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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546화 (545/1,132)

< -- 546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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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스 장군이 수첩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아참, 듣자하니 델루지 가를 둘로 쪼갤 생각이랍니다. 테번의 고모였던 샤만간 델루지의 후손들을 ‘플라칼’ 가로 이름붙여서 따로 독립시킨다고 들었습니다.”

“샤만간이라.......다하카르 6신관이었던 여자?”

“그 후손들한테 칼릴하고 비엔 6번 행성을 맡길 모양입니다.”

“훗, 고약스런 곳만 골라서 주는군. 옛날 일의 응징이라도 하려는 속셈인가보지.”

오르마즈가 혀를 끌끌 차며 잔에 다시 술을 부었다.

“응징이라뇨? 그네들 내세운 이유는 가문 구성원이 너무 많아서 비효율......”

“알다시피 델루지 가는 대대로 자식들을 대신관의 첩으로 바쳐오지 않았던가. 물론, 마구스들은 ‘천박한 보통 사람’과의 사이에서는 2세를 절대 두지 않으니 델루지 가 피가 ‘신성한’ 마구스의 혈통에 섞일 염려도 없고.”

“그렇긴 합니다만......”

“샤만간도 원래는 자하크 대신관의 첩으로 바쳐졌던 여자였는데 트라카 교단 신관하고 눈이 맞아서 대신관 하렘에서 도망쳐 버렸지. 기원전 100년 무렵 일이었으니 꽤 옛날 일이지.”

“풉.”

솔로스 장군이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오르마즈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뭐, 이해 못할 것도 아니야. 마구스들한테 ‘보통 사람’은 근친상간에 싫증이 날 때 드문드문 흥미를 가지기 위한 장난감에 불과했으니. 마구스들이 아무리 성욕이 강하기로 유명했다지만 수백이나 되는 첩들을 다 안을 수야 있었겠나. 그 여자도 평생을 자식도 없이 독수공방하며 늙어가야 한다는 게 어지간히 괴로웠겠지. 그때는 수명개조도 없었는데 말이야.”

오르마즈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덕택에 다하카르 교단하고 트라카 교단하고 당시에 사이가 많이 나빠졌다지. 다하카르 교단에서는 아라무트 암살단까지 동원해서 샤만간하고 그 후손들을 죽이려 들었고, 트라카 교단에서 그네들을 계속 지켜줬거든.”

“샤만간은요?”

“뭐, 가문에서 제명당하고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지. 자식은 몇 남겼는데 제법 똑똑하게 잘 키운 모양이야. 간택자도 여럿 나왔고 몇몇은 코메트에서 요직도 차지하고 트라카 교단에서 고위 성직자가 되기도 했거든. 얼마 전인가부터는 교단도 무너지고 했으니 가문에 다시 받아들여달라고 청원을 해 오고 있다지?”

“그래서 이런 고약한 곳을 맡기고 충성의 타협을 본 것이군요.”

오르마즈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샤만간이 어떤 여자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후손들 중에 빼어난 무골(武骨)들이 정말 많거든. 그래서 델루지 가에서도 쓸모가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그럼 지금까지 보호해 준 트라카 교단은요?”

솔로스 장군의 물음에 오르마즈가 난처한 듯 쓴웃음과 함께 손을 저었다.

“거기는 좀 복잡한 사연이 많아. 어쨌든.......샤만간의 후손들은 마지막까지도 최소한 교단을 배신하지는 않았다지.”

오르마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다시 기울였다. 그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솔로스 장군은 결국 주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일리안 지역이 좀 신경이 쓰입니다.”

“거기가 왜?”

“다른 지역은 기존 토착 세력을 몰아내고 자신의 측근들을 수장으로 세웠지만 그곳만은 토호인 이그나토 가에 기득권을 인정해 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그나토 가도 어쩔 수 없이 테번에게 충성을 맹세한 모양입니다. 아시다시피 그곳은 곧 지도자로 오를 마시야스 왕제의 처가인데.......”

“훗.”

오르마즈가 갑자기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딴에는 앞을 내다보고 투자를 한 거군?”

“왕제의 정실 테나스 부인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건 이미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소문으로는 델루지 가 직계 중에 한 명을 테나스 부인의 여동생인 마자리크 이그나토와 결혼시켜서 혼인동맹까지 맺으려는 모양입니다. 그쪽을 통해 우리 새 지도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속셈일까요?”

“아마도 그렇겠지.”

오르마즈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짧게 한 마디도 덧붙였다.

