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58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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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투명한 실크 케노피에 가려진 침대 위로 엷지만 뜨거운 숨결이 피어올랐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말없이 누워있던 카렐은 자신의 가슴 위에 한쪽 팔을 힘없이 걸친 채 가는 숨소리를 내고 있는 이 젊고 아름다운 남자를 문득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을 의식한 이라즈는 담요 속으로 얼굴을 반쯤 파묻으며 황제의 팔에 느껴질 듯 말 듯 가벼운 입맞춤을 청했다. 순간, 또다시 움찔한 카렐이 턱을 치켜들며 이를 악물었다.
“폐하?”
카렐이 쓴웃음을 지으며 불안에 가득 찬 이라즈의 뺨을 짚었다. 그제야 안심한 이라즈는 조금 전 이미 몇 번이나 안겼던 카렐의 가슴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내 날이 밝는 대로 시종장에게 지시할 테니 돌아가거든 숙소 옮길 채비를 하도록 해라.”
이라즈가 침을 꿀꺽 삼키며 황제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귀인이 묵는 처소는 142층에 따로 있다. 지금 묵는 곳보다 훨씬 크고 안락할 테고, 황궁 시설물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지. 시종들만 동반한다면 바깥출입도 자유로워질 거고.......”
조용히 말을 잇던 카렐은 케노피 밖에 서 있던 카토가 할룩스를 받아드는 모습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폐하, 잠시......”
카토의 눈짓을 받은 카렐은 무겁게 축 늘어진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그는 따라 일어나려는 이라즈에게 그대로 있으라고 손짓하고는 가운을 주섬주섬 챙겨입었다.
“무슨 일이냐.”
케노피를 걷고 나선 카렐은 잔뜩 굳은 표정의 카토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빨리 준비를 갖추셔야 하겠습니다, 폐하.”
카토가 내미는 낡은 튜닉을 쳐다보며 카렐은 바로 상황을 깨달았다.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는 이라즈를 힐끗 돌아보았던 카렐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가운을 다시 벗어던졌다.
“빌어먹을.......”
“북벽으로는 호지 가, 동북벽으로는 세닉 가, 동벽으로는 델루지 가입니다. 집결중인 병력 수로 보아서는 총공세입니다.”
“세닉 가?”
카렐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지금 몇 시냐?”
“새벽 2시입니다. 일출 예정시각까지는 4시간 45분 정도 남았습니다. 30분 이내에 공격이 개시될 것 같다는 총리 각하의 연락입니다.”
튜닉을 입는 카렐의 손길이 더 다급해졌다. 침실 중앙의 욕조 겸 연못에서 간단히 몸만 씻어낸 그는 긴 머리칼 위에 검은 머리 밴드를 급히 묶고 칼을 집어 허리에 찼다. ‘나즈라의 검’이 북부가 멸망한 291년 이후 처음으로 다시 실전에 나가는 순간이었다.
“한 숨도 못 주무셨는데 괜찮겠습니까?”
“그럼 지금 누워 잘까?”
카렐의 물음에 카토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라즈 경은 어쩔까요?”
“일단은 숙소로 내려가 기다리고 있으라고 해야겠지. 다음 조치는 일단 큰불을 끈 후에 해야 할 테니.......시종장에게는 내일 아침에 내 직접 말하지.”
“알겠습니다. 시종들을 불러와서 숙소로 데려가라고 하겠습니다.”
무장을 갖추는 황제를 걱정스런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는 이라즈를 돌아보며 카렐이 억지스러우나마 눈가에 잠시 웃음을 지었다.
“아침에 돌아오마.”
3개나 되는 칼을 허리에 차고 마지막으로 두툼한 망토를 어깨에 걸친 카렐은 침실을 막 나서려다 말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이 큰 침실에 마지막으로 남은 이라즈는 고개를 숙인 채 죄없는 입술만 꼭 깨물고 있었다.
“잠깐.”
침대맡에 다시 다가간 카렐은 침대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그를 한 팔로 꼭 안아주었다. 둘의 입맞춤에는 이런저런 구차한 설명도, 듣기 좋고 그럴싸한 배웅의 말도 없었지만 그 짧은 순간 오간 눈빛에 대신 모든 것이 다 담겨있었다. 그의 차가워진 이마에 뺨을 한 번 부드럽게 부빈 카렐은 그대로 휙 돌아서며 빠른 걸음으로 침실을 나섰다.
침실 밖에서 미리 기다리던 수십의 근위 가디언들, 참모들이 출정하는 황제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던 카렐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큰 창 너머, 황도의 성벽 밖으로 보이는 플라칼 가 숙영지를 응시했다.
“비가 거세질 것 같군, 카토.”
“예보관들 말이 적어도 3일간은 비가 계속될 것이라 합니다. 화공을 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 어느 쪽에 이득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니사 라말라 박사를 불러와라. 이번엔 내 곁에 함께 있어야 할 것 같다.”
“몸이 안 좋으십니까?”
“그건 아냐.”
라말라 박사는 민간인인데.......폐하와 함께 움직이는 데는 도리어 걸림돌이.......”
“나도 아니까 당장 데려오기나 해라. 내 다른 이유가 있으니.”
카렐은 카토에게 별다르게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냉담하게 대답했다. 물론 카토 역시도 이번 황성의 전투에서 황제가 손에 쥔 필살의 패인 수나 마구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는지, 그에게 어떤 역할이 주어져 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탑 15층에서 급히 달려 내려온 유시프 장군은 1층에서 서너 명의 병사들이 엘리베이터를 ‘고치고’ 있는 황당한 광경과 마주쳤다. 작업을 감독하던 하급 장교가 그 높은 꼭대기에서 두 다리로 달려온 사령관의 모습에 놀란 듯 쭈뼛거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큰 고장이 아니라서 바로 고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위에 있는 기간요원들에게 통지도 하지 않고 밑에서 네놈들 멋대로 이곳 엘리베이터를 주물럭거리고 있었냐?”
