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44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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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토, 자네 칼을 뽑아보게나.”
“예?”
황제의 느닷없는 명령에 카토가 등에 지고 있던 양손검을 머뭇거리며 집어들었다. 순간, 휙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에 뒤이어 그의 양손검에서 노란 불꽃이 번쩍 일었다.
“앗!”
느닷없이 날아든 카렐의 일격을 이겨내지 못한 카토가 그대로 나동그라지며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그는 잠시 놓쳤던 양손검을 다시 고쳐쥐고 얼른 일어났지만 정신이 얼떨떨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날이 전혀 안 상했어. 대단한데.”
카타나 날을 다시금 살펴본 카렐이 카토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반사적으로 자신의 양손검 날도 확인했던 카토가 고개를 저었다.
“제 칼날은 조금 주저앉았습니다. 다시 세워야겠습니다.”
“도대체 뭘로 만든 거지? 금속도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언제 만든 칼이야?”
카렐 역시 지금껏 이 칼을 처음 보았던 사람들이 가졌던 의문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심지어 오르마즈와 함께 이 칼을 ‘찾아냈던’ 세네피스조차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지 못했다. 기억을 어렵게 되짚어낸 세네피스가 짧게 말했다.
“남극성당 부설병원 내과 의사였던 나즈라 라카드 박사가 소장하고 있던 검이라고만 들었습니다, 당시에 그 사람 집에 이것 말고도 많은 무기가 소장되어 있었습니다만 집을 급하게 떠났던지 모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지금 모두 카파키 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오르마즈 경에게 들은 바로는 귀한 무기 수집이 취미였던 사람이라 합니다. 황상.”
“나즈라 라카드? 자네들은 누군지 혹시 아나?”
카렐은 이번엔 ‘교단 의학교 출신 의사’인 니사와 밀리타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밀리타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부설 의학교에서 유전학을 가르치셨던 남자 교수님으로 기억합니다.”
“유전학? 내과 의사라며?”
“당시 교단 부설 유전학 연구소 소속 의사들은 본래 전공을 하나씩 가지고 계셨습니다. 당시만 해도 유전학은 ‘신성함 중 신성함’으로 여겨져서 아무나 공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당 분야에서 그 재능을 인정받은 각 교단 최고의 젊은 의사들을 선발해서 따로 가르쳤습니다. 그분도 그 중 하나였던 것으로 압니다.”
“자하크 대신관도 어지간히 오래 살고 싶었었나 보군.”
카렐의 농담에 우베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하크 대신관의 명을 받아 ‘수명개조’ 기술을 발명해 콜로니의 사회체계 자체를 뒤바꿔놓은 것이 바로 이 교단 유전학 연구소의 학자들이었다.
“아직 살아있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곳 소속 의사분들은 박해를 피해 대부분 잠적하셨습니다. 정체가 드러난 몇몇 분들께서 재판도 없이 처형당하신 선례가 있다 보니.......그 중 일부가 신분을 바꿔 살고 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확인된 정보는 아닙니다.”
“바보들이 세상을 어떻게 퇴보시키는지 보여주는 아주 좋은 사례야.”
카렐이 두겐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라카드 박사는 어떤 사람이었지?”
카렐이 칼날을 더듬으며 계속 호기심을 이었다.
“말씀드린 대로 다하카르 교단 부설 의학교 출신 유능한 내과의였습니다. 수명개조 당대이기는 했지만 서글서글하고 사교적인 성격에 키도 크고 잘생긴 미혼남이라 인기가 아주 좋으셨죠.”
밀리타가 학창시절 생각이 나는지 흐릿해진 눈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수명개조 당대면 자네들이 의학교에 다닐 무렵엔 나이도 꽤 많았을 텐데, 결혼을 안 했다고? 내 알기로 교단에서는 우수한 혈통을 최대한 늘린다고 간택자나 성직자간에 순혈 혼인을 장려하지 않았던가?”