“하지만 어쩌면 자충수가 될 지도 모르지.”

“예?”

“그쪽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하는 동안은 이쪽에 공개적인 적대행위는 하지 못할 테니. 좋게만 보자면 리쿠 가와 테번 사이에도 일종의 혈연관계가 생겼으니 나름대로 경사 아닌가?”

상황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는 오르마즈에게 솔로스 장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르마즈는 그런 그에게 씨익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시간을 벌었으니 된 거야.”

오르마즈의 묘한 눈빛을 읽어낸 솔로스 장군이 불안한 표정으로 주방 쪽을 돌아보았다. 주방 한쪽에서는 어린 유평을 업은 유레트가 여전히 청소에 열심이었다.

“그럼 유평 아씨를 후계자로 세우시는 건.......포기하신 겁니까?”

“날 떠보려는 건가?”

오르마즈가 냉큼 되물었다. 솔로스 장군이 대답을 하지 못했듯이, 오르마즈 역시 그 이상 유평 문제에 관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솔로스 장군이 식사와 함께 나온 뜨거운 차로 목을 축이며 물었다.

“듣자하니 함께 계신 동생분이 새 남극성당 1회 입학생으로 들어갈 예정이라고요? 아버님께선 정교수로 임용되실 예정이라 들었습니다만.”

‘아버지’라는 말에 오르마즈가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관심도 없던 막내가 이제야 딸로 보이시는 모양이더군.”

절벽 아래, 옛 교단 성소를 철거하고 콜로니 최초의 유학 교육기관으로 단장된 새로운 ‘남극성당’은 이제 내년이면 첫 입학생을 받아들일 예정이었다. 그리고 오르마즈의 아버지 투르케스크를 비롯한 제니안 소속 유학자들이 이 새로운 학교의 교수진으로 포진해서 유교국가로 거듭날 콜로니의 인재를 양성해 낸다는 것이 목표였다.

세네피스가 이 학교에 입학하는 것에 오르마즈는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지만 달갑지 않은 아버지 투르케스크와 계속 마주쳐야 한다는 걱정에 내심 속이 타들어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음식솜씨가 좋군요. 이 정도면 손님이 많이 들어도 이상할 게 없을 텐데......”

그릇을 비운 솔로스 장군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오늘부터는 유레트가 가게를 맡을 거니까 이젠 장사가 좀 되겠지.”

“잘됐군요. 맡길 사람도 있으니 이젠.......”

“무슨 말 하려는 건지는 알지만 더 이상 듣고 싶지는 않군.”

오르마즈가 손을 저으며 그의 말을 차갑게 끊어버렸다. 솔로스 장군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케메니아 소식은 이미 알고 계실 것 아닙니까.”

“이젠 별 관심 없네. 이젠 내 삶을 살 거야. 장사가 되던 안 되던.”

오르마즈는 술기운에 조금 풀린 눈동자를 껌벅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솔로스 장군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비상위원회 베흔 위원장이 마시야스 왕제의 즉위식을 준비 중입니다.”

“즉위?”

“‘제국’을 선포하겠다는군요. 그간 모든 분열과 내분의 원흉이었던 비효율적인 공화제를 집어치고 제정(帝政) 국가로 콜로니를 재정비한답니다.”

“풉.”

오르마즈가 코웃음을 치며 얼마 남지 않은 럼을 훌쩍 들이켰다.

“마시야스 ‘황제’라.......뭐, 그럴싸하긴 하네. 그 멍청한 꼬맹이가 황제라는 이름값을 할 수만 있다면 말이야.”

잠시 후, 그릇을 다 비운 솔로스 장군이 오르마즈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이곳에 온 건.......”

“베흔 녀석의 부탁이었겠지.”

오르마즈의 즉각적인 대꾸에 솔로스 장군은 마치 죄라도 지은 양 지레 깜짝 놀랐다. 오르마즈가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베흔이 자기 혼자서는 힘들다고 하던가?”

“그게.......예, 그렇습니다.”

솔로스 장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번의 위협도 위협이지만 유학자들의 저항도 거셉니다. 바니샤드를 수장으로 한 유학자 세력이 테번의 세력 확장을 핑계 삼아 자신들도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려 합니다. 지금 아켐과 테나토의 유학자 계열 토호들을 주축으로 연합세력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선임자의 유언장도 없이 선임된 마시야스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명분 타령이나 해 대는 그네들 전형적인 수법 아닙니까.”

