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67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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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를 통해 들어오면서 20여명을 어처구니없이 잃었지만, 그 이후의 타크마에게는 더 이상 걸릴 것이 없었다. 황도의 남서문은 성문들 중에서 황궁에 가장 가까운 문이었고, 쏟아지는 비와 칠흑 같은 어둠은 함께 온 가디언들을 적의 눈에서 완벽하게 감춰주었다. 게다가 민간인의 대부분이 이미 황도를 떠나면서 볼 눈도 많지 않았고, 곳곳에 버려진 빈집들은 중간 집결지로 활용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사실 포구의 수비탑은 이때까지도 수비군과 근위대와의 밀고 당기는 싸움 중이었고, 사에나로부터 심문 결과를 아직 통지받지 못한 동맹군 수뇌부는 아직까지는 이들이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성벽 쪽으로 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주요 병력을 성벽으로 통하는 주요 길목에 긴급히 배치했지만 정작 황궁 쪽은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5소대에서 잡힌 놈들은 없는 모양이지.”
평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황궁 남문을 조심스레 쳐다보며 타크마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타크마를 비롯해 그를 따라온 5명 정도의 가디언들은 황궁 남문 밖, 대로 하나를 사이에 둔 빈집 2층에 몸을 숨긴 채 시계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함께 온 180여명의 근위대 가디언들 역시 남문 부근 민가에 흩어진 채 그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황궁의 초승달 모양 광장의 주출입구이기도 한 남문은 황궁 민원시설에 볼일이 있는 민간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문이다 보니 크기도 가장 컸고, 단속도 느슨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외곽의 황성에서 전투가 벌어지면서 황궁과 전장을 오가는 수많은 차량과 병력들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4소대만 합류하면 전 소대 동시에 움직인다.”
타크마가 허리에 찬 시미터를 똑똑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흩어졌던 대부분의 가디언들이 남문 부근 집결지에 모여들었지만 아직 40여명이 도착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4소대 이 새끼들 언제 오는 거야.”
초조해진 타크마가 입술을 깨물었다. 공격시간을 15분이나 앞당겼어도 4소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소대들은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4소대가 늦은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소대들이 빨리 도착했다는 편이 정확했지만 포구에서 벌어진 참극 덕분에 타크마의 인내심도 반 토막이 나 있었다.
그때, 마치 지진 같은 거친 울림이 그들의 발밑을 가늘게 울렸다. 타크마는 진동이 느껴져 온 동북쪽을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빗속에서 거리까지 멀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발리스타의 포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정도는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진동의 크기로 보아 부실한 성벽이 무너졌다던지, 제법 큰 구조물 하나가 붕괴된 것이 확실했다.
“성벽에서도 이제 시작이군.......응?”
타크마가 두 눈에 힘을 주었다. 멀리, 황궁에서 이곳 남문으로 웬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는 모습이 빗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그는 눈에 낀 스코프를 이용해 험악한 날씨 너머 그 그림자의 정체를 유심히 살폈다.
“씨발, 빌어먹을.”
“뭡니까?”
대장의 욕설에 당황한 부하들이 다급히 물었다.
“북부보병들이다. 2, 3백 정도 되는데 가디언들이 거의 절반인 걸 보니.......수상쩍은데. 놈들이 벌써 눈치 챘나?”
“성벽의 전투에 투입되려고 그냥 나오는 게 아닐까요?”
“글쎄, 그런 것 치고는 이상한데. 디브인가 그 새끼 말대로라면 지금은 황궁 경비병 교대시간도 아닌데 말이야.”
타크마가 위병소를 가리켰다. 황궁 남문의 경비병들이 머무는 위병소에는 2백여명의 병력이 머무르고, 보통 3교대로 경비를 서니 70명 정도가 바깥에 있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위병소 안쪽에서 병사들이 슬금슬금 하나둘씩 나와 보충되고 있었다.
불안감에 휩싸인 타크마가 붉어진 얼굴로 자리에서 서성거렸다. 그가 작전시각을 15분 앞당긴 것이 이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떡하죠? 4소대는 도착하려면 10분은 더 걸릴 것이라고 합니다.”
