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556화 (555/1,132)

< -- 556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

.

.

“출발!”

예르마크 경은 옆에 있는 나팔수에게 손짓을 보냈다. 가랑비까지 내리는 차가운 어둠 속을 울리는 낮은 나팔소리에 이번 사절단에 참가한 2백여명이 각자의 말 혹은 차량에 급히 올라탔다. 사절단의 의무대장인 페이 코다 박사, 아니 수나 마구스 역시 의무대 사병들과 함께 구호용품을 실은 화물차 짐칸에 기어올라 망토를 얼굴까지 푹 뒤집어썼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떨고 있는 수나 마구스의 모습에 당황한 예르마크 경이 부장을 손짓해 불렀다. 갑자기 흐려진 하늘에서는 때 아닌 겨울비가 가늘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봐, 코다 박사는 중랑장급이 아니었던가. 명색이 중랑장이 말도 없이 저게 뭔가? 비까지 오잖아?”

부마의 추궁에 부장이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저분은 평민 신분이라 말을 타는 건 법도에 어긋납니다.”

예르마크 경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어린 시절, 아버지 요아킴 경과 함께 말을 타고 단둘이 산책을 다니곤 했던 ‘페이 코다 박사’의 모습을 기억하는 예르마크 경에게 ‘계급제’라는 것이 뼈저리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승용차량에 타시라고 했지만 새 부하들 얼굴도 익힐 겸 저편이 편하다고 하셔서.......”

예르마크 경은 마지못해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연합군에 온통 포위당한 채 아직까지 일체의 협상을 거부하고 있는 플라칼 가 6만 대군의 숙영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예르마크 경을 선두로 2백여 사절단, 그리고 플라칼 가에 넘길 보급물자를 가득 실은 40여대의 화물차량이 그 뒤를 따랐다.

연합군 사령부에서 플라칼 가 숙영지까지는 걸어서도 고작 30분 정도면 도착할 거리였다. 게다가 플라칼 가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연합군의 일원이었던지라, 함께 가는 병사들의 표정에는 ‘사절단의 행차’다운 긴장감보다는 그저 가벼운 배치 이동 정도로 생각하는 가벼운 기분이 어려 있었다.

살을 에는 듯 차가운 겨울바람, 그리고 눈인지 비인지 분간못할 추적거리는 뿌옇고 습한 공기가 이 ‘사절단’의 주변을 어느새 완전히 에워싸고 있었다.

의무대의 사병, 사관들과 함께 화물차량 짐칸에 앉아있던 수나 마구스는 머리에 푹 쓰고 있던 베일을 천천히 들추고는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새 부단장님이시죠?”

차에 있던 군의관이 조심스레 물었지만 수나 마구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화물칸에 오른 의무대 장병들은 이 ‘상전’을 껄끄러워하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말을 건네 보려는 둘 중의 하나였지만 수나 마구스는 그들의 이 과도한 관심에 철저하게 무표정하게 응대할 뿐이었다.

“제 이야기 들으셨나요?”

군의관의 두 번째 물음에 수나 마구스가 보인 반응은 짧게 눈동자를 움직인 것이 전부였다. 상관의 이런 태도에 당황한 군의관은 결국 무안하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난 전투에서 라손이 전사하기도 했던 그 작은 언덕을 막 넘은 사절단 일행은 불빛이 휘황하게 켜진 플라칼 가 숙영지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정지! 정지!”

숙영지 입구에 도착한 예르마크 경이 손을 치켜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미 수백의 보병대, 그리고 기병들이 포진한 입구에는 그와 사절단 일행을 맞기 위해 적장자 헤즈 플라칼 경이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부마님.”

우산을 든 헤즈 경이 그 비둔한 몸으로 뒤뚱거리며 걸어와 예르마크 경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종장 카나르 경이 직접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내심 자존심이 상한 예르마크 경이 입가를 씰룩거렸지만 헤즈 경은 짐짓 모른 척 그가 이끌고 온 뒤의 사절단을 빙 둘러보았다. 미리 약속했던 대로, 무장병력은 예르마크 경을 호위하는 기병 십여 명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식량을 수송하는 사역병과 노예, 그리고 3백여명의 의료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의료진은 모르겠사오나.......”

“알고 있네.”

예르마크 경은 뒤따라온 수송대 장교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의 지시를 받은 수송대의 장병, 노예들은 타고 온 차량에서 일제히 내려서서 온 길을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번 사절단을 보내어 플라칼 가를 잡아두려는 베흔의 속내야 어쨌든, 그들이 이번에 싣고 온 이틀 치의 식량은 명목상 ‘인도적인 지원’이었다.

