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64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
.
.
“응?”
다시 칼을 치켜들던 드루그는 뒤를 휙 돌아보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검은 재킷의 여자가 또다시 석궁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앗!”
드루그는 칼을 휘둘러 볼트를 쳐내려 했지만 이미 볼트가 하나 박혀 둔해진 오른팔, 그리고 육중한 양손검이 문제였다. 목을 뒤로 꺾으며 볼트를 피하려던 드루그는 중심을 잃으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새, 중상을 입은 유시프 장군이 피투성이가 된 채 엉금엉금 기어 부하들 중간으로 다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퇴각! 퇴각! 수비탑 안으로 물러난다!”
쓰러진 유시프 장군을 대신해 사에나가 팔을 휘두르며 퇴각령을 내렸다. 직할군 사관들은 이미 절반 이상이 쓰러졌고 헌병들도 적어도 20명 이상 죽었거나 부상을 입어 신음하고 있었다. 볼트가 다 떨어진 텅 빈 석궁을 등에 짊어진 그는 피가 계속 배어나는 팔을 꽉 붙들고 수비탑을 향해 비틀거리며 급히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획대로 적들이 뒤를 깊숙이 쫓아 들어오는지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사이, 지원군을 태운 수송선은 유시프 장군의 조금 전 명령대로 수비탑 옆 대신 방파제 중간에 상륙하고 있었다. 지금껏 굵고 큰 목소리는 거의 내지 않았던 사에나였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그는 칼을 번쩍 치켜들고는 지금껏 목구멍 속에 감춰두었던 굵고 우렁찬 목소리를 내질렀다.
“지원군이다!”
마찬가지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드루그는 더 이상 앞장서는 것을 포기한 채 부하들이 싸우는 모습을 일단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청천벽력같은 부관의 보고가 그의 귀를 때렸다.
“적 경보병들이 수비탑에 내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는 볼트를 빼 주려 다가오는 의무병을 거칠게 밀어내며 자리에 우뚝 일어섰다. 부관의 말대로, 적 지원군을 싣고 온 배는 동료들이 필사의 항전을 벌이는 수비탑 대신 공격하는 근위대의 중간 허리인 방파제로 바로 접근하고 있었다. 수비탑을 공격하기 위해 방파제를 따라 최대한 깊숙이 들어온 드루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그게 데려온 근위대들은 조금 전 상륙한 지점에서부터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이곳 수비탑까지, 마치 개미 군단이 전진하듯 일렬로 죽 흩어져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상륙인원을 정비하지도 않은 채 ‘상륙하는 대로 무조건 달려와 합류해라’라고 명령했던 드루그의 허를 찌른 셈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어디 놈들이야!”
“휘장을 보아 아메샤 스펜타의 아샤 연대 같습니다.”
부관의 대답에 드루그가 이를 갈았다. 불호령을 내릴 베흔의 얼굴이 어느새 그의 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아메샤 스펜타의 광신도들은 발판을 거는 것을 차분히 기다릴 새도 없이 배 옆에 케이블을 걸고 앞다투어 땅에 마구 뛰어내리고 있었다.
“저 위에 근위대들이다!”
눈이 벌개진 아메샤 스펜타 지원군들은 눈 깜짝할 새 방파제 중간으로 돌격해 올라와서는 무질서하게 교전 지역으로 달려오는 근위대들의 중간을 바로 차단해 버렸다. 부대가 두 토막나면서 뒤가 끊긴 드루그에게는 고작 1백여 병력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 모두는 근위대의 상륙 타이밍을 교묘하게 비껴내고 배를 들여보낸 유시프 장군의 임기응변 때문이었다.
“별 수 없어! 무조건 수비탑을 빼앗는다!”
순식간에 전세가 뒤집어지면서 궁지에 몰린 드루그는 극단적인 선택에 몰리고 있었다.
“제기랄! 앞뒤를 모두 챙길 수는 없다! 저놈들은 후속부대에게 맡겨두고 우린 수비탑 안쪽으로 계속 적을 밀어붙인다! 수비탑만 우리가 접수하면 저놈들은 어차피 독안에 든 쥐가 된다!”
부대를 일단 둘로 쪼갠 드루그는 부상으로 성치 않은 몸을 끌고 수비탑으로 내달았다. 후속부대가 차단된 그에게는 이제 돌아갈 길도 없었다. 하지만 수비군들은 수비탑 외곽은 포기한 채 안쪽으로 모두 도망쳐 출입구 바로 앞에 이미 두 번째 방어선을 만든 후였다. 하지만 뒤늦게 퇴각하는 수비병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탑의 문을 닫을 여유조차 없었다.
