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69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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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위로 향하는 나선계단을 막 뛰어오르려던 순간, 움찔거린 건 베흔 뿐만이 아니었다.
“지진인가?”
발밑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에 지레 놀란 가디언들이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에 붙어서 서 있던 한 가디언은 천장이 없는 철문 쪽으로 화급히 피하기도 했다. 베흔이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지만 진동은 딱히 강해지지도, 약해지지도 않은 채 일정한 강도로 잠시 지속되었다. 가디언인 그들만 느낄 뿐, 보통의 시민이라면 알아채지도 못할 미세한 울림이었다.
“지진은 아닌 것 같은데.”
6, 7초 정도 지속되던 진동은 어느 순간 뚝 끊겼다. 그리고 주변은 또다시 적막에 빠져들었다.
“생각해보니 우리 오는 도중에도 이런 진동이 몇 번 있었던 것 같은데? 길 찾는데 정신이 팔려서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베흔은 겁에 질린 부하들을 향해 별것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그 정체불명의 진동에 잠시나마 놀랐던 가디언들은 퉁퉁거리며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충격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쇠붙이로 톡톡 끊어서 치는 그 신호는 근위대 가디언들이 쓰는 암호코드였다.
“타크마 녀석, 성공했구나.”
베흔의 얼굴이 순간 환해졌다. 그 손짓에 공구를 쥔 가디언 3명이 계단을 급히 뛰어올라 문을 비틀어 열기 시작했다.
“휴우.”
열린 철문 너머를 찡그린 얼굴로 응시하며 베흔이 긴장된 가슴을 잠시 가다듬었다. 고리를 풀어낸 가디언들이 끄응 소리를 내며 그 녹슨 쇳덩이를 힘껏 밀어올려 틈새를 만들었다. 반대편에서도 철문을 함께 들어 올리려는 듯, 벌어진 틈새로 굵은 팔 몇 개가 쑥 들어왔다.
“대장?”
다 열리지도 않은 문 틈새로 비에 흠뻑 젖은 머리를 불쑥 디민 건 익숙한 타크마의 모습이었다. 베흔이 그를 향해 잘 했다며 손뼉을 짝짝 쳤다.
“적의 심장에 들어와 준 걸 환영한다. 타크마.”
동북벽에 있던 카렐에게 ‘적의 목표가 성이 아니고 황궁인 것 같다’는 전갈이 전해진 건 연합군의 발리스타 포격이 막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 순간이었다.
“여기가 아니라고? 게다가.......베흔까지 들어왔다고?”
카렐이 보안국장 루토를 노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예. 그리고 이번에 특등급으로 승급한 타크마가 함께 들어온 것 같습니다. 포구의 근위대는 마찬가지로 이번에 승급한 특등급 가디언 드루그가 이끌고 있습니다.”
“특등급 둘이........가디언 2백을 이끌고 황궁을 노린다.......”
거센 빗속에서 카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지금 그 휘하의 가디언들은 대부분 성벽에 투입되어 있었고, 궁에 남은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베흔을 막을만한 특등급은 황궁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제일 믿을만한 네피는 탈라스에 가 있었고, 시로는 아케메니아 포구에, 조페는 신성에 각각 주둔한 상태였고, 페로의 가디언들은 모두 성벽에 투입되어 있었다.
루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고를 이었다.
“포구에서 이미 20명을 사살했으니 정확히는 180명입니다. 그 정도 가디언이 황도 내에서 설치고 다니는 것이 위협적인 건 사실이지만 정면공격으로 황궁을 돌파할 정도는 아닙니다. 궁에는 우리 가디언이 4백이나 있고 아메샤 스펜타 아샤 연대 정규군 2천도 있습니다.”
“베흔 그놈이 남문 위병소까지만 가면 황궁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면서?”
“포로를 심문해 얻어낸 정보라 진위가 의심스럽습니다. 남문은 황궁 본관과는 도리어 제일 거리가 먼 문입니다. 그곳에서 궁까지 접근하려면 광장을 가로질러야 하고 그러고도.......”
“그걸 누가 모르나.”
카렐이 짜증스레 대답하며 손을 저었다.
“문제는 베흔 녀석이 황궁 사정에는 우리보다 훨씬 밝다는 거야. 그 말이 사실이고, 그곳에서 궁에 접근할 수 있는 비책이 정말로 있다면.......”
“궁에서 북부보병 2백과 가디언 1백을 남문으로 방금 내보냈습니다. 남문에 접근 자체를 못 하도록 전진방어를 할 참입니다.”
“그래, 잘했다. 하지만......”
카렐은 무언가 찜찜한 듯 제자리에서 빗속을 잠시 서성거렸다. 바로 그때, 카렐과 연결되어 있던 루토가 누군가에게서 보고를 받는 듯 놀란 얼굴로 전문을 읽는 모습이 보였다.
