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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551화 (550/1,132)

< -- 551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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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 마구스의 황당하기까지 한 제안에 카렐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이 그대에게 불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유교국가인 제국 황제인 내가 사교.......아니, 교단의 지도자였던 사람을 대리인인 칙사로 보낸다는 건.......”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제 신분이 폐하의 정치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수나 마구스는 황제의 어이없어하는 시선에도 태연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플라칼 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만은 그 문제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나르 경 역시 제 신분을 알고 있고, 제가 폐하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향을 충분히 고려할 것입니다. 플라칼 가는.......다른 가문과는 많이 다르니까요.”

카렐이 턱을 어루만지며 보안국장 시절 머릿속에 넣은 자신의 옛 지식들을 최대한 응용해보려 애썼다.

“혹시 플라칼 가의 시조인 샤만간 델루지.......아니, 샤만간 플라칼을 말하는 것인가? 대신관 하렘에 있다가 그대의 교단으로 도망쳤던?”

“종권을 주장했던 샤만간이 형제자매들에게 떠밀려 강제로 대신관 하렘에 끌려간 것부터가 문제가 많았지요.”

“자네가.......아니, 내가 플라칼 가에 제시해야 할 협상 조건을 귀띔해주는 건가?”

수나 마구스의 속셈을 눈치 챈 카렐이 히죽거리며 되물었다.

“교단이 무너진 이후 샤만간의 후손들도 어쩔 수 없이 본가에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그네들도 그때까지는 할머니가 주장했던 명분을 꿋꿋이 지키고 있었지요. 카나르 플라칼은 그 샤만간의 장손자입니다.”

수나 마구스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번들거리듯 꿈틀대는 묘한 시선에서, 카렐은 어딘지 익숙한 느낌을 받았지만 당장은 그것이 중요치 않았다.

“행여 예르마크 세닉 경이 먼저 성공하면?”

“카나르 경은 틀림없이 양쪽을 저울질할 것이오니, 누구를 먼저 만나는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카나르 경이 돌아서면.......예르마크 경 역시 뒤따라 ‘결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그대의 말은 내 조건으로 삼기에 충분히 가치가 있으나.......그대가 직접 가는 건 용납할 수 없소.”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난 카렐이 딱 잘라 거절했다.

“내 조금 전 말했듯 그대를 보호해 주겠다고 했으니, 눈에 빤히 보이는 사지에 들이밀지는 않겠소. 그곳은 2만이 넘는 동부기병과 근위대가 완전히 포위하고 있어서 잘 훈련된 가디언조차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할 거요.”

“조금 전 말씀드렸듯.”

카렐의 걱정어린 거절에 수나 마구스가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 엄중한 포위망을 바보처럼 직접 뚫고 들어갈 필요는 없지요. 저는 군인도 아니고, 싸움 따위는 더더욱 할 줄 모릅니다.”

“그럼?”

수나 마구스가 태연한 얼굴로 자신의 의사 수첩에서 ‘경력’란을 내보였다. 순간 카렐이 입술을 꽉 깨물며 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수첩 한쪽에는 ‘비엔 출신 의학박사 페이 코다’라는 가짜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세닉 가 전 종장이었던 요아킴 세닉 경의 주치의였다는 기록, 그리고 세닉 가 소속의 중랑장급 군의관으로 선임될 수 있다는 신임장이 전 종장 요아킴 세닉 경의 친필 서명과 함께 남아있었다.

“세닉 가에 이곳 원정군에 지원하겠다고 알려놓은 상태입니다. 전황이 좋지 않아서인지 빨리 입대하라고 독촉이 심합니다. 이미 연합군 의무단의 신임 부단장으로 내정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지난 황도 전투에서 전임자가 하지즈 장군에게 포로로 잡혔다지요.”

카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수나 마구스가 계속 말을 이었다.

“이틀 후에 떠날 예르마크 세닉의 사절단에는 2일치의 식량을 실은 보급대와 플라칼 가를 회유하기 위한 의무대가 함께 가도록 예정되어 있습니다. 외부와 단절된 플라칼 가는 지금 보급과 의료에서 가장 애를 먹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전 연합군 의무대 지휘관이 되어서 예르마크 세닉과 함께 플라칼 가에 들어가겠습니다.”

“풉.”

카렐은 하마터면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수나 마구스의 말대로라면, 연합군 사자인 예르마크 경이 동맹군 칙사를 함께 데려가는 셈이었다.

수나 마구스가 머리를 조아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게 칙서로서의 격을 갖춘 친서와 위임장만 써 주십시오. 조건 따위는 제가 감히 관여할 일이 아니니 폐하께서 모두 결정해 주십시오.”

“얼굴을 가리시오.”

