼른 올라탔다. 아직 옥상에 있을 베흔이 눈치를 채고 수배령을 내리기 전에, 피의 광기에 휘감긴 이 위험천만한 아케메니안 궁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베멜러 준장은 차에 최대한 속도를 붙여 지하 1층 주차장 입구로 쇄도했다.
“카파키 장군님께서 다치셨다! 빨리 문 열어!”
“예?.......아, 알겠습니다.”
지하 1층을 주차장의 출구를 지키던 경비병들은 얼굴에 피를 뒤집어쓴 채 신음하고 있는 오르마즈의 모습, 그리고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는 헌병감의 호통에 기겁을 하며 얼른 셔터를 열어 주었다. 그 남자의 말대로, ‘오르마즈를 처형해라’라는 베흔의 명령이 아직 이곳까지는 내려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마시야스, 리쿠 가 사람들과 이후 일을 논의하느라 이쪽에는 아직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오르마즈와 헌병감 베멜러 준장을 태운 차는 도로 위를 무섭게 달려 아케메니안 궁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오르마즈를 죽이고 마시야스를 앞세워 새 국가의 주도권을 쥐리라는 부푼 꿈에 빠져 있던 베흔을 놀리듯 이곳에서 빠른 속도로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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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에 달아난 타르서스 직할군 도주병들을 찾았습니다.”
잔혹한 ‘평가’가 있은 날 늦은 밤, 회의시간을 앞둔 루토는 동맹군 총사령관 페로에게 조금은 무안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잡았다’는 게 아니고 ‘찾았다’는 것을 보니 제대로 잡아온 건 아닌가보군?”
루토의 표정을 읽어낸 페로가 대번 곱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루토가 변명하듯 더듬더듬 대답했다.
“전투 직후에 포구를 드나든 배들이 워낙 많았습니다. 대부분이 중상자들을 실은 것들이거나 성벽 보수를 위한 긴급한 수송선이라 현실적으로 세세하게 검문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 말은 놈들이 황도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말인가?”
“중상자들을 타르서스로 이송하던 배였습니다. 자해를 하고 배에 탔던 것 같습니다. 해안에서 이송셔틀로 갈아타고 타르서스까지 도망쳤지만 다행히 그곳 터미널에서 잡아냈습니다.”
“그래서?”
페로가 도끼눈을 뜨며 취조하듯 물었다. 루토가 시체들이 담긴 사진을 내밀며 힘없이 대답했다.
“4명 중 사병 2명은 그 자리에서 사살했고 소대장급 장교 1명과 나머지 사병1명은 부상을 입은 채로 도주했습니다. 조사한 바로는 도망친 소대장은 타르서스 북부 토호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가족들이 도주에 협조했을 가능성을 대비해 조사 중입니다.”
“훗, 쥐새끼 같은 놈들.”
페로가 잔뜩 불만스런 얼굴로 사살된 시체의 사진을 옆에 던지고는 북부 무장들에게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일벌백계란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거다. 남은 두 놈도 땅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잡아내라. 산 채로 잡아다가 황궁 앞에서 갈가리 찢어 죽여야 딱 어울리지.”
“폐하께서 납십니다.”
회의 직전, 대전의 시끌시끌한 분위기는 황제가 든다는 우베의 외침과 함께 비로소 조용해졌다. 대신과 무장들이 각자의 위치로 재빨리 흩어지며 자리에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섰다.
“역시 몸이 덜 나은 건가.”
피로가 덜 풀린 데데한 얼굴의 카렐이 옥좌에 힘없이 앉았다. 지난밤 거의 자지도 못한데다가 아직 병에서도 덜 회복된 몸으로 낮 내내 이런저런 격무에 시달렸다보니 그의 얼굴이 눈에 보일 만큼 해쓱해져 있었다. 단상 한쪽에 앉아있는 세네피스 카파키 황태후의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도 그것 때문일 것이 뻔했다.
“병이 나으면 나은 대로 고생, 병 걸리면 병 때문에 고생.......휴우, 요즘 꼴이 말이 아니군.”
불만스레 중얼거린 카렐은 주치의 니사가 옆에 올린 영양 보충제 컵을 집어 들고 훌쩍 들이켰다.
“다량의 지방과 단백질, 약간의 탄수화물과 미네랄이 이상적으로 배합된 최상의 황제용 꿀꿀이죽이야. 느글느글한 맛도 환상적이군.”
빈정거리는 카렐에게서 빈 컵을 받아든 니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즉각 대꾸했다.
