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53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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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족들의 혈통에 관해 지난 1차 보고서를 가져온 게 언제인데 아직까지 2차 보고서는 감감 무소식이지?”
수나 마구스와의 비밀 만남을 끝내고 돌아온 카렐이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은 황실 유전자은행 소장으로 있는 자그룰라 모렌 박사였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 알게 된 모렌 박사의 옛 전력에 관해서는 따로 말을 꺼내지도, 돌려 묻지도 않았다.
카렐의 추궁을 이미 짐작했다는 듯, 모렌 박사가 반쯤 체념한 표정으로 파일에 가져온 자료를 올렸다.
“지난번 알려드린 건 샤미르 전하와 세나우스 2세 선황의 자료였고 오늘은.......”
“오늘은?”
자료를 펼쳐든 카렐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곳에 담겨있는 건, 일상적인 황족의 출생증명 자료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제일 위에는 ‘S-6-2 주페 리쿠’라는, 틀림없는 황족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카렐이 모렌 박사를 향해 살짝 눈을 흘겼다.
“내 눈에 꽤 익은 스타일의 자료로군.”
“그, 그렇습니다.”
모렌 박사가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내 아버지의 자료가 왜 친생자 관계 자료가 아니고 ‘합성표’인지 말해주겠나?”
카렐의 아랫입술이 어느새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딸이 그랬듯, 아버지 주페 역시 순수한 자연수정을 통해 태어난 사람은 아니라는,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 그간 모렌 박사의 비밀 속에 파묻혀 있었다는 뜻이었다.
“내 아버지 역시 그 딸처럼 실험실에서 덕지덕지 기워서 만들어진 사람이었던가? 그것도 3명이나 되는 사람을?”
카렐의 자조 섞인 표현에 모렌 박사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아, 아니옵니다. 그분께선.......세나우스 2세 선황께서 다음 황제로 삼기 위해 세심히 계획해서 가지신.......‘특별한 존재’셨습니다.”
‘특별한 존재’라는 말을 무심코 썼던 모렌 박사가 순간 움찔하며 카렐의 눈치를 보았지만 지금의 카렐은 그런 것까지 알아챌 정도의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 봤자 결국은 광장에서 목이 잘리셨잖나!”
갑자기 욱한 카렐은 집무실이 떠나가라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누군가의 뱃속에서 잉태되고 자라지 못했다는 묘한 분노와 피해의식이 순간 그의 고함소리와 함께 터져나왔다.
“.......아니다. 황제가 된 내가 이제와 이러는 것도 웃기군.”
잠시 격앙되었던 감정을 일단 진정시킨 카렐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합성표의 내용을 한 줄 한 줄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용을 읽어 내려갈수록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창백해져만 갔다. 그리고 결국 그도 반쯤 보다 만 서류를 떨어뜨리며 이마를 싸쥘 수밖에 없었다.
“
“그래, 할머니께서.......2개의 캡슐을 몸소 가져오셨다고?”
황제의 물음에 모렌 박사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게.......황상께서 어느 날 캡슐 2개를 가져오셨습니다. 그 두 개의 세포에 상의 난자를 합성해서 둘째 태자를 갖고 싶다 하셨습니다. 외척에 좌지우지되지 않을 중립적인 태자를 얻으려 일부러 그런 선택을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훗, 오르마즈 경을? 좀 솔직하셨으면 좋았을 걸, 그 분도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이셨군.”
카렐이 냉소적으로 입가를 씰룩거렸다.
“하지만 생전에 선황께선 오르마즈 경을 내치셨었고.......”
“그건 어차피 진심이 아니었을 게야. 훗, 이 자리에 앉아보니 이제 할머니가 욕을 들어가면서도 밀어붙였던 결정들이 이해가 가.
카렐이 짜증스레 손을 저으며 다시 합성표에 시선을 주었다.
“그래, 그럼.......오르마즈 경 말고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인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오르마즈 경의 세포 캡슐은 유전자은행 특별보관실에서 이미 눈에 익은 것이다 보니 받자마자 누구의 것인지 눈치를 챘습니다만 나머지 한 개는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캡슐인지라 저로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자네를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 아나?”