한참을 생각하고 난 카렐은 수나 마구스에게 먼저 주의를 주고는 문 바깥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우베!”

“예?”

카렐의 외침에 우베가 당장 문을 때려부술 듯 허겁지겁 뛰어들어왔다. 그리고는 흰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 정체불명의 사람과 황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칙서 양식을 가져오도록 해라. 지필묵과 옥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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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복귀를 놓고 오르마즈가 제시한 이런저런 요구에도 마시야스, 아니 베흔으로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베흔이 여전히 자신의 권력을 버리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고, 오르마즈의 존재는 그런 그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사실 베흔을 비롯한 마시야스 지지 세력이 오르마즈를 불러들이면서 노린 것은 ‘건국의 영웅’인 그의 이름을 빌려 더 이상의 분열을 막는 정도였을 뿐 그가 정말 무슨 일을 해 주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왕 폭주한 테번이야 접어두고서라도, 나머지 세력만이라도 황실의 이름 아래 집결시킬 수 있다면 테번도 섣불리 ‘독립’을 선언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이 베흔의 그럭저럭 정확한 예측이었다.

베흔이 ‘지방 세력을 다독여야 하는’ 내무대신 자리를 오르마즈에게 주고, 자신은 민병대에서 이름만 바꾼 ‘황실 근위대’의 수장이 되려는 것도 이런저런 고려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이건 명백한 하극상입니다.”

측근들의 볼멘소리에 오르마즈는 미소만 지었을 뿐이었다. 아케메니아에 돌아와 마시야스와의 정식 ‘알현’을 기다리고 있던 그는 측근인 헌병감 베멜러 준장의 집에 초대받아 왔다가 이런 생각지도 못했던 불만에 직면하고 있었다.

“자네들도 그리 생각하나?”

오르마즈가 자신을 에워싼 무장들을 둘러보며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베멜러 준장의 곁에는 이전부터 오르마즈를 지지해 온 옛 민병대 장교들, 아니 이젠 황실 근위대의 무장들 서너 명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민병대 시절 온건파에도, 강경파에도 속하지 않았던 코윈과 쿠트라스, 바하칼리 부근--- 이후 ‘북부’라 불리게 될--- 출신들이었다.

베멜러 준장이 계속 목소리를 높였다.

“베흔 그놈은 샤미르 전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만 해도 고작 소장(少將)이었습니다. 게다가 8그룹들은 X들 중에서는 제일 서열이 아래라는 말입니다! 제가 아무리 권력을 쥐었다 해도 군에는 위계라는 것이 있는데 차라리 내각으로 가 버리면 될 것을 고작 1달도 안 되어 다시 돌아와서 옛날 상관들 머리꼭대기에 서겠다는 겁니까!”

베멜러 준장과 소장파 무장들의 격한 불만에도 오르마즈는 찻잔을 입에 댄 채 엷은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지금 민병대.......아니, 근위대 장교들이 연판으로 서명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녀석이 다시 돌아와서 근위대장이 된다니, 근위대장이면 원수급인데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중장 이상의 장성들은 어떻게 처신을 하라고.......”

“그래서, 서명장이라도 들고나가 시위라도 하려고?”

오르마즈는 따뜻한 찻잔을 손으로 감싸 쥐며 태연하게 물었다.

“내가 준장에서 원수까지 4단계 승진할 동안 소장에서 겨우 한 단계 승진한 솔로스 장군도 있어.”

오르마즈가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베멜러 준장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중장이나 대장 중에서 내부승진이 되던지, 아니면 장군님 같은 전역 장성이 돌아와 근위대를 맡아주셔야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날보고 근위대장이 되라고? 난 이미 임시내각 수반 겸 내무대신으로 예정되어 있네.”

오르마즈가 여전히 싱글벙글하며 손을 저었다.

“답답하십니다. 내무대신이라는 건 장군님 이름을 빌리기 위한 수작에 불과합니다. 조직규정에 못 보셨습니까? 말이 좋아 내무대신이지 실권은 하나도 없습니다. 치안권은 근위대에 있고, 각 지역 행정권은 사실상 호족들에게 있습니다. 결국 지방 호족들 뒤치다꺼리 하는 일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

오르마즈는 차를 훌쩍 들이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베멜러 준장은 계속 목소리를 높였다.

“마시야스 저놈은 장군님 이름을 빌려서 지방 세력만 대강 달래놓고 내정만 안정되고 나면 장군님을 다시 버릴 것이 뻔합니다.”

“내가 그 자리에 100년을 있는다고 지방 세력들 욕심이 달래질 것 같나.”

“예?”

“어차피 그네들 욕심은 무엇으로도 막지 못해. 고로 내가 할 일도 계속 있으리라는 뜻이지. 이 ‘제국’이 망하지 않는 한은.”

