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48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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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을 입으신 최고제후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연합군 최고지휘관 회의에 참석한 베흔이 입가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고제후께서 입으신 부상을 제외하면 다행히 우리 연합군 전력 자체에 치명적인 손실은 없습니다.”
“플라칼 가가 이탈한 걸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렇겠지.”
샤자한 공이 들으라는 듯 빈정거리자 베흔도 그의 말을 차마 부인할 수는 없는지 씁쓸한 미소만을 지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의 일을 이렇게 사무적으로 말해야만 하는 그의 속도 어느새 썩어문드러져 있었다.
“지금 카나르 플라칼 경을 계속 설득하는 중이니 조만간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그래, 그래, 그렇긴 한데 기껏 간 사자들도 모조리 손목이 잘려서 돌아온다지?”
샤자한 공의 빈정거림에 베흔의 얼굴이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때, 마누엘이 그를 대신해 냉큼 입을 열었다.
“걱정 마시죠. 이번에는 절대 거부하지 못할 ‘확실한 사자’를 보낼 겁니다.”
‘확실한 사자’라는 말에 지휘관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마누엘은 어깨만 으쓱거릴 뿐 별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사자로 누가 가던간에, 최악의 경우는 생각해야 하니까.”
샤자한 공이 무언가 큰 결심을 한 듯 입술을 굳게 깨물며 말했다.
“만약 플라칼 가가 적 쪽으로 돌아선다면.......”
순간 사람들의 휘둥그레진 시선이 샤자한 공의 입술 끝에 일제히 모아졌다. 잠시 뜸을 들이던 샤자한 공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로서는 시간의 이득은 물론이고 ‘포위군’으로 지리적인 우위까지 모두 빼앗기는 셈이오. 게다가 지금 우리 연합군의 문제는 군사적인 것보다는 정치적인 것이 더 크니.”
베흔은 이번에도 큰 이견은 없는지 별 반박을 하지 않았다.
“그때는 차라리 전군이 탄현성으로 물러나서 전반적인 재정비를 하고 정치적인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나을 겁니다.”
순간 회의석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자자, 그런 건 나중에나 생각하도록 하고.”
베흔이 손뼉을 짝짝 치며 축 처진 분위기를 일단 흔들어 깨웠다.
“이번 전투를 통해 우리 근위대에서 2명의 특등급이 새로 나왔습니다.”
베흔이 등 뒤를 지키고 선 기골이 장대한 2명의 가디언들을 가리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지난번 전사한 아리엘과 수에보의 빈자리를 훌륭히 메워 줄 용사들입니다. 6세대 X인 타크마와 7세대인 드루그입니다.”
무려 2명이나 되는 특등급들이 다시 나왔다는 말에 같은 편인 연합군의 장교들조차 경악을 할 정도였다.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자들만으로도 지금까지 죽은 가디언들의 자리를 충분히 메울 만큼 근위대 가디언부대의 인적 자원이 풍부하다는 뜻이었다.
“가디언이라고 다 똑같이 찍어내는 건 아닌 모양이야.”
샤자한 공이 마치 농담처럼 중얼거렸지만 그 말은 베흔의 뒤에 선 두 사람을 너무도 정확히 묘사한 것이었다. 기본적인 근골은 둘 다 가디언으로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지만 당당하고 우람한 체구의 드루그에 비하면 그 선배격인 타크마는 가디언이 맞을까 싶을 날렵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큰 양손검을 멘 드루그와 날렵한 시미터, 단검을 양쪽에 각각 지닌 타크마와는 무기조차 딴판이었다.
“지난 공성전에서 각각 나와 셈을 따라 들어가 부장 역할을 했던 유능한 가디언들이지요. 드루그가 아니었다면 셈도 카렐 그년 손에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타크마는 제가 동북문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게 길을 뚫어주었고요.”