그들을 향해 근위대들이 도끼눈을 부릅뜨고 우루루 달려들었다.
“저기만 뚫으면 된다!”
드루그의 명령을 받아 기를 쓰고 달려드는 1백여 근위대원들의 코앞으로 다시금 볼트 세례가 무섭게 날아들었다. 직사로 날아드는 그 짧은 사격은 갑주를 챙겨입은 정규군들에게는 그다지 위협적인 공격이 아니었지만 갑주가 없는 가디언들의 발을 잠시나마 묶기에는 충분했다. 그렇다보니 평소 같았다면 돌격의 선두에 섰을 가디언들이 도리어 뒤에 처질 수밖에 없었다.
“돌격! 안으로 진입해!”
그렇게 수비탑으로 돌격한 1백여 근위대는 수비탑 문을 빽빽하게 몸으로 막아선 수비군들의 견고한 스크럼을 마찬가지로 몸으로 힘껏 들이받았다.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고 가디언들에게 짓밟힌 병사들의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가 찢어지듯 울리며 포구를 지키기 위한 이 마지막 항전에서 절정을 수놓았다.
“버텨! 버텨야 한다!”
수비탑 옥상의 관제요원과 기간요원들까지 모조리 이곳에 내려와 조금씩 힘에 밀려나는 동료 수비군들의 등 뒤를 어깨, 팔다리로 받치며 악을 썼다. 서로를 향해 몸으로 밀어붙이는 이들 사이에서는 이제 칼싸움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방패, 그리고 어깨와 가슴을 맞댄 채, 양쪽 합쳐 2백이 넘는 장정들이 서로를 향해 필사적으로 몰아붙이는 목숨을 건 처절한 힘싸움만이 있을 뿐이었다.
“한 발도 물러서면 안 된다!”
사에나의 높고 날카로운 외침, 그리고 드루그의 굵고 거친 고함소리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부하들의 밀고 밀리는 힘싸움을 따라 출렁거렸다. 뒤에서 밀어붙이는 동료, 그리고 앞에서 몰아붙이는 적들 사이에서 결국 중심을 잃은 몇몇 병사들이 몸이 낀 채 살려달라며 비명을 질렀지만 어차피 물러나거나 주저앉는 건 죽음을 뜻했다.
“밀립니다!”
보안군 헌병들이 고개를 저으며 악을 썼다. 숫자로는 수비병들은 근위대나 엇비슷했지만 근위대에 속한 가디언들이 조금 더 많아서인지, 팽팽한 힘싸움은 조금씩 수비탑 안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다 나와! 저놈들을 밀어내란 말이다!”
사에나가 뒤에서 치료받고 있던 부상자들, 그리고 불안한 마음에 전투에 동원하지 않았던 직할군 사병들까지 멱살을 잡아 거칠게 끌어내며 필사적으로 팔을 저었다. 밀어붙이는 수비병들의 숫자가 다시금 늘어나면서 이번에는 방향이 조금씩 바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빗물 때문에 진창이 져 미끄러워진 바닥까지 밀려나면서, 근위대들은 점점 더 불리해져갔다.
“더! 더!”
귀에 거슬릴 정도로 높은 사에나의 목소리에 병사들이 온 힘을 다해 적들을 밀어붙였다. 앞쪽에 있던 병사들의 신음소리,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외침과 동시에 그 팽팽하던 긴장은 뒤로 우루루 무너지는 근위대 병사들과 함께 깨져 날아갔다. 부상을 입은 몸으로 부하들의 뒤를 받치고 있던 드루그 역시 중심을 잃고 바닥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우아악!”
힘에 밀려난 100명이 넘는 근위대 병사들이 뒷사람의 몸 위, 혹은 빗물이 흥건히 고인 더러운 바닥에 볼썽사납게 나뒹굴었다. 쓰러진 그들의 머리 위로 기세등등해진 수비병들의 칼, 도끼, 심지어 발길질까지 일제히 내리꽂혔다.
“대장! 대장!”
부장들이 달려와 병사들 사이에 깔려 허우적거리던 드루그를 끄집어냈다. 더러워진 몰골로 엉금엉금 기어나온 드루그는 순식간에 도살장이 되어버린 수비탑 문 앞을 돌아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 안 됩니다! 일단 물러나 재정비해야 합니다!”
