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66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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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륙한 근위대는 1천 명이 고작이다. 반란군들까지 합쳐도 1천5백이 전부다.”
시로가 눈물을 애써 참으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2대대는 나를 따라 수비탑을 탈환하러 간다! 나머지 대대는 포구를 탈환하고 근위대를 쳐라.”
시로의 명령을 받으면서, 둘로 갈라진 선단은 각각 수비탑, 혹은 포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시로도 수비탑의 수비군이 이미 ‘끝장났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수비탑으로 가는 것은 이미 다 죽어버린 수비군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닌, 적들이 도크 문을 열고 배들을 훔쳐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5천이나 되는 병력이 들어온 이상, 이젠 피의 복수만이 남아있었다.
“수비군들의 피를 헛되게 하지 마라!”
뱃머리에 선 시로가 상륙을 기다리며 악 소리와 함께 기세를 드높이고 있는 아메샤 스펜타 전사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수비탑 주변에 흩어진 전우들의 처참한 시체가 가까워올수록, 아메샤 스펜타 전사들의 광기어린 함성은 더더욱 커져갔다. 바다를 새카맣게 뒤덮고 몰려오는 선단에 놀란 근위대 병사들이 다급하게 방어진형을 짜려 했지만 그 숫자에서부터 압도적이었다.
“내려! 내려!”
극도로 흥분한 아메샤 스펜타의 병사들은 미처 정지하지도 않은 배에서 물로 무작정 뛰어내려 물가에 흩어진 채 조각조각나 있는 보안국 헌병들의 무수한 시체를 뛰어넘어 돌진하기 시작했다. 큰 도끼를 어깨에 멘 시로가 악 소리를 지르며 앞장서자 뒤따르는 병사들 역시 그에 질세라 쩌렁쩌렁한 고함으로 비 내리는 수비탑 부근을 울렸다.
“다 죽여!”
수비탑에 있던 5백여 근위대들, 반란군들이 그들을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사방에서 울리는 찢어지는 고함소리와 함께, 그들의 허술한 대오는 아메샤 스펜타의 돌격에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2번 도크가 열립니다!”
막 근위대를 돌파한 시로를 향해, 병사 한 명이 북쪽의 2번 도크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그곳에는 그간 동맹군들이 억류해 온 수백 척의 선박들이 갇혀 있었다. 저 문이 열린다면 그 배들이 연합군 쪽으로 빠져나갈 테고, 저 배를 타고 온 어마어마한 연합군 병력이 다시 이 포구에 재반격을 가할 터였다.
“어떤 새끼인지, 갈가리 찢어주마.”
시로가 침을 퉤 뱉으며 수비탑에 뛰어들자, 20여명의 가디언들, 그리고 백여명의 보병들이 그의 뒤를 급히 따랐다.
“엘리베이터는 꺼졌습니다! 수비군들이 일부러 부순 모양입니다!”
병사 한 명이 조종 판넬이 박살나 있는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문에 튀어있는 어마어마한 핏자국, 그리고 그 앞에 뒤엉켜 있는 십여 구의 난자당한 시체가 이 하찮은 기계를 둘러싸고 벌어졌을 처절한 사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상관없어!”
시로가 바로 계단으로 뛰어들었다. 거의 15층 높이까지 이어져 있는 긴 나선계단 역시 중간중간 뒹굴고 있는 수비군, 혹은 근위대 장병들의 시체와 끈적하게 번진 피로 발을 딛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시로와 그를 따르는 가디언들은 몇 칸씩을 뛰어넘으며 이 계단을 쉼 없이 후다닥 뛰어올랐다. 2번 도크의 거대한 출입문이 열리기 전에 관제실을 다시금 장악해야 했다.
“저기다!”
선두에서 달려 올라온 시로가 탑 꼭대기의 단단한 금속제 문을 가리켰다. 그 금속제 문에도, 끔찍한 사투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안에서 잠겼던 문을 억지로 잡아 뜯었는지, 문의 손잡이 부분은 절단기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있었고, 문의 나머지 부분도 이미 절반 가까이 부서져 있었다.
“적들은 잠글 수가 없었겠군.”
시로가 붉어진 눈을 부릅뜨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잠긴 문을 뚫고 들어가느라 문의 시건장치가 박살이 나면서, 정작 적들은 시로의 일행을 막기 위해 문을 또다시 잠글 수는 없게 된 셈이었다.
정 많던 평소의 모습답지 않게 격앙된 시로는 오늘 완전히 야수로 돌변해 있었다.
“제기랄. 결국은 저 배신자 새끼하고 싸워야 하나.”
관제실에 들어온 시로를 맞아준 건 누군가 굵은 목소리로 지껄이는 욕 한 마디였다. 수비탑 옥상, 관제실 안에는 오난 중랑장의 부서진 머리를 움켜쥔 드루그, 그리고 15명 정도의 근위대 가디언들이 지치고 피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네가 죽였냐?”