타크마는 칼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갈등에 사로잡혔다. 4소대의 합류를 기다렸다가 계획대로 공격을 개시할지, 저들이 남문에 도착하기 전 선제공격으로 기선을 잡고 위병소를 먼저 점거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베흔 대장과는 연락이 안 되나?”
“카타콤베 안쪽은 통신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제기랄.”
위병소에서까지 경비병들이 나오는 모습을 확인한 그는 마지막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이제 많지 않았다. 적의 숫자가 더 늘어나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즉시 할룩스를 켜고 4소대장을 불러냈다.
“대, 대장, 지금 최대한 빨리 움직이고 있으니......”
민망한 표정의 4소대장이 무어라 둘러대려 했지만 타크마는 전장에서 그를 나무라지는 않았다. 대신 최대한 사무적인 표정으로 지시를 내렸다.
“너희 소대 명령을 변경한다.”
“예?”
“너희 소대를 기다리다가는 적 지원병들하고도 싸워야 할 테고, 진입이 늦어진다던지 계획이 들통나면서 잃는 손해가 더 커져.”
타크마의 짧지만 합리적인 설명에 4소대장은 일단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지금 전력, 그리고 동맹군 지원 병력의 규모를 세심히 비교한 타크마는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너희 4소대는 동북쪽 성벽으로 가라. 적의 예비 병력이 그곳에 집중되어 있으니 황궁에 일이 생기면 바로 그곳에서 달려올 거다. 너희는 동북쪽 성벽에서 궁으로 오는 길을 차단하고 놈들의 지원 병력이 접근하는 것을 최대한 늦춰라.”
“알겠습니다.”
4소대장의 표정이 굳었다. 적 후방인 이곳에서 ‘시간을 끌라’는 것은 사실상 전 부대원의 목숨을 걸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타크마의 ‘합리적인 명령’에는 일단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1소대를 이끌고 남쪽에서 정면으로 진입해 위병소를 급습하겠다. 2, 3소대는 황궁 쪽에서 나오는 적 지원부대를 차단하고 5소대는 외부 지원부대를 차단해.”
“베흔 대장도 작전 개시 시각을 3시로 알고 있는데 괜찮을까요? 지하 카타콤베에서 문을 열어줘야 우리가 진입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옆에 있는 1소대장이 걱정스레 물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더 끌다가는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다.”
타크마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위병소를 점거하고 시간을 끄는 게 나아. 우리가 위병소에 갇히면 놈들은 얼씨구나 덫에 걸렸구나 하고 포위망을 강화할 거다. 하지만 가디언이 2백 가까우니 함부로 직접공격을 시도하지는 못하겠지. 그러니 우린 짐짓 궁지에 몰린 척 시간만 끌면 돼. 3시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각 소대장들의 자신에 찬 목소리가 할룩스로 들려왔다. 타크마는 2층 창문을 활짝 열고 차가운 비가 쏟아지는 심야의 남문을 잠시 주시했다. 출입문 중앙을 막고 선 유리로 된 2층의 건물이 출입자를 통제하는 황궁 남문 위병소였다. 베흔이 준 정보대로라면, 바로 저곳 지하가 카타콤베와 직결되어 있었다.
“공격!”
타크마는 칼을 입에 물고 2층 창문 밖으로 몸을 힘껏 날렸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매복해 있던 2백에 가까운 가디언들이 어둠 속에서 우루루 몰려나와 남문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적군! 적군이다!”
남문의 경비병들이 빗속에서 느닷없이 몰려드는 수백이나 되는 괴한들을 알아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문 위병소를 지키던 아메샤 스펜타 병사들의 필사의 고함소리가 비상경보음과 함께 찢어지듯 귀청을 때렸다.
“다 가디언들이야!”
위병소에서 몰려나오던 병사들은 ‘가디언들’이라는 말에 본능적으로 움찔거렸다. 지금 문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은 고작 90여명이었고 그나마 가디언-시민병이 1대10 정도로 혼합 편제된 부대다보니 대로를 가로질러 눈앞으로 돌격해오는 140여명의 순수 가디언들이 경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3시라며!”