오르마즈가 언뜻 사악해보이기까지 한 미소를 지었다. 명색이 내무대신 내정자라는 그의 이런 무책임한 말에 베멜러 준장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 역할은 제국이 ‘망하는 걸’ 최대한 늦추는 것뿐이야. 우음, 이 쿠키 정말 맛있군. 역시 자네 마누라 음식솜씨는 최고란 말이야. 나 한 봉지만 싸 주겠나? 세네피스가 이거 절반만 따라하면 얼마나 좋을까.”

오르마즈는 ‘망한다’는, 신하로서는 감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태연하게 늘어놓으며 탁자에 있던 과자를 입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베멜러 준장은 오르마즈가 정말로 하려는 말이 이제 그의 목구멍까지 와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조만간 자네들.......아니, 내 고향이기도 하군. 코윈과 쿠트라스 일대 상공업자들도 테번의 선례를 따라 독자세력 형성을 시도할 게야. 아니, 이미 그 조짐을 보이고 있지. 자네들은 어떤 길을 택하겠나? ‘황실’에 충성할 건가?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갈 건가?”

오르마즈의 물음에 베멜러 준장이 움찔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베멜러 준장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저는 어디든 장군님이 계신 곳에 함께합니다.”

“그래, 좋군. 그런데 지금 그 일대에서 제일 큰 세력가가 누구였더라?”

“그야 최대의 재벌인 빌루이 카.......”

베멜러 준장이 말꼬리를 흐리며 ‘빌루이의 손녀’ 오르마즈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오르마즈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내가 황실의 군대를 이끄는 근위대장이 되면 내 할아버지와 군사적으로 대립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이 신생 황실의 지도부가 무능하긴 하지만 아주 바보는 아냐. 그런 나를 근위대장으로 삼을 리도 없고, 설사 된다고 해도 나중에 내 목을 죄는 밧줄이 될 수도 있어. 그들에게도, 내게도, 내가 근위대장이 되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냐.”

베멜러 준장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르마즈가 과자를 씹으며 말을 이었다.

“베흔 녀석이 근위대장이 되는 게 유쾌하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혁명’의 주역한테 그 정도의 자리도 주지 않는다면 놈은 순순히 물러나는 대신 더 큰 사고를 치려 할 걸. 그러면 이 허수아비같은 제국이나마 존재하지도 못할 테지.”

오르마즈가 처음으로 어두운 눈빛을 지으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을 위해서라도.......콜로니든 제국이든 그 체계만은 살아있어야 해. 설사 속으로 곪아 문드러진다고 해도 말이야. 그게 내 역할이라면.......어쩔 수 없지.”

이후 있을 다른 대부분의 황제들 즉위식이 그렇듯, 콜로니 최초의 황제인 세나우스 1세, 마시야스 리쿠의 즉위식 역시 황제다운 성대함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찌감치 독립 세력을 노리고 있던 테번과 그 세력은 물론이었고, 마시야스의 정통성에 계속 의문을 제기해 온 바니샤드 플레렌과 그를 따르는 유학자 세력이 참석을 하지 않은 건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그들 외에도 사절을 보내 온 지방 호족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었다. ‘황족’이 되었다는 생각에 득의양양해 있던 리쿠 가 사람들은 썰렁한 즉위식장에서 충격을 받은 얼굴로 멍하니 앉아있어야 했다.

아케메니안 궁 1층에서 열린 이 행사에 참석한 건 이젠 얼마 남지도 않은 옛 민병대 전사들, 그리고 아케메니아에 함께 위치하고 있던 탓에 마지못해 참석할 수밖에 없었던 타르서스와 남극, 북극, ㅤㅋㅞㄹ크의 호족들이 전부였다. 이름만 그럴싸한 이 ‘황제’의 지지 세력은 고작 ‘지도자’ 정도로 불렸던 그 전임자 샤미르만도 못한 참담한 수준이었다. 누가 보기에도 황제라기보다는 ‘아케메니아’, 아니 이후 황제령으로 불리게 될 한 지역 수장의 임명식 수준을 넘지 못했다.

심지어 내각 수반이며 내무대신인 오르마즈마저도 ‘참석을 설득하러 간다’며 떠난 요동에 잠시 억류당하면서 돌아오지 못해---사실 요동에서는 그가 ‘술에 취해 미소년들과 어울려 노느라 가래도 가지 않았다’는 확인 못할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내각의 충성의 맹세도 신임 이부대신이 허겁지겁 대신해야 했을 정도였다.

과정이야 어쨌든, 이제 제국은 출범했고 그들의 앞에는 정통성도, 힘도, 심지어 황제의 지도력조차 결여된 이 빈약한 나라를 제대로 나라답게 만들어야 하는 난제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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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니 5-5-5회로군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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