“어디로! 뒤는 이미 적들이 막았는데!”
드루그가 고개를 거칠게 저으며 신경질을 부렸다. 아메샤 스펜타가 육지와 연결된 방파제를 막고 있는 이상, 최소한 육로로 물러나는 건 불가능했다.
“일단 물로 뛰어들어 헤엄쳐서 갈 수 있습니다! 전체병력은 우리가 압도적이고 포구는 아직 우리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작 100명 때문에 대장이 여기서 목숨을 걸 이유가 없습니다! 일단 도크로 물러나 빨리 3차 공격을 준비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드루그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빗속의 물을 돌아보며 이를 뿌득 갈았다. 부장들의 말처럼, 지금의 병력으로는 어차피 수비탑을 차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수비병들에게 짓밟혀 죽어가는 병사들을 마지막으로 돌아보고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드루그, 그리고 그를 따르는 몇 명의 부장들은 수비군들의 관심이 쓰러진 병사들에게 온통 쏠려있는 사이, 적의 눈을 피해 물로 뛰어들었다.
치욕스러웠지만, 이제 일단 물러나 재공격하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지옥같은 시간, 수비군에게는 시로의 지원군을 기다려줄 수 있는 천금같은 시간이 또다시 생기게 되었다.
수비탑에 대한 반란군의 1차 공격, 그리고 뒤이은 근위대의 2차 공격은 어렵게 막아냈지만 이 상태로 오래 버틸 수 없음은 이곳의 수비병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의 지휘관인 유시프 장군이 탑 꼭대기로 옮겨진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무엇 때문인지도.
“곧 후송되실 겁니다.”
직할군 부사령관이며 유시프 장군의 오랜 벗 페나페 오난 장군이 죽어가는 그의 손을 꼭 쥐며 억지미소를 지었지만 스스로의 운명을 이미 예감한 유시프 장군은 도리어 평온한 표정이었다. 깨진 머리와 온몸의 상처에서 계속 흘러내리는 피, 그리고 드루그에게 짓밟혀 부서진 가슴은 가늘게 이어진 그의 생명줄을 마지막으로 끊을 단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 아내하고 아이들은 무사할까.......타르서스에 있는데.......”
유시프 장군은 역류해 오른 침과 피를 옆으로 뱉어내며 온몸을 가늘게 떨었다.
“걱정 마십시오. 상께서 알고 계시니 틀림없이 지켜주실 겁니다. 그러니 가족들은 걱정 마시고......”
페나페는 유시프 장군의 목에 걸려있던 가족사진이 담긴 로켓을 그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그의 숨결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음을 깨달은 오난 장군이 군의관을 찾아 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당장 치료가 필요한 중상자만 50명이 넘었지만 군의관은 지원군과 함께 온 1명뿐이었고, 설사 의사가 곁에 있었다 해도 관제실의 비상약품은 이미 바닥이 드러난지 오래였다.
“황상께서 살려주신 값은 했군.......자네도 잘 했네.”
유시프 장군은 맞쥔 페나페의 손등을 피가 날 만큼 꽉 붙들며 다시 헛웃음을 지었다.
“모두 장군님의 공입니다. 폐하께서 큰 상을 내리실 것이니.......”
페나페 역시 그의 손등을 두드려주며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난 전투에서 부대원이 저지른 한심한 잘못은 지금껏 유시프 장군, 그리고 오난 중랑장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젠.......모두 용서받을 수.......있겠지?”
유시프 장군은 관제실 창밖을 내다보며 침과 피를 힘겹게 삼켰다. 그는 어색하나마 눈웃음을 지으려 했지만 그의 몸은 더 이상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미세한 경련과 함께 떨리던 그의 눈꺼풀은 결국 더 이상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후우.......”
오난 중랑장은 힘없이 처지는 상관의 손을 두 손바닥 안에 꼭 모아쥐며 그의 가슴에 천천히 얼굴을 묻었다.
“편히, 편히 가십시오.......다 갚고도 남으셨으니.......”
오난 중랑장이 울먹이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타르서스 직할군의 마지막 사령관이며 서부 출신의 동맹군 장군이던 수레드 알 유시프 장군은 사형장에 치욕스럽게 바쳤어야 할 그의 목숨을 이렇게 ‘전사’로 대신 남길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