카렐의 뚱딴지같은 질문에 모렌 박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말해선 안 되는 것,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은 입을 닫기로 결정한 이상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는 거지. 내가 궁지까지 몰아붙여 입을 열게 하지 않는 이상은.”
카렐이 손가락을 치켜들며 또렷하게 말했다. 그런 황제에게 모렌 박사가 처음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칭찬이신지, 아닌지 무척 헛갈리는군요.”
“최소한 자네의 그 위치에서는 지극히 긍정적인 업무 스타일이지.”
빈정거리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던 카렐은 보고서에 함께 첨부된 2개의 캡슐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모렌 박사의 말대로, ‘특별한 자료’를 나타내는 은테가 둘러진 오르마즈의 것과는 달리 나머지 한 개는 낡은 티가 확연한 구형 보관캡슐이었다. 캡슐에는 아무런 글자도, 표시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보관 실수인지, 정체모를 검은 얼룩이 가득 묻어있었다.
“그래, 쓰고 난 캡슐은 어찌했지?”
“황상께서 다시 가져가셨습니다. 오르마즈 경의 자료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나머지 캡슐도 아마 원래 위치에 돌아가 있을 겁니다.”
“당시에도 이렇게 낡은 상태였다는 건 최소한 그때 막 채취한 세포는 아니었다는 뜻이군. 그리고........아버지가 남자셨고, 오르마즈 경은 Y염색체를 줄 수 없으셨을 테니 그건 이 ‘두 번째 할아버지’에게서 왔다는 뜻이겠지?”
“그렇습니다.”
“당시에 이런 캡슐 상태로 자신의 세포를 남겼을만한 사람은 누가 있나?”
“황족이라던가.......아니면 지체 높은 공신이라던가......”
“이번에도 내가 자넬 궁지까지 몰아주기를 기다리는 건가?”
카렐이 또다시 빈정거리자 모렌 박사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급히 변명을 했다.
“정말입니다. 하지만 저희 유전자은행에 보관된 공식 자료 중에는 이런 형태의 캡슐 자체가 없습니다.”
“공식? 그럼 비공식은? 그쪽은 자네가 더 잘 알 텐데? 내 몸소 비공식 캡슐들을 모조리 확인해봐야 하겠나? 옛날에 교단에서 훔쳐온 것들까지 말이야.”
순간 창백해진 모렌 박사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카렐이 키득거리며 손뼉을 짝짝 쳤다.
“궁지에 몰린 걸 축하하네, 하오마 교단 출신 자그룰라 모렌 박사. 이번에도 내 승리로군.”
당황한 모렌 박사의 얼굴이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폐, 폐하, 그건.......”
전력이 들통나면서 순간 충격을 받은 모렌 박사가 벌벌 떨기 시작했다. 교단 출신이라는 것을 속여 왔다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진다면 그간의 공훈은 물론이고 상급귀족으로 누려온 특권마저 모두 위기에 봉착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카렐은 별것 아니라는 듯 가식적으로 웃으며 손을 저었다.
“어쩐지, 그때만 해도 2류 의사들만 양산하던 콜로니 아카데미에서 자네 같은 석학이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 뭐, 놀랄 것 없네. 그 당시에 내로라하는 교단 의사들 사이에서 유전학자로 뽑혀가서 배울 정도였으면 자네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는 뜻이니까. 원래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만큼 가까운 사이가 또 있겠는가.”
황제의 능글능글한 위로에 모렌 박사는 일단 안심할 수는 있었지만 최소한 황제의 손아귀에 쥐였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카렐이 의자 등받이에 편히 기대앉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내 두 번째 할아버지의 캡슐이 최소한 교단에서 흘러든 것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하군?”
“.......그럴 겁니다.”
할 말이 없어진 모렌 박사가 거의 울먹이듯 대답했다.
“그런데, 당시 교단에서 훔쳐온 캡슐이 무얼 뜻하는지는 자네가 더 잘 알 텐데. 자네 역시 캡슐처럼 납치되지 않았던가.”
카렐의 여우몰이식 물음에 결국 굴복한 모렌 박사가 바닥에 꿇어앉으며 결국 속에 묻어놓았던 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정말 모릅니다, 폐하. 믿어주십시오. 당시에.......연구소를 습격했던 민병대의 멍청한 게릴라들은 캡슐에 써 있는 글씨도 제대로 읽을 줄 몰랐습니다. 그네들은 정말로 짐승 같았습니다. 연구원이건 아니건 살아있는 사람은 닥치는 대로 쳐 죽이고 돈이 될 만한 건 무조건 주머니에 챙겨 넣었습니다.”