시로의 물음에 드루그는 손에 든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동댕이쳤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머리가 떨어져나간 오난 중랑장의 시체는 관제실 정면, 등대의 인도등을 조종하는 장치를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 움켜쥔 채 제어판 위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피와 으깨어진 뇌수로 범벅이 된 제어판은 그의 최후가 용감했지만 얼마나 끔찍했는지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조금 전, 불이 꺼지던 그 순간이 그에게도 마지막이었을 터였다.
시로가 이를 드러내며 도끼를 어깨 위로 치켜들었다.
“수다 떨면서 시간 낭비할 생각 없다. 이 까마득한 꼬맹이야.”
평소 같았다면 근위대 후배에게 투항부터 권고했을 시로였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그리고 드루그 역시 그에게 겁먹을 애송이가 아니었다. 지휘력이라면 몰라도, 최소한 1대1 싸움이라면 근위대에서도 최고수준으로 꼽히던 그였다. 그는 실내에서 불리한 양손검을 내던지고 장검과 손도끼를 각각 양손에 뽑아들었다.
“너 같은 꼬맹이놈하고 놀 시간 없다니까!”
단번에 목을 쳐 버리겠다는 생각에 거세게 돌진하던 시로는 자신의 거친 도끼질을 능숙하게 쳐낸 드루그가 왼손으로 휘두르는 손도끼에 깜짝 놀라며 재빨리 몸을 틀었다.
“읍!”
‘경험 짧은 특등급’이라는 생각, 그리고 당장 쓰러뜨려야 한다는 다급함에 대한 대가는 그의 왼쪽 날갯죽지에 남은 긴 칼자국이었다.
‘양손잡이? 왼손잡이?’
시로는 상대의 왼손으로 휘두른 도끼질이 오른손과 맞먹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디언 중에 양손잡이가 꽤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조페처럼 양손에 하나씩 무기를 쥐는 것이 보통이었고, 드루그처럼 큰 양손검을 쓰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드루그는 시로에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드루그는 왼손의 손도끼를 앞세우고는 당황하고 있는 시로에게 바로 돌격했다.
시로는 그의 빠른 손도끼를 쳐내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순간, 그보다 조금 둔한 드루그의 오른손 장검이 옆을 스쳤다.
“아니면......”
드루그의 오른팔 움직임에서 미세한 문제점을 발견한 시로는 그제야 상대가 왼팔을 주로 쓰는 이유를 깨달았다. 드루그의 왼팔이 유달리 강력한 건 그의 근력이 전반적으로 강해서일 뿐이었다.
‘새끼, 오른팔을 다쳤군.’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난 시로는 상대가 왼팔로 휘두르는 손도끼를 얼른 막으며 드루그의 오른팔을 노렸다. 아니나다를까, 조금은 어색한 오른손의 두 번째 공격이 시로의 옆구리를 파고들어왔다. 시로는 기다렸다는 듯, 왼팔에 고정시킨 작은 버클러 방패로 드루그의 오른쪽 손목을 힘껏 내리찍었다.
“압!”
사에나의 볼트에 삼두근을 찢겼던 드루그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팔을 당겼다. 그의 관심이 팔에 쏠린 새, 시로는 휘청거리는 이 적의 무릎을 발로 온 힘껏 내리찍었다. 순간, 중심을 잃은 드루그는 잠시 휘청거리며 적에게 측면을 드러내고 말았다.
“뒈져!”
순간, 시로의 도끼가 때를 놓치지 않고 적의 목을 비스듬하게 내리찍어 쇄골을 단번에 산산조각냈다.
“빌어먹을.......망할 년만 아니었.......”
시로의 눈을 올려보며 천천히 무너져가던 드루그가 저주한 건 조금 전, 그에게 몸으로 달려들어 볼트를 쏘아댔던 그 독하디 독한 보안국 여자 장교였다. 깊숙이 찍힌 드루그의 목 옆으로 잘린 경동맥에서 터져나온 피가 분수처럼 확 솟구쳐 시로의 얼굴과 옷을 적셨다.
“지금이라도 투항하면.......”
거친 숨을 헐떡이던 시로는 그제야 평소의 자제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죽어가는 이 후배에게 늦으나마 투항을 물으려 했지만 드루그는 비웃음어린 미소를 지으며 이 선배에게 피가 섞인 침을 퉤 뱉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쓰러진 드루그는 특등급 가디언으로서의 첫 번째 혹독한 신고식을 결국은 살아서 넘길 수가 없었다.
“2번 도크를 닫아! 빨리!”
정신을 퍼뜩 차린 시로는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는 관제실을 가로질러 급히 뛰어갔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닫는 거야!”
복잡한 계기판 앞에 선 시로는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2번 도크 문이 열려 배 한 척 정도 빠져나갈 정도의 구멍이 이미 벌어져 있었지만 이곳 관제실 요원들은 이미 모두 시체가 되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북쪽 벽에.......레버 2개......”
가는 여자 목소리에 시로는 그것이 누군지 확인할 여유도 없이 급히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대로, 벽에는 안전장치가 깨진 박스가 있었고, 그 안에는 붉은 경고등 아래 레버 2개가 올려져 있었다.
“저거 말인가!”
