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68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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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흔 일행이 북쪽 끝의 에아 신전에서 지하 카타콤베의 주 회랑 남쪽 끝, 다하카르 신전까지 도착하는 데는 생각 외로 긴 시간이 걸려야 했다.
회랑의 도상 거리는 가디언의 뜀박질로는 고작 몇 분이면 가로지를 거리였지만 중간중간 무수한 함정과 착시장치들, 그리고 지도에도 없는 막다른 골목이 사방에 널려있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보니 베흔 일행은 거의 1시간이 넘도록 이 미로를 사방팔방 헤맸지만 결국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방향감각도 잃은 채 거의 패닉 상태에서 내부를 헤매던 그들은 ‘흙이 쌓여 폐쇄되어 있는 수상쩍은 곳’을 발견한 베흔이 ‘일단 파 보자’는 의견을 내어 무지막지한 막노동 끝에 겨우 구멍을 뚫고 도착해 있었다.
“이 지도가 그다지 정확하지는 않군요.”
가디언 한 명이 한숨과 함께 어두운 천장을 올려보며 투덜거렸다. 그는 무너진 돌더미 사이를 기어오느라 누더기가 되어버린 무릎을 툭툭 털어냈다. 굳이 그가 아니더라도, 함께 온 7명의 가디언들 모두 온몸에 먼지와 흙을 뒤집어쓴 지저분해진 몰골이었다. 베흔과 함께 들어온 8명의 가디언 팀은 지하 회랑의 남쪽 거의 끝부분, 거대한 홀에 도착해 있었다.
“400년이나 시차가 있으니 이 정도 차이는 어쩔 수 없겠지. 그래도 길 자체가 아주 틀린 건 없지 않나.”
베흔이 회색빛 돌가루를 머리에서 털어내며 애써 긍정적으로 말했지만 속으로는 ‘이따위도 지도라고 만들어놨냐, 빌어먹을 오르마즈 년’ 이라는 욕을 백 번도 넘게 되새긴 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가져온 지도에는 막힌 곳도 정상적인 복도로 표시되어 있었고, 막다른 골목도 어딘가 연결된 것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었다. 지도에는 군데군데 알 수 없는 수식 같은 것이 적혀 있었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 2시 41분이니까 늦지는 않았군. 아직 20분쯤 남았으니......”
“여기가 목적지가 맞다면요.”
부하 가디언의 넋두리에 베흔이 다시 눈을 흘겼지만 그도 지휘관으로서 영 체면을 구긴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뭐 하는 곳이지? 제대로 왔다면.......다하카르 신전이어야 하는데?”
걸음을 옮기며 천장을 두리번거리던 베흔은 갑자기 무언가를 밟았는지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뒹굴었다.
“아쿠!”
부하들 앞에서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던 베흔이 발치에 걸렸던 크고 둥그런 쇠붙이를 더듬더듬 집어들었다.
“엑.”
대담한 베흔이었지만 그 ‘쇠붙이’의 정체를 안 순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든 투구 안에는 바싹 말라비틀어져 몸에서 떨어져나간 웬 머리가 이 불청객을 찡그린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씨발, 뭐야, 재수 없게.”
베흔이 짜증을 부리며 자신이 밟았던 그 투구를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그런데.......시체가 한둘이 아닌데요?”
그를 부축하러 달려온 부하 가디언이 놀란 얼굴로 이 지하 홀을 빙 둘러보았다. 베흔이 치켜든 파란빛 조명 사이로, 직경 100척(30m) 정도 되어 보이는 거대한 원형, 아니 정확히는 12각형의 홀과 주변을 빙 둘러 세워진 열주, 그리고 중앙에 놓인 제단이 보였다. 12면의 벽들은 한때는 화려한 색채를 자랑했을 벽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천장에는 머리 셋 달린 용이 검푸른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그림이 긴 세월의 때를 뒤집어쓴 채 남아있었다.
“다하카르 신전이 맞구나.”
일단 체면치레를 한 베흔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떻게 온 것인지는 스스로도 헛갈렸지만 어쨌든 목적지까지 온 건 사실이었다.
문제는 황궁 지하로 되짚어 돌아갈 생각에 그의 머릿속이 어질어질할 지경이라는 사실이었다. 오면서 지도에 ‘헤맨 길’을 대강 표시해 놓기는 했지만 지도 자체가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다보니 그 길대로 정말 되돌아갈 수 있을지도 왠지 자신이 없었다.