“돈? 그네들이 습격했던 건 입실론을 납치하자는 것 아니었나?”
그간 ‘정의로운 저항군’으로서의 민병대의 모습만 상상했던 카렐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네들이 처음부터 입실론을 노리고 쳐들어왔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연구소를 약탈하러 왔다가 입실론의 미모가 워낙 빼어나서 욕심을 냈던 것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일단 연구소를 장악한 이후로는 아무도 그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캡슐은? 그건 누가, 왜 챙겼지?”
카렐은 무슨 이유엔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지만 일단 터져나오는 진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캡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생명이 든 캡슐이니 건드리지 말라고 호소했지만 그네들은 조그만 게 묵직하니 반짝이는 걸 보고는 은이 아니냐며 모조리 마대자루에 쏟아부어 버렸습니다. 그 중에는 일반인도 있었고, X도 있었고, S도 뒤섞여 있었지만 그 멍청이들이 목록까지 불태워 버려서 대부분이 나중에는 분류조차도 어렵게 되어버렸습니다.”
“게릴라들에게 끌려온 자네가 한 일은 그럼 그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캡슐부터 정리하는 일이었겠군?”
“그, 그렇습니다.......TSG 지도부가 그 가치를 깨달았을 때는 그들 기술로는 분류가 불가능해진 상황이라.......제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그 분류를 명했습니다.”
모렌 박사가 입술을 깨물며 마치 한숨처럼 대답했다.
“그때 가져온 캡슐이 모두 몇 개지?”
“정확히.......8,304개였습니다.
“내용물은?”
“각각에는 발생 직전의 배아 하나와 생식세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내 알기로 당시 TSG 민병대는 X를 합성할 능력 따위는 없었어. 내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카렐이 눈을 가늘게 뜨며 모렌 박사의 겁에 질린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5세대까지의 X는 민병대가 아니고 결국 교단이 만들었다는 말이겠지? 내 말이 맞나?”
“그렇.......습니다.”
“훔쳐온 캡슐들을 다 쓴 이후로는 ‘본전이 떨어졌으니’ 더 이상 생산할 수가 없었을 거야. 복제방지처리 때문에 생식세포가 있어도 합성은 불가능했겠지. 세나우스 2세 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체 기술로 6세대를 만들기는 했지만 이전 세대의 조악한 모방품에 불과했을 테고.”
“.......”
모렌 박사의 침묵은 곧 시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민병대의 X, 현재의 가디언들 역시 수명개조 기술처럼 옛 교단이 현재의 세상에 남긴 유산이었다.
“명색이 황제라는 나 역시 교단의 그림자 속에서 태어난 것이었다니.”
카렐은 굳어진 얼굴로 자신의 파란 가디언 팔찌, 그리고 뜨거운 피가 힘차게 흐르는 손등의 굵은 핏줄을 더듬었다.
모렌 박사의 애처롭기까지 한 시선을 잠시 노려보던 카렐이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내 두 번째 할아버지는 S였나? X였나? 아니면 일반인이었나? 자네가 직접 분류했으니 누구보다 잘 알겠지?”
“.......그건 저도 모릅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캡슐은 같은 곳에서 납품받은 공장생산품들이었고, 겉모양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선황께선 제가 지나치게 많이 아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합성을 맡기시고도 측근을 시켜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셨습니다.”
“후우......”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온 듯, 잠시 창밖을 내다보던 카렐은 책상 위에 잔뜩 쌓인 자료들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지금 이 문제에 달라붙어 끝장을 보고 싶었지만, 모렌 박사나 수나 마구스가 모든 것을 순순히 털어놓아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좀 더 정보를 모아야 하나.’
카렐은 일단 더 이상의 호기심을 접었다. 어쨌든 지금의 카렐에게는 황성의 무너진 성벽, 그리고 성 밖의 연합군이 더 다급한 문제였다. 카렐은 모렌 박사에게서 받은 파일을 다시금 들어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언제 유전자 보관실에 가 봐야 하겠다. 이 일이 끝나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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