시로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무작정 달려들어 레버를 급히 내렸다. 순간, 쿠르릉 하는 요란스런 소리를 울리며 막 열리던 도크가 자리에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숨을 돌리는 듯, 움직임이 없던 도크의 거대한 철문이 다시 천천히 닫히며 도망치려는 배들의 앞길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도크에서 빠져나가던 배들 중 몇은 당황한 듯 선회하기 시작했고, 2척 정도는 닫히려는 좁은 틈새로 다 속력을 내 돌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 두 척이 빠져나간다 해도,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썅! 투항하지 않는 새끼들은 다 죽일 테다!”
도크에서 관심을 끊은 시로는 부하들이 난투극을 벌이고 있는 관제실 내부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수적으로 딸리고 대장인 드루그까지도 쓰러지면서 그때까지 살아있던 6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은 시로의 협박에 놀라 천천히 무기를 내려놓고 있었다.
“잠깐, 방금 내게 말한 게 누구였지?”
조금씩 안정을 되찾은 시로가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30구가 넘는 시체들이 온통 뒤엉켜있는 관제실 내부는 맨정신으로는 차마 둘러보기에도 끔찍할 지경이었다. 뒷걸음치던 시로는 발치에 걸린 검은 옷자락을 무심코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거의 난도질에 가깝게 고문을 당한 채 쓰러져 죽어가는 한 여자가 있었다.
“맙소사!”
그것이 동맹군 보안국 헌병대 복장임을, 그리고 여자가 아직 숨을 쉬고 있음을 깨달은 시로는 급히 무기를 내던지고 그 여자를 똑바로 돌려 눕혔다.
“귀관인가? 방금 말한 게?”
시로는 거의 누더기가 되어버린 여자의 중랑 계급장과 검은 가죽코트 한쪽에 새겨진 ‘사에나 쉐너’라는 이름표를 확인하고는 그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어떻게 살아 있었지?”
순간 경악한 시로의 물음에 여자의 대답은 거의 넋두리에 가까운 한 마디였다.
“빌어먹을 가문 같으니......”
시로는 그다지 눈치가 빠른 사람은 아니었지만 무슨 이유로 드루그가 이 여자를 죽이지 않았는지, 아니 그러지 못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적이었지만, 드루그로서는 훌륭한 인질감인 이 쉐너 가 출신의 여자를 멋대로 죽일 수는 없었을 터였다. 물론, 화풀이로 이렇게 처참하게 난도질을 할 수는 있었겠지만.
“몇 명이나.......살았습니까......”
사에나의 물음에 시로는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대신 함께 온 가디언에게 버럭 소리만 질렀다.
“중랑을 빨리 후송해! 빨리! 너!”
시로는 거의 의식을 잃어가는 이 여자를 부하 가디언의 등에 급히 업혀주었다. 가디언의 등에 업혀 이곳을 나가던 사에나는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지 않은 이 처참한 관제실을 가늘게 뜬 눈으로 죽 훑어보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 ‘여왕’의 눈시울이 비로소 축축해지고 있었다.
“같이 갔으면.......차라리 덜 치욕스러웠을 것을.......”
사에나가 시체더미를 차마 볼 면목이 없는지 자신을 업은 가디언의 등에 얼굴을 묻으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시로가 셔츠를 벗어 피로 물든 그의 차가운 어깨에 덮어주고 무어라 위로라도 해 주려 했지만 변변한 말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귀관의 가문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황상께는 그대의 생환이 최고의 선물이라네.”
사에나는 시로의 이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에 흐느끼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물론 시로 역시도 자신의 ‘위로’가 언젠가 사실이 될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휴우......”
사에나를 내보낸 시로는 할룩스를 켰지만 상부에 무어라 보고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는 그때까지도 등대의 조종간을 붙든 채 자리에 비스듬하게 앉아있는 오난 장군의 머리 없는 시체를 불끈 안아 그 벗인 유시프 장군의 옆에 조심스레 눕혀주었다.
“받은 것보다 몇 배는 남기고들 가셨구려.”
시로는 오난 장군의 부서진 수급을 제 자리에 놓아주며 입가에 흘러내린 짭쪼름한 눈물을 옷깃으로 훔쳐냈다. 아켐에서 나란히 함께 전향했던 이 두 명의 서부 무장은 결국 죽음까지도 함께 맞은 셈이었다.
시로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관제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15층 높이의 관제실 아래로, 이들이 목숨을 바쳐 연 도크로 진입한 아메샤 스펜타 5천여명이 포구에 고립된 1천의 근위대, 그리고 5백여의 반란군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는 광경이 그대로 내려다보였다. 어마어마한 피와 많은 용맹했던 무장들, 가디언들의 피를 바쳐야 했지만 포구를 장악하고 남서문으로 근위대를 들여보내려던 베흔의 계획은 이제 사실상 무산된 셈이었다.
시로는 비가 들이치는 창틀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로, 안쪽에 누워있는 두 명의 무장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이젠 편히 쉬시구려. 우리가 끝낼 테니.”
시로는 도끼를 둘러메고 아직 적들이 남아있는 탑 아래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물론, 그는 지금 이 포구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이 황성 내, 아니 황궁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으리라는 것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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