“차량을 안에 들여라! 전수검사 하는 걸 잊지 말고!”

떠나간 수송대의 사역병들을 대신해 플라칼 가의 사역병들이 대오를 맞춰 달려 나와 빈 차에 뛰어올랐다.

물품 전부를 검사한다는 ‘전수검사’라는 말에 예르마크 경이 다시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어쨌든 연합군과 플라칼 가는 당장이라도 전투를 벌일 수 있는, 팽팽한 긴장상태였고, 연합군이 인도적인 식량을 가장해 의심스런 물품이나 요원들을 잠입시킨다는 것이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어쨌든, 부대가 고립된 이후 거의 이틀간을 비상식량만으로 연명하며 본능의 극한까지 몰리고 있던 플라칼 가 장병들에게 이만한 선물은 없었다.

“41대로군요. 모두 식량입니까?”

헤즈 플라칼 경은 ‘고맙다’라는 공치사조차 생략한 채 사무적으로 물었다. 예르마크 경이 여전히 말 위에 앉은 채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35대는 식량이고 6대는 의약품일세. 이제 들어가도 되겠나?”

“예, 저를 따라 먼저 들어오십시오. 나머지 사절들은 저희 안내에 따라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뒤따라온 일행들을 잠시 돌아보았던 예르마크 경은 앞장서는 헤즈를 따라 숙영지 안쪽으로 말을 몰았다.

“수송트럭은 이쪽으로! 의무대 요원들은 차에서 내리지 말고 잠시 대기하십시오!”

예르마크 경이 멀어진 이후, 남은 사절단들에게 플라칼 가 근위병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주변 상황만 말없이 살피던 수나 마구스는 머리에 다시 베일을 눌러쓰고는 화물차 짐칸에서 재빨리 뛰어내렸다.

“이봐! 내리지 말라고 했잖아!”

성질을 버럭 내며 수나 마구스에게 달려들려는 근위병의 어깨를 누군가 거칠게 붙들었다.

“페이 코다 박사님이십니까?”

근위연대 중랑 계급장을 단 그 장교가 수나 마구스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수나 마구스는 대답 대신, 자신의 망토를 들추고 그 안에 있는 계급장과 이름표를 내보였다. 그의 신분을 확인한 그 근위장교의 눈이 반짝 하며 빛을 뿜었다.

“근위연대 본부중대장 후스 콘스탄츠 중랑입니다. 종장님께서 따로 모셔오라 명하셨습니다.”

그 근위장교는 주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가슴에 공손하게 손을 가져갔다.

“앞장서겠습니다.”

후스는 공식적인 임무를 처리하는 듯, 자연스럽게 수나 마구스를 이끌었다. 연합군 의무대 요원들 역시 의무대 책임자인 그에 대한 형식적인 접대려니 하며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수나 마구스는 카렐의 칙서와 위임장, 그리고 몇 개의 자료가 든 가방을 한 손에 들고 이 건장한 남자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반대편, 어둠 속에서 멀어져가는 연합군 특사 예르마크 경의 뒷모습을 처량한 시선으로 돌아보면서.

부마 예르마크 경이 플라칼 가로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베흔은 지상에 있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겨울비가 듣는 관산수 강물을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전에는 매일 보면서도 몰랐는데, 지금 보니 관산수도 강폭이 보통이 아니군.”

베흔은 함께 배에 오른 타크마에게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파란기스 호하고 만나는 하류 강폭은 욱리하나 별반 다를 것도 없죠.”

타크마가 손에 든 시미터의 날을 갑판 한쪽에 썩썩 문질러 갈며 대답했다.

베흔과 타크마, 그리고 이들을 따르는 200여 가디언들은 관산수를 타고 황도 아케메니아로 다가가는 타르서스 선적의 동맹군 수송선에 올라 있었다.

이 배 앞에는 황도로 가는 ‘진짜’ 동맹군 수송선단이 위치해 있었지만 어차피 그들도 타르서스에서 함께 온 배들이다보니 그 누구도 행렬 마지막에 자리잡은 이 배를 딱히 의심하지는 않았다.

근위대의 이번 가디언 기습부대는 배를 지키는 타르서스 직할군 병사들---아크반 가문에서 차출된---의 묵인 하에 갑판에 올라탔고, 이젠 아케메니아 포구와 황성의 남서문을 통해 내부에 진입하는 것만 남아있었다.