“이전 같은 면역력을 되찾으시려면 체중을 지금의 1할 이상은 늘리셔야 합니다. 하지만 보통의 식사만으로는 폐하의 대사 체계상 지금에서 근육만 더 늘어나게 되니 가뜩이나 과다한 대사량이 너무 높아져 위험합니다. 그러니 이걸로 체지방도 늘리셔야.......”
“지금도 충분히 무거워서 비빈들 갈비뼈가 걱정스러울 지경이야.”
황제의 농담에 몇몇 대신들이 참지 못하고 터뜨린 웃음으로 대전의 분위기가 잠시 흐트러졌다. 베아트릭스가 무안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지만 입가에는 웃음이 어려 있었다.
“흐음.”
순간 얼굴이 상기된 세네피스 황태후가 신경질어린 헛기침으로 소란스러워진 대전 실내를 바로 가라앉혔다.
“이런 자리에서 상께서 하실 말씀이 아닌 줄로 압니다.”
카렐은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은 척 만 척 사과 한 개를 덥석 집어 입에 베어 물었다. 황태후가 이번에도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카렐은 그런 그에게 도리어 짧은 미소로 변명을 대신할 뿐이었다.
“새벽에 명하신 오르마즈 경의 칼 세트가 방금 도착했습니다. 칼을 가져온 시트르 카파키 경이 지금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연락을 받은 우베가 사과로 입가심을 하고 있는 황제에게 먼저 말했다. 남은 사과를 통째로 입에 넣은 카렐이 문 쪽에 대고 들여보내라 손짓을 보냈다.
“카파키 가의 운영을 맡고 있는 시트르 카파키이옵니다.”
벨벳 위에 두 자루의 검을 얹은 시트르 카파키가 대전을 가로질러 천천히 들어와서는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호위대장 카토가 나아가 그에게서 칼을 받아 황제에게 바쳤다.
“이게.......오르마즈 경의 칼이었던가?”
난생 처음 눈앞에 마주한 오르마즈의 칼을 조심스레 집어든 카렐은 지난 새벽, 원리주의자 두겐이 이 칼을 왜 걸고 넘어졌는지를 바로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그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칼집에 새겨진 것을 보십시오. 다른 것도 아니고 사교도들이 쓰던 천한 문자입니다. 명색이 제국 제1개국공신께서 그런 칼을 쓰셨던 것도 수치스런 일이온데, 이젠 어검으로까지 삼으시겠다나, 이건 말도 되지 않습니다!”
“뭐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오르마즈를 겨냥한 두겐의 지적에 가만히 있을 세네피스 황태후가 아니었다.
“당시에 공용어였던 문자가 남아있는 것이 무엇이 문제라는 것인가? 초기 유학서적 역시 당시 공용문자였던 바람 문자로 쓰인 것이 있거늘, 그렇다면 당시 만들어진 것에 바람 문자가 남아있다 하여 무조건 배척하겠다는 말인가?”
“무조건 배척하겠다는 것이 아니옵니다. 황태후 폐하. 하오나 제국 황상께서 사용하실 어검이라면 그 상징적인 의미가 있사오니.......”
“제국 개국공신이 쓰던 검만큼 상징적인 의미가 확실한 것이 또 어디 있는가!”
둘의 말다툼이 듣기 싫은 듯 짜증스레 귀를 후벼낸 카렐이 칼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는 칼집 앞뒤에 새겨진 바람 문자를 뚫어지게 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드함 크사야시야 바즈라카.......파타 노, 트비쉬얀타트 파이리.......”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카렐이 옆에 있는 주치의 니사를 휙 돌아보았다. 니사는 그의 놀란 시선에도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 해 보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놀라시는 걸 보니 바람어(語)를 아시는군요.”
“지난 몇 달간 공부 좀 했지.”
입술을 살짝 깨문 카렐은 조심스런 손길로 칼을 천천히 뽑아들었다. 파란빛 반투명한 칼날이 오랫동안 묻혀 있던 집 안에서 조금씩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순간, 카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이게 무기라고? 장식품이 아니고?”
웬만해서는 대놓고 놀라지 않던 카렐이었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가까이서 자세히 본 칼날의 파란빛은 보통의 금속 위에 그저 덧씌운 코팅이 아니었다. 칼 전체가 한 덩어리의 보석인 듯, 맑은 청색의 광택을 뿜고 있었다. 카렐은 혈조를 따라 박혀 있는 13개의 보석들,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글씨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하가 마나 파투브.”
카렐이 침을 꿀꺽 삼켰다. 니사가 기다렸다는 듯 번역을 대신해 주었다.
“신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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