“콜로니가 산산조각날 판이라고? 그래서? 일은 다 망쳐놓고 이제와 나한테 수습해 달라고 손을 내미는 건가?”

오르마즈가 잔을 만지작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솔로스 장군이 오르마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저 역시도 베흔 녀석이 꼴도 보기 싫습니다. 장군님 마음도 잘 알고 말입니다. 하지만 잘못하면 ‘황실’이 출범도 하지 못한 채로 좌초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잘 되어봤자 여기 아케메니아나 차지한 조그만 세력의 수장 정도로 몰락할지도 모릅니다.”

“베흔이 샤미르 전하의 유지를 짓밟을 때 이미 몰락한 거야.”

카우치에 몸을 더 깊이 묻은 오르마즈는 옆에 놓인 물담배에 다시 불을 붙이고는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휴우.”

솔로스 장군은 그런 그에게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편지 위에 쓰인 ‘즉위 예정자, 왕제 마시야스’라는 서명에 오르마즈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못마땅한 듯 편지를 펼쳐들었던 오르마즈는 내용은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채 코웃음을 치며 편지를 공중에 흔들었다.

“명색이 황제가 되실 분께서 벌써부터 꼴 한 번 볼만하군. 베흔이 자필로 쓴 편지에 서명만 하셨군?”

“......”

“그래, X 혁명가께서 뭐라고 쓰셨는지 볼까.......오호, 이 반역자한테 내무대신과 황실 임시내각의 수반이라는 영광을 내리겠다고? 세상에, 이런 황송할 데가 있나. 감개무량해서 까무러치겠군.”

맘껏 빈정거린 오르마즈는 편지를 물담배가 타들어가고 있는 불꽃 위에 서슴없이 들이댔다. 타들어가는 편지의 붉은 불꽃 너머로 솔로스 장군의 창백해진 표정을 쳐다보며 오르마즈가 묘한 미소를 품었다. 당황한 솔로스 장군이 불을 끄려 했지만 오르마즈는 거의 재만 남은 편지를 무심하게 공중으로 날려 버렸다. 솔로스 장군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자, 장군님, 이러시는 건.......”

오르마즈가 그 무지개빛 그레이오팔 눈가에 매서운 광채를 뿜으며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돌아가거든 그 꼬맹이.......아니, 베흔한테 전해주게. 첫 번째, 베흔 녀석이 지 동기들에 천하의 또라이들 긁어모아놓은 비상위원회인지 나발인지 수장으로 있는 이상 임시내각 따위는 앞으로 존재조차 못 할 거라고 말이야.”

정곡을 찌르는 오르마즈의 지적에 솔로스 장군도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베흔이 수장으로 있는 ‘비상위원회’는 행정, 군사 양면에 걸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샤미르가 기껏 세워놓은 국가 운영체계를 엉망으로 흐트러뜨려 놓고 있었다.

“두 번째, 유레트를 황제와 이혼한 첩의 권리에 준해 대우해 주고, 유평 아씨를 새 황제의 장녀로 인정해 주고 리쿠 가 명부에 올려주며.”

솔로스 장군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오르마즈의 요구는 결국 유평을 마시야스의 친자로 다시 받아들여 달라는 것이었지만 따져봐도 그다지 실속은 없어 보였다. 마시야스에게는 이미 테나스와의 사이에서 얻은 3명의 아들이 후계자로 굳건히 버티고 있었고, 새로 맞은 첩들 중 둘이 이미 임신 중이었다. 적생자도 아닌, 고작 이혼한 첩과의 사이에서 난 서녀 신분인 유평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약간의 금전적인 지원을 빼면 사실상 아무 것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솔로스 장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평의 친부, 그리고 이젠 깨져버린 샤미르와 마시야스의 밀약을 전혀 모르는 그로서는 내심 아케메니아로 돌아가고픈 오르마즈가 그저 체면치레를 위해 형식적으로 내세운 조건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솔로스 장군의 이런 의아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르마즈는 계속 요구사항을 이었다.

“세 번째, 돌아가신 샤미르 전하의 유언 집행인으로 나를 선임해 준다면 아케메니아로 돌아갈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지.”

“돌아가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르마즈의 요구사항들을 수첩에 적어 넣은 솔로스 장군은 적지 않은 돈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훌륭한 아침식사였습니다.”

뒤돌아서서 문을 나서는 솔로스 장군을 향해, 오르마즈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참, 네 번째, 새로운 제국의 법률에는 ‘종교의 자유’가 명시적으로 들어가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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