“우리한테 당장 급한 일은 아니겠지만.......여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바닥, 그리고 구석구석에 흩어져있는 무수한 시체들을 가리키며 가디언 중 한 명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구르고 있는 두개골 숫자만 언뜻 어림해 보아도 5, 60구는 족히 넘어 보였다.
“큰 싸움이었던 모양인데.......이런 곳이 황궁 지하에 있었다니.......성전 시대 것들일까요?”
“성전 이전 같은데. 복장 스타일로 봐선 기원 3,40년 무렵?”
베흔은 옛 성전에 참전했던 사람답게, 그는 흩어진 시체에 걸쳐진 갑주들과 무기부터 유심히 살폈다.
“코메트 놈들이로군. 일부는 헤네티 친위대고.”
“헤네티요? 교단 광신도들 말입니까?”
역사에 관해 그다지 아는 것 없는 가디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헤네티 그 새끼들 민병대에는 공포의 대상이었어. 마약을 먹인다는 소문도 있었고, X처럼 유전자 조작된 놈들이라는 설도 있었지만 아직 알려진 건 없어. 어쨌든 X들도 상대하는 데 애를 먹을 정도였으니 정규군인 코메트하고는 수준이 달랐지. 하지만 그네들은 소수의 특수부대였고, 주력군은 코메트였지. 이런 놈들 말이야.”
베흔이 문득 옛 생각이 나는지 푸른빛 군복을 걸친 제법 보존상태가 좋은 시체에 눈을 바싹 가져갔다. 그는 옷깃에 붙은 부대마크와 이름표에 랜턴을 들이대고 유심히 살폈다.
“당시에 교단의 무장병력은 크게 2종류가 있었어. 민병대와 직접 맞서는 야전 정규군은 코메트 부대, 특수한 임무는 마구스 직속 특수부대인 헤네티 친위대가 맡았거든. 이놈은.......도마뱀 문장이니 아케메니아 주둔 코메트 정규군이었군.”
“코메트들이 왜 이런 비밀스런 곳에 와 있죠? 그네들은 보통 정규군이라면서요?”
“글쎄, 내가 알기로도 그네들은 아케메니안 궁에 들어올 자격이 없었을 텐데. 보아하니 특수한 병과도 아니고 그냥 보병 사관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베흔은 볼트에 얼굴을 관통당한 채 웅크리고 쓰러져 있는 그 옆 시체를 살폈다.
“봐, 이놈이 바로 헤네티야. 복장부터가 완전히 다르지.”
베흔은 붉은빛 염료가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는 벨벳 망토를 가리켰다. 베흔의 말대로, 장식품이나 벨트, 투구 모양, 문장 역시 조금 전의 시체보다 훨씬 더 고급스럽고 화려했다.
“전갈 문장이라.......이게 ‘크바르나 여단’이었던가? 이 부대면 마구스들을 지키는 측근 경호부대니까 정예 중에 정예인데.......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런데.......민병대 복장을 한 시체는 하나도 없는데요? 도대체 누구하고 싸운 거죠?”
“그래, 그게 이상하다는 거지. 민병대가 한 명도 안 죽고 이네들을 전멸시킨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런 전투가 있었다면 아마 민병대 역사책 첫 페이지에 남았겠지.”
“풉.”
가디언들이 이 경황없는 와중에도 잠시나마 웃음을 지었다. 베흔이 시체들로 널브러진 이곳을 손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면 마구스 친위대인 헤네티하고, 정규군인 코메트가 이런 비밀스런 곳에서 자기네끼리 싸웠다는 말이잖아.”
“교단이 망하기 직전에 내분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흔적이 아닐까요?”
부하 가디언의 물음에 베흔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조금 전에 말했지만 이네들 장비나 복식은 야푸르 대신관 재임기 때 꺼야. 내분은 고사하고 교단이 제일 서슬퍼렇게 콜로니를 지배했던 때지. 군복하고 편제 개편은 대신관이 죽고 난 이후에 있었거든.”
“그렇다면 여기를 왜 안 치웠을까요?”