위병소 장교 중 한 명의 당황스런 외침에서 타크마는 자신의 결정이 옳았음을 바로 깨달았다. 저들은 자신들이 3시에 공격해 올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지원병이 뒤에서 오고 있다! 조금만 버티면 돼!”
아메샤 스펜타의 가디언 지휘관들이 위병소에서 달려나오는 장병들을 급히 독려했지만 2백여명이나 되는 장병들이 위병소에서 한 번에 모두 쏟아져 나와 적들을 막을 만한 시간은 없었다. 황궁 남쪽 대로를 쏜살같이 가로지른 140여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은 아직 미처 완성되지 못한 아메샤 스펜타들의 허술한 대오를 순식간에 무너뜨리며 황궁 남문을 휩쓸었다.
“위병소! 위병소 안으로 들어가! 안에 있는 적군들을 죽여!”
타크마가 칼을 치켜들며 앞장서서 위병소 출입문으로 돌진했다. 위병소 안에 있던 남아있던 병사들 중 싸울 준비를 갖추고 나온 건 아직 채 절반도 되지 못했다. 이전부터 그들이 있었던 곳인 만큼, 근위대 가디언들에게 이 위병소의 구조 역시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적이다! 적이 안에 들어왔다!”
안에서 쉬고 있던, 혹은 비상출동령에 급히 옷을 갈아입고 있던 아메샤 스펜타의 장병들은 미처 정신 차릴 새도 없이 실내로 난입한 이 무시무시한 인간병기들에 놀라 미처 무기, 갑주조차 추스를 새도 없이 쓰러졌다.
“일단 도망가! 상대가 안 되니 밖으로 나가!”
임기응변을 발휘한 아메샤 스펜타의 가디언 지휘관들이 창을 칼로 깨부수며 휘하 병사들을 목이 찢어져라 불러들였다. 난입한 적군의 목적이 바로 이 위병소임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일단 위병소를 내주고서라도 병사들을 밖으로 내보내 전열을 가다듬는 편이 더 나았다.
그들의 명령대로, 가디언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남은 병사들이 허둥지둥 위병소 밖으로 뛰어내렸다. 수십 구는 될 동료들의 시체를 뒤에 남긴 채, 그들은 이 크지 않은 위병소 건물에서 허겁지겁 도망쳤다.
“도망가는 놈들은 놔둬라.”
타크마는 창밖으로 도망치는 적병을 쫓아가 잡으려는 부하들을 급히 붙들었다.
“예? 하지만 저놈들을 보내주면 반격을 해 올 텐데.......”
아직 구체적인 작전내용을 모르는 말단 가디언들이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지만 타크마는 그들에게 자리를 지키라고 손짓했을 뿐이었다.
“반격해 오라지. 너희는 적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지키고 있어. 여기만 차지했으면 됐다.”
“황궁엔 더 안 들어갑니까? 여기 갇혀있다가는 적들이.......”
“여기까지 왔으면 됐다니까. 밖에 있는 놈들이나 빨리 불러들여!”
타크마는 버럭 화를 내며 위병소 지하실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잡비품을 보관하는 창고와 기계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뒤따라온 3소대장이 걱정스레 물었다.
“15분이나 일찍 왔는데 대장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글쎄, 그게 문제지.”
온몸에서 뚝뚝 흐르는 빗물을 급히 털어낸 타크마는 기계실 문을 급히 열고 먼지로 가득 찬 그 내부를 휙 불러보았다.
“여기다.”
그는 오래되어 구석에 처박혀 있는 보일러를 힘껏 옆으로 치워냈다. 그리고는 그 밑에 깔려있던 녹슨 철판도 급히 걷어냈다. 예상대로, 그 밑에는 꽤 오래된 듯 보이는 금속판, 혹은 문이 바닥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타크마는 옆에 뒹굴던 공구를 집어들고 그 판을 쾅쾅 두들겨 보았다.
“안이 비었군요. 여기가 맞나봅니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대장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지.”
타크마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베흔이 빨리 도착해 안에서 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이 위병소 역시 자신들에게 무시무시한 집단 무덤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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