베흔의 이런저런 설명이 아니어도, 연합군 장교들은 경쟁이 치열하기로 유명한 근위대 가디언부대에서 특등급으로 오른다는 것이 페로 가디언부대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근위대에서 특등급이 된다는 것은 근위대의 장군급, 제후군에서 대장군급의 지위를 뜻하는, 가디언으로서는 최대의 명예였다.
“그건 그렇고, 최고제후의 병세는 어떻습니까?”
베흔은 표정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쓰며 이번엔 마누엘 델루지 경에게 물었다. 마누엘이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잘린 팔이라도 찾았으면 좋았을 텐데 팔이 없어졌으니 난감하지. 도끼가 박혔던 자리는 대강 수술이 끝났고 이젠 식사도 하시고 대화도 별 무리 없으니 큰 상관은 없어. 2,3일 후면 일단 지휘석에는 복귀하실 수 있을걸.”
“다행이군요.”
베흔은 서류를 넘기며 최대한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음번 공성은.......”
무어라 말을 이으려던 베흔은 누군가 등을 툭툭 치는 느낌에 고개를 휙 돌렸다.
“응? 왜?”
“보안국장 쿠베 대장의 급한 연락입니다.”
쿠베가 찾는다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베흔이 잠시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다른 사람도 아닌 쿠베가 급하게 찾는다면 보통 일이 아님에 틀림없었다.
사람이 없는 빈 막사로 화급히 들어선 베흔이 할룩스를 작동시키며 물었다.
“뭐냐?”
베흔의 물음에 쿠베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수에니 지부에서 연락입니다.”
“수에니? 거기서 또 뭘?”
계속된 안 좋은 소식들에 질려 있던 베흔은 바로 표정부터 찡그렸지만 쿠베는 그런 그에게 씽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타르서스 분리세력 중 가장 큰 ‘헥스터’라고 아십니까.”
“그놈들이 왜?”
베흔이 눈가에 힘을 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간 계속해 차별대우를 받아 온 타르서스에는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여러 세력들이 난립하고 있었고, 지난해, 페로가 그곳을 영향권으로 접수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네들 조직에서 ‘보호’ 하고 있는 타르서스 직할군 탈영병들이 몇 있다고 합니다. 그네들을 우리에게 넘겨주겠다고 하는군요.”
“빌어먹을, 그 따위 잡놈들하고는 상대 안한다는 게 우리 방침이라는 걸 잊었냐? 됐어. 집어치우라고 해. 고작 그따위 일로 회의 중인 사람까지 불러냈어?”
베흔이 버럭 화를 내며 손을 저었다. 그런 그에게 쿠베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물론 압니다, 대장.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적당히 써먹고 버려도 충분한 건수로 보입니다.”
“왜?”
베흔이 그제야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물었다.
“이번엔 단순히 그 조직의 잡놈들이 아닙니다. 타르서스 북부의 토호인 아크반 가문이 그놈들과 함께 협상을 청해 왔습니다.”
“타르서스 토호가?”
베흔이 그제야 눈을 빛내며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쿠베가 사진 한 장을 내보이며 말했다.
“지난번 대장을 보고 바로 도망갔던 타르서스 직할군 오합지졸들 말입니다.”
“그래, 그런 한심한 놈들이 있었지. 그놈들은 전투 후에 모조리 처형당했다고 들었는데?”
“그 부대의 선임 소대장이었다고 합니다. 디브 아크반. 아크반 가문의 아들이지요. 운 좋게 도망쳐서 지금 아크반 가에서 보호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상황을 알아챈 베흔이 간만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볼만하네. 잡놈 가문에 한심한 자식새끼로군. 자식새끼 하나 살리겠다고 배를 갈아탈 생각을 하다니. 쯧쯧.”
기가 막힌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베흔이 질문을 꺼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슨 도움을 주겠다는 거지? 요구조건은 뭐고?”
쿠베가 기다렸다는 듯 보고를 이었다.