가디언들은 온통 시체들로 널브러진 홀을 다시금 가리키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발적인 사고로 이런 일이 있었다손 쳐도 최소한 시체는 치웠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글쎄.”
베흔 역시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바닥을 말없이 응시하던 그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뒤를 휙 돌아보았다.
“이 신전과 통하는 복도만 막혀 있었을까?”
“예?”
“카타콤베의 북쪽에서 만났던 다른 회랑들은 어디 금간 곳 하나 없이 멀쩡했어. 그런데 여기로 통하는 복도만 ‘무너져’ 있었지. 왜 그랬을까?”
베흔이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며 코를 킁킁거렸다. 박학다식한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건 이곳의 공기 자체였다.
“여기 깊이가 어느 정도지?”
베흔의 물음에 가디언이 재빨리 대답했다.
“지도에 따르면 지면에서 80척(24m) 정도 아래입니다. 지하 8~10층 정도 깊이입니다.”
“여긴 강변이고 지하수면 아래야. 벽이 진짜로 무너진 것이라면 붕괴된 곳으로 물이 흘러들어서 옛날에 침수되었어야 해. 아니, 카타콤베 전체가 붕괴되었어야 도리어 정상이지. 그런데 침수는 고사하고 공기도 그다지 습하지 않아. 그것도 400년 가까이를 말이야. 만약.......붕괴가 아니고 붕괴처럼 꾸며서 폐쇄한 것이라면?”
베흔의 설명을 말없이 듣고 있던 가디언 중 한 명이 쓴웃음을 지었다.
“누군가 이 참극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려 한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런데 말이야, 이곳을 나중에 찾은 손님이 우리 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베흔은 랜턴으로 제일 안쪽, 구석진 기둥 뒤편을 가리켰다. 활과 화살이 그려진 빛바랜 옛 벽화 밑에는 유달리 많은 시체가 쌓여 있었다.
“왜요? 저긴 그냥......”
뭐라 되물으려던 가디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곳의 쌓여있는 시체들 중 몇 구에는 죽은 후에 훼손된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시체 중 한 구는 팔이 떨어져 있었고, 또 다른 두 구는 머리가 떨어지거나 한구석이 짓밟힌 상태였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다른 시체들도 원래 있던 자리에서 옮겨진 듯, 부자연스런 자세로 쌓여 있었다.
시체의 상태로 보아 이 불쌍한 희생자들이 암흑 속에서 말라비틀어질 만큼의 긴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 이곳을 다시 찾아왔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곳으로 통하는 복도는 붕괴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한 시간 가까이 생고생을 해서 겨우 구멍을 뚫었는데 어떻게.......”
누군가의 말에 베흔이 눈가를 잔뜩 찡그렸다.
“글쎄, 두 번째 손님이 다녀간 이후에 무너진 것일 수도 있고.......아니면.......휴우, 전쟁 끝나는 대로 보안국 투입해서 제대로 조사를 해 봐야겠는걸.”
베흔은 이 정체불명의 작은 전장을 둘러보며 개인적 호기심의 수준을 넘어선 불안감까지도 느꼈지만 지금의 급박한 상황은 그가 한가롭게 옛날 일이나 파헤치도록 놔두지는 않았다.
“대장! 저 안쪽에서 무슨 소리가 납니다!”
“알았다.”
베흔은 일단 이 시체들에서 관심을 접었다. 부하 가디언이 가리킨 곳은 홀의 남쪽으로 난 작은 복도 안쪽이었다. 재빨리 지도를 펼쳐 본 베흔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복도 안쪽을 비췄다. 그곳에는 가파른 오르막으로 된 긴 램프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가자. 타크마가 기다릴 테니.”
힘을 얻은 가디언들이 급히 걸음을 재촉해 램프를 뛰어올랐다. 80척이나 되는 깊이를 감당해야 하는 오르막 램프 역시 만만치 않게 길었지만 이 가디언들에게는 잠깐이면 충분했다.
“저깁니다!”
오래 가지 않아, 그들의 앞에 지상으로 올라가는 거의 3층 높이의 높은 나선계단이 바로 모습을 나타냈다. 나선계단 꼭대기에는 베흔의 예상대로, 오래된 철문이 지상으로 향하는 구멍을 막고 있었다. 베흔은 시계를 확인했다. 미리 약속했던 것보다 조금 빠른, 2시 5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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