카렐의 물음에 밀리타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라카드 교수님께선 간택자가 아니셨습니다. 당연히 성직자도 아니셨고요. 워낙 실력이 뛰어나서 그곳에 계셨을 뿐이지 교단과는 아무 관계없는 인물이셨습니다.”
밀리타가 마지막 말에 각별히 힘을 주어 말하며 세네피스 황태후를 잠시 돌아보았다. 세네피스는 분위기에 맞춰 말을 해 주는 그가 기특하다는 듯 두겐 몰래 엄지손가락을 살짝 들어보였다.
“그래, 관계없는 인물이라. 그냥 평범한 의사이고.”
내심 이 칼이 맘에 쏙 들었던 카렐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칼을 탐탁지 않아하는 원리주의자들의 공격거리 하나가 사라진 셈이었다.
“혹시 당시 사진자료 같은 거 구할 수 있겠나?”
카렐의 계속된 관심에 밀리타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지금은 남아있는 것이 없을 겁니다. 본인들이 사적인 자료는 모두 없앴을 것이고, 공식적으로 남은 자료 역시 교단 유전학 연구소 자료는 민병대에서 모두 소각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혹시 보안국에서 따로 보관하고 있을지도......”
“글쎄, 내 보안국장 시절에도 그런 걸 본 기억은 없네만.”
카렐은 한쪽에 서 있는 보안국장 루토를 다시 손짓해 불렀다.
“혹시 모르니 나즈라 라카드 박사에 관한 자료를 모조리 찾아내서 내게 가져와 봐. 개인 신상 자료든, 저술이든, 아니면 그냥 소문 따위도 상관없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어검 문제는.......”
두겐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자 카렐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봐, 법무대신. 이 칼의 첫 주인은 성직자도 아니었고 그냥 평범한 학자였어. 여기 새겨진 내용들도 ‘교단 만세’ 따위의 건 없고 말이야. 건국 이전에 만들어진 칼이라면 바람 문자가 새겨진 게 도리어 정상 아닌가. 이 칼이 제국 제1개국공신 손에 수백 년간 있었던 게 중요하지 왜 그리 쓸데없는 것에 의미를 두려고 하나?”
“하오나 그 첫 주인이 교단 소속이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
“이유는 그것 하나인가? 오르마즈 경이 싫어서가 아니고?”
카렐이 갑자기 허리를 바싹 굽히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느닷없이 꽂히는 황제의 매서운 눈짓에 순간 당황한 두겐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서, 설마 그러하겠습니까, 그저.......”
생각 없이 대답하던 두겐은 황제의 입가에 바로 번지는 미소에서 자신이 ‘또 당했음’을 깨달아야 했다. 카렐이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됐네, 내 나즈라 라카드 박사 뒷조사를 이미 명했으니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게 나오면 어검 지정을 당장 취소하지, 됐나?”
사람들의 관심을 온통 그 전 소유주에게로 몰고 간 황제의 ‘시나리오’에 얼떨결에 말려든 두겐은 당초 생각했던 반론을 머릿속에 다시 정리하느라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카렐은 그런 그가 채 말을 꺼낼 여유도 주지 않은 채 바로 주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 무너진 동북벽의 복구 작업은?”
“무너진 자리는 일단 가설벽과 목책을 설치했습니다. 하지만 적들이 공격을 재개할 때까지 구조체의 복구를 마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금의 가설벽도 적의 포격에서 안쪽의 보병들을 일시적으로 지켜주는 역할 이상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서부 사역병단장의 솔직한 대답에 카렐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너진 성벽의 복구가 불가능하다면 이제와 어설프게 복구한다고 자재와 인력을 허비할 건 없다. 초반 포격을 막는 정도는 가설벽으로도 충분하니 이젠 무너진 양쪽을 지키는 옹성 부분의 무장을 최대한 강화하도록 해. 옹성에 소형 발리스타를 대폭 보강하고 동부 투창병들을 집중 배치해라. 방어력이 떨어진다면 공격으로 만회해야지.”