“아시다시피 타르서스는 동맹군의 후방 보급기지 역할을 하고 있지요. 타르서스 직할군은 보급선 방어와 수송 임무를 맡고 있고.”
“그런데? 고작 토호 주제에 타르서스 전체를 우리 편으로 돌린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큰소리를 친 건 아니겠지? 타르서스 지방장관 놈이나 직할군 수장 유시프 장군은 우리 편으로 돌아설 놈이 아니야. 그 밑의 장교단도 마찬가지고. 형편없는 부대긴 하지만 고작 그런 일로 누구네처럼 손바닥 뒤집듯 편을 바꿀 놈들은 아냐.”
“물론 그런 현실성 없는 헛소리를 한 건 아닙니다.”
쿠베가 들고 있던 할룩스를 두드리며 파일 하나를 전송했다.
“1번 도시에서 셔틀 이용이 불가능해지면서 적 역시 보급품 수송을 아케메니아 포구를 드나드는 선단(船團)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전투에서 황도의 수비군이 생각 외의 큰 피해를 입으면서 물동량이 상당히 늘어난 모양입니다. 지금 포구가 포화 상태가 되었다죠.”
“그래서?”
“그 덕택에 반입물품에 대한 검문도 상대적으로 느슨해진 모양입니다. 디브라는 소대장놈이 포구의 검문체계와 조직에 관해 꽤 꼼꼼하게 알려주더군요.”
쿠베가 보낸 파일을 읽어본 베흔이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입가 가득 웃음을 품었다.
“이게 전부인가?”
“아뇨, 또 하나 있습니다. 제법 쓸 만한 정보인데.......포구 사정 때문에 황궁에서 직접 소비하는 물품은 심야에 황궁 지하수로를 통해 비밀리에 직접 반입한다고 합니다.”
“옛날 에아 신전이 있던 그곳 말인가?”
베흔이 길어진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물었다. 욱리하와 직결된 그 작은 수로는 베흔이 있던 때에도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비밀스런 출입을 위해 가끔 쓰이던 황궁의 비밀 출입문이었다.
쿠베가 어깨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디브라는 놈이 선단 일정표 중 일부를 기억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배가 드나드는 길까지 말입니다. 물 속 사방에 사슬을 쳐 놔서 길을 모르는 외부인은 배를 타고 접근하기 불가능한 곳인데도 말이죠. 잘만 하면.......우리 병력 중 일부를 황궁 내부에 직접 들여보낼 수도 있다는 말이죠.”
“이거 재밌어지는데.”
베흔은 막사 창 너머로 황성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난 공성전에서 파손된 동북벽을 손보느라 동맹군 사역병들이 새카맣게 달라붙어 있었지만 아무리 따져보아도 빠른 시일 내에 원상복구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놈들이 무너진 동북벽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뒤를 찌른다?”
“원한다면 디브 녀석을 우리 쪽으로 보내서 길잡이 역할을 맡게 할 수 있답니다. 대신 그놈을 제5공신에 봉해주고 보안국 간부로 특채해달라는 조건이 붙어있지만요.”
“미쳤어, 그런 1회용 쓰레기를 두고두고 쓰게. 그것도 보안국이라니 제정신이 아니군. 그거 말고 다른 조건이 뭔데?”
베흔이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손을 저었지만 쿠베가 히죽거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자기네 종장을 다음번 지방장관으로 삼아 달라고 하는군요. 직할군 사령관도 자신들이 선임할 수 있게 해 주고.”
“뭐?”
베흔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다시 혀를 찼다.
“토호라더니 생각하는 건 촌장 수준이군.”
“부지깽이든 보검이든 상대를 쳐 죽일 수만 있으면 우리에겐 상관없죠.”
쿠베가 이를 드러내며 다시 웃음을 지었다. 베흔 역시 침울해졌던 표정에 묘한 미소를 흘렸다.
“디브인가 하는 그 새끼를 여기로 데려와. 그놈이 오면 두 번째.......아니, 마지막 공성전을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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