유시프 장군은 내심 불길한 기분이 퍼뜩 들었지만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빈정거리듯 물었다. 이 수비탑은 급조된 사령관실 외에도 포구의 도크를 제어하는 관제소가 위치해 있었고, 보안국에서 파견된 관제요원, 엔지니어, 헌병까지 합치면 거의 200여명의 기간요원이 상주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빨리 끝날 것으로 알았는데 생각 외로.......”
“당장 손 떼라.”
유시프 장군이 버럭 화를 내며 반쯤 뜯어낸 판넬에 막 손을 대려는 병사를 거칠게 밀어냈다. 순간, 그들은 이 상관에게 갑자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우리가 무슨......”
항명이 벌어지기 직전, 그들은 유시프 장군을 뒤따라 달려 내려오는 보안국 요원들의 기척에 얼른 입을 다물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이놈들입니까.”
당황한 얼굴로 돌아나가려던 그들의 앞을 딱 막아선 건 살벌한 이미지의 검정 코트를 차려입은 50여명의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들이었다. 페나페가 조금 전 남서문에서 불러들인 ‘보안국 헌병대’ 요원들이었다.
충성심을 철저히 검증받은 엘리트 시민, 드물게 가디언 출신인 그 병사, 아니 요원들의 임무는 상황에 따라 ‘황제를 위한 그 어떤 일이든 무조건’ 수행하는 것이었다.
“보안국 헌병대 4팀장 사에나 쉐너 중랑입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 표독스런 인상의 여자 헌병 장교는 비에 젖은 우의와 긴 머리칼을 툭툭 털며 유시프 장군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형식적으로 경례를 올렸지만 콧대높은 보안국 헌병들이 다 그렇듯, 절도는 있지만 공손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시프 장군은 ‘저 여자는 표정이라는 것도 없나’ 싶었지만 일단은 잠자코 있기로 했다.
“쉐너? 슈엘러 경의 가문?”
서부 출신답게, 상대의 성(姓)과 출신 신분에 대한 호기심부터 보였던 유시프 장군은 살짝 찡그리는 그 여자의 눈가에서 자신의 질문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오만함 혹은 자신감이 넘치는---어쩌면 헌병장교로는 꽤 잘 어울릴--- 여자의 인상만으로도 그 귀한 출신은 충분히 배어나고 있었다.
‘쉐너 가(家)’는 가진 힘에 비해 ‘품격’은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는 자이센 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중앙귀족 제일의 역사깊은 명문가였다. 이 가문은 오르마즈의 전임 민병대 원수, 그리고 이후 총리까지 역임한 슈엘러 쉐너 경의 출신가문이었고, 장관급 대신만 해도 3명, 6품 이상의 당상관은 굳이 헤아릴 필요도 없이 많이 낸 곳이었다.
이 가문은 원래는 베흔과 더 친하기는 했지만, 슈엘러 경의 여동생이 페로와 손을 잡고 사치와 나태함에 찌든 오빠를 몰아낸 이후, 자이센 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두 가문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준 자이센 가 수석 가디언 카렐이 있었다.
물론 그들이 이번에 카렐 편에 선 것은 중앙귀족가로서 ‘중앙세력 강화’라는 노선에서 얻는 이득이 더 커서일 뿐, 다른 모든 결정이 그렇듯 의리 따위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떻게 된 겁니까, 장군님? 직할군 헌병들은 어쩌시고 왜 저희에게......”
그 장교는 도망치려는 병사의 머리채를 거칠게 붙들어 바닥에 동댕이치며 유시프 장군에게 사무적으로 물었다. 남서문에서 급히 달려온 듯, 그는 물론이고 뒤따라온 보안국 헌병들 모두가 젖은 우의를 입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낀 그들은 등에 지고 온 작은 석궁을 일제히 뽑아들어 안전장치를 풀었다.
유시프 장군이 시계를 보며 급히 대답했다.
“이 새끼들 수상쩍으니 당장 잡아들이고, 허가받은 기간요원 외는 이 탑에 출입을 엄금해야겠다.”
“알겠습니다. 죄목이 뭡니까.”
“지금 그게 급한 게 아냐. 나중에 말해 줄 테니.......”
유시프 장군의 조금은 애매한 지시에 쉐너 중랑이 잠시 눈가를 씰룩거렸지만 그는 다급한 유시프 장군의 발목을 절차 타령 따위로 붙들지는 않았다.
“너희, 이놈들을 남서문 유치장에 쳐넣어라.”
쉐너 중랑의 눈짓에 헌병들이 그 수상쩍은 4명의 직할군 장병들을 바닥에 질질 끌고가기 시작했다.
“제기랄.”
유시프 장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무언가 미심쩍은 상황이었지만, 직속병력이 보안국 헌병들의 손아귀에서 거칠게 다루어지는 광경이 유시프 장군에게 그다지 편안치만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이 여자를 믿고 뭘 맡겨도 되려나.’
유시프 장군은 사에나 쉐너 중랑을 걱정스런 눈길로 잠시 돌아보았다. 선입견 때문인지, 이 명문가 출신의 콧대 높은 여자가 ‘거칠고 잔혹한 보안국 일을 제대로 할까’ 하는 묘한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일단 믿어 봐야지.’
이런저런 잡생각을 일단 떨어낸 그는 쉐너 중랑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간요원들은 이 탑을 폐쇄하고, 너희는 내 뒤를 따라와라. 이번에 들어온 선단이 무언가 수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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