“알겠습니다.”
페로가 머리를 조아리며 즉시 대답했다.
“그리고 아직 성한 성벽도 빠짐없이 강도를 조사해서 위험한 지점은 보강공사를 실시하도록. 지난번처럼 성벽 한 지점이 뚫렸을 때 성벽 내부복도를 타고 적들이 잠입하는 것을 미연에 예방해야 할 테니 예비병력 중 3분의 1 정도는 성벽 안쪽, 이동로가 집중되는 지점을 골라 대기시켜라.”
이런저런 자잘한 지시를 내린 카렐은 멀리 창 너머로 보이는 연합군의 진영을 문득 돌아보았다. 지난 전투에서 연합군과 등을 돌려버린 플라칼 가는 여전히 연합군 본대와는 동떨어진 곳에 따로 주둔 중이었지만 연합군에서 파견한 듯 보이는 사자(使者)들이 지난밤부터 쉴 새 없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카나르 플라칼 경과는 아직 연락이 안 되는 거야?”
카렐이 눈을 가늘게 뜨며 페로를 가까이 불러들여 물었다.
“동부기병들이 중간을 가로막고 있어서 사자를 보낼 수 없어.”
카렐이 다시금 성벽 밖을 돌아보았다. 페로의 말대로, 플라칼 가의 숙영지 주변은 주변을 새카맣게 에워싼 동부기병들 때문에 마치 섬과 같은 꼴이 되어 있었다.
“플라칼 가 병영에 있는 우리 세작이나 비엔에 있는 플라칼 본가 쪽은?”
“지금 그게 문제야.”
페로가 카렐에게 더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
“카나르 경한테 할룩스를 전하려던 우리 세작이 조금 전에 생명반응이 끊겼어.”
“피살?”
“플라칼 가 근위병 10명 중에 하나는 델루지 가 세작일걸.”
페로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게다가 비엔의 플라칼 본가에 있는 친 델루지 가 세력이 이번 조치에 엄청나게 반발하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그쪽 본가에 우리 사람을 보냈는데 거기도 연락이 끊겼어. 상황이 이런데 본가를 통해서 카나르 경하고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위험할 것 같아.”
카렐이 짜증스런 표정으로 머리를 싸쥐었다. 카나르 경을 조금만 더 설득한다면 동맹군 쪽으로 완전히 돌려놓을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용의주도한 베흔이 두 세력 간에 의사소통이 오가도록 순순히 놔둘 리가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역시 카나르 경을 설득하기 위한 물밑교섭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목숨 걸고 나갈 사자를 하나쯤 찾아야 되려나.”
피곤한 듯 빨개진 눈을 비비던 카렐은 옆에 서 있는 니사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하크로딘 상장군하고 릴라크 경의 상태는 어떤가.”
“상장군께선 순조롭게 회복중이십니다. 왼팔 골절부위는 프레임 설치가 끝났고 뇌진탕 후유증도 약물투여로 이제 거의 사라졌습니다. 왼쪽 고막이 찢어지고 내이(內耳)의 평형기관이 심하게 손상을 입었지만 수술 경과가 좋아서 6, 7일 정도면 회복될 것 같습니다.”
“릴라크 경은?”
“오늘 낮에 마지막 경추 수술을 소신이 직접 집도했습니다. 내일이나 모레 정도면 스스로 몸을 가누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일단 오늘 안건은 대충 끝난 것 같으니.......난 좀 쉬어야겠어. 나머지 안건들은 총리가 처결하도록 하게나.”
카렐은 피곤한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비틀거리던 그를 니사가 얼른 달려들어 부축해 주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짚었던 카렐이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정말 이렇게 딱 필요한 때 와 주다니, 난 참 운도 좋지.”