“10분 후에 검문이 시작되니 그 전에 보트를 내려드리겠습니다. 이건 디브 도련님이 알려주신 황궁 지하 행 비밀 수송선 항로와 통과시각입니다. 30분 후에 통과하는 이 지점에서 배가 속도를 크게 늦출 테니 쉽게 승선하실 수 있을 겁니다.”

선장이 베흔에게 지도를 내밀며 가장 적당한 무단 승선 장소까지 친절하게 표시해 주었다.

“알았다. 보트가 준비되면 말해.”

베흔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황궁으로 직접 들어가는 수송선을 가디언 7명과 함께 ‘잠시 얻어 타고’ 황궁 지하로 바로 잠입할 예정이었다.

그는 깊은 심호흡을 하며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을 뿜고 있는 아케메니아 포구의 등대를 말없이 응시했다. 각각 다른 색의 빛을 뿜는 세 개의 등대 사이로 황성 남서쪽, 아케메니아 포구를 이루는 2개의 거대한 도크가 위치하고 있었다.

이 3개의 등대 중 중앙의 제일 높은 소위 ‘수비탑’은 포구로 들어서는 배를 인도하고, 동시에 포구의 경비병들이 주둔하는 핵심 시설이었다. 그렇다보니 이번에 포구에서 반란을 일으키면 가장 먼저 접수해야 할 핵심시설이기도 했다.

그 수비탑을 경계로, 북쪽에 자리잡은 제1도크는 동맹군이 강제로 억류한 민간선박의 정박을 위해 폐쇄된 상태였고, 군용인 남쪽 2도크만이 사용되고 있었다. 타크마가 이끄는 ‘공격조’ 200여 가디언들이 진입할 곳도 바로 2도크였다.

선단의 첫 번째 선박이 검문소에 접어들면서, 뒤따르던 다른 배들도 차례대로 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베흔이 탄 마지막 배 역시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도크의 출입은 간단한 절차가 아니었다. 도크의 거대한 수문을 열고, 수비탑 꼭대기에 있는 등대의 인도를 받아 오직 정해진 항로로만 나아가야 했다. 행여 인도를 벗어난다면 쇠사슬과 가변식 수중 장애물에 걸려 좌초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배 옆으로 내려지는 보트를 지켜보던 베흔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디브인가 저 새끼 잘 감시해.”

베흔이 타크마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배신한 놈은 언제든 다시 배신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라.”

“알고 있습니다.”

타크마는 배 한쪽에 죄인처럼 웅크려 떨고 있는 그 작은 남자를 슬쩍 흘겨보았다. 처벌을 피해 직할군에서 도망쳤던 저 불쌍한 남자는 이제 자신이 그리 힘들게 도망쳤던 황도에 다시 발을 들여놓아야 할 처지였다.

“카타콤베 안쪽은 통신이 되지 않으니 그때까지는 모두 네 책임이다.”

베흔은 시계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위장포와 장비들을 꼼꼼히 챙겼다.

“황궁 지하에서 3시에 뵙겠습니다.”

“후훗. 그래, 황궁에서 보자.”

타크마에게 기분좋게 손을 흔들어 보인 베흔은 배 옆에 드리워진 로프를 단단히 붙들고 물 위에 띄워진 보트로 재빨리 내려갔다. 베흔이 탄 작은 보트는 다른 배들의 시선을 피해 조금씩 굵어지는 빗속을 뚫고 북쪽, 황궁이 있는 곳으로 조금씩 멀어져갔다.

“이젠 우리 차례인가.”

베흔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타크마는 갑판 제일 뒤쪽에 쌓여있는 5개의 은색 컨테이너로 시선을 돌렸다.

“괜찮을까요?”

“걱정 마.”

부장의 물음에 타크마가 호탕하게 웃음을 지으며 컨테이너 문을 확 열었다. 식자재가 가득 든 이 컨테이너 안쪽에는 많게는 50명부터 적게는 20명 정도의 사람이 숨을 수 있는 공간이 미리 마련되어 있었고, 문에는 안쪽에서도 열 수 있도록 개폐장치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하역장 검문 담당관이 우리 편이니까 별 문제없어. 지금까지 아무 문제도 없으니 일단 계획대로 실시해.”

컨테이너 안에 들어선 타크마는 포구의 높은 수비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고는 문을 힘껏 닫았다. 황도의 운명을 가를 마지막 전투가 이제 그와 부하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