카렐이 키득거리며 한쪽 팔로 니사의 어깨를 살짝 끌어당겨 가슴에 안았다.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는, 이 일상적인 스킨쉽을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 와중에도 도끼눈을 부릅뜨고 있는 세 사람이 있었다. ‘사교 고위급 성직자’를 이토록 친근하게 대하는 황제에게 원리주의자 두겐이 입을 씰룩거리는 것이야 당연했지만 세네피스와 밀리타의 곱지 않은 시선은 그것과는 약간 달랐다.
황제의 가슴에 잠시 이마를 기댔던 니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밀리타에게 씨익 미소를 지었다.
“운이 아니옵고 제국을 통일하실 폐하의 위대한 운명에서 소인은 그저 한 부분일 뿐이옵니다.”
니사의 낮은 속삭임에 카렐이 껄껄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교 성직자한테서 이런 엄청난 찬사를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걸. 솔직히 난 사교도들은 다 황실과 황제를 싫어하는 줄로 알았어.”
카렐이 니사에게 눈웃음을 보내며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대전을 막 나선 황제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른 니사는 뒤따라 오르려는 우베와 비서관들에게 갑자기 눈짓을 보냈다.
“응?”
니사가 무언가 할 말이 있음을 눈치 챈 카렐은 우베에게 들어오지 말라 손짓을 보냈다.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을 실은 엘리베이터가 황제 개인처소가 있는 150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폐하께 청을 하나 드렸으면 하옵니다.”
“청?”
카렐은 이 조그만 주치의를 내려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하께서 꼭 만나주셨으면 하는 분께서 계십니다.”
“나와의 알현이라.......개인적인 청탁인가?”
카렐이 조금은 묘한 웃음과 함께 되물었다. 니사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개인적인 청탁을 드리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사옵니다만.......사실 이건 청이라기보다는 신하로서 건의이옵니다. 주치의가 감히 이런 건의를 드리는 것도 이상합니다만.......누군지 아신다면 아마도 폐하께서 먼저 관심을 보이실 것이옵니다.”
카렐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무어라 말을 이으려는 니사를 가로막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 맞춰볼까.”
“........”
“내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던 자네가 이렇게 살아있다면, 함께 잡혀 처형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수나 빈트 트라카 마구스 역시 죽지 않고 살아있을 가능성은 충분하겠지.”
카렐의 재빠른 추론에 니사가 잠시 당황했다. 카렐은 처음 니사가 들어올 때 했던 약속대로, 지금까지 그와 교단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의 궁금증도 보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카렐의 이번 추론은 그 자체로 당연한 질문이기도 했지만 니사에게 교단에 대한 ‘대답’을 강요하는 교묘한 반격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니사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르마즈 경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당시 지도자였던 샤미르 리쿠의 묵인이 있기도 했지만.......”
“그래, 짐작은 했지.”
카렐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만나자는 이유가 있을 텐데.”
“그분께서 폐하께 큰 도움이 되고자 하십니다. 당시 은혜의 보답을 하고 싶어 하십니다.”
카렐은 니사를 잠시 내려다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오르마즈 경에게 했어야 할 보답을 왜 내게 하는 거지?”
“.......”
“내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게. 내 처소에 함께 돌아가서 말이야.”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미리 기다리던 시녀와 시종들이 황제에게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니사 역시 함께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그렇게 받아들여 주시오니 성은이........”
카렐은 다시 복도를 향해 걸음을 내밀며 별이 총총한 창밖의 어두운 밤하늘을 문득 올려보았다.
“사교도들 역시 언젠가 내가 포용해야 할 제국민들이니.”
무지개빛 광채가 영롱하게 반짝이는 황제의 아름다운 그레이오팔 눈빛을 멍하니 올려보던 니사는 다른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황제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언젠가.......그분께서도 그런 꿈을 품으셨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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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 549회의 내용이 유실되었더군요. 다시 복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