“뭐냐?”
“폐하. 적들이 정말로 남문을.......”
“결론부터 말해라. 뚫렸나?”
“아, 아닙니다. 위병소와 경비중대 숙소 부근에서 큰 교전이 벌어졌지만 돌파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적은 조금 전 위병소와 경비중대 건물로 퇴각했습니다. 지금 경비중대 전 병력을 동원해 건물을 포위하겠습니다.”
“놈들이 건물에 기어들었다고? 무조건 뚫고 최대한 빨리 진입하는 게 아니고? 우리 경비병이 얼마나 많았길래?”
카렐은 루토의 보고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경비 병력은 100명이 조금 안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궁에서 나오고 있던 지원 병력을 보고 지레 놀랐는지도......”
“말도 안 돼.”
카렐이 고개를 거칠게 저으며 루토의 말을 부정했다. 어마어마한 연산능력을 지닌 발현자의 두뇌로도, 적군의 괴상한 이동은 도무지 해석이 되지 않았다.
“폐하,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당혹스런 표정으로 이를 갈고 있던 카렐은 걱정어린 표정으로 다가오는 니사에게 그대로 있으라고 손짓을 보냈다.
“군무이니 박사와는 관계없네.”
“일단 전 병력을 총동원해 그곳을 폐쇄하겠습니다. 상대가 상대니만큼 폐하께서 몸소 오셔서 상황을 살펴보심이......”
“난 여기서 플라칼 가의 동향을 살펴야 한다. 그쪽에 우리 운명이 걸렸으니......”
카렐은 말꼬리를 흐리며 성 바깥의 플라칼 가 숙영지, 성 안쪽의 황궁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하긴, 운명이 걸렸기는 양쪽이 마찬가지지. 황궁 남문 위병소.......거기가 뭐 어쨌다는 거지?”
카렐이 이마를 짚으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니사가 다시금 바싹 다가서자 대번 짜증을 부렸다.
“지금 중요한 논의 중인데 자꾸.......”
“조금 전 남문 위병소에 적이 들어왔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그대의 일은 작전에 참견하는 것이 아니고.......”
순간 카렐이 사나운 표정과 함께 무어라 쏘아붙이려 했다. 이 무시무시한 황제의 호통에 순간 움찔했던 니사의 눈길에 잠시 망설임이 흘렀다. 주치의의 눈빛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 챈 카렐이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폐하, 소신이 감히 참견할 일이 아닌 것은 알고 있사오나.......”
잠시 후, 결국 마음을 굳힌 니사가 다시 표정을 가다듬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지하 카타콤베의 남단 출입문이 아마도 그 부근일 것입니다.”
“뭐라고?”
카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옛 아케메니안 궁부터 존재했던 옛 지하구조물 말씀입니다.”
“그건.......”
카렐은 잠시 입놀림을 멈추었다. 그도 보안국장으로 있었기는 했지만 지하 카타콤베에 관해서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니사의 말이 옳던 그르던, 일단은 막막하던 그의 머릿속을 한 줄기 빛이 스치는 것 같았다.
“거긴 모두 폐쇄되지 않았나?”
“폐쇄되었다는 것과 철거되었다는 것과는 엄밀히 다른 의미입니다. 적이 내부 구조만 알고 있다면 그곳을 통해 황궁 내부로 바로 진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간, 머릿속이 아찔해진 카렐이 연결되어 있던 루토를 돌아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장 보안국 모든 데이터를 검색해서 지하 카타콤베에 관한 자료를 찾아라. 당장!”
“예! 알겠습니다.”
카렐은 니사를 그제야 진지한 얼굴로 돌아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물었다.
“그대가 알고 있는 건 어느 정도지? 그러니까 내 말은.......”
“옛 구조는 일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옛 출구들이 현재의 어느 지점과 연결되었는지는 모르옵니다. 그곳에는 모두 12개의 출구가 있사온데 현재 이용할 수 있는 건 3개뿐입니다. 하나는 황궁, 하나는 남문 위병소, 하나는.......”
니사가 카렐의 눈치를 보며 잠시 망설였다. 카렐이 그의 어깨를 그 큰 손으로 덥석 움켜쥐며 당장 말하라는 듯 매섭게 눈을 부릅떴다. 눈을 감은 채 잠시 갈등에 휩싸였던 니사가 결국 낮은 한숨과 함께 대답을 내놓았다.
“오르마즈 경께서 저와 마구스님을 감옥에서 구출해 주셨을 때 빠져나온 출구이옵니다.......하지만 그곳엔......”
니사가 말을 또다시 더듬거리며 카렐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카렐은 그가 말을 더듬거리는 이유를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카렐은 니사를 다른 사람들의 눈이 없는 곳으로 거칠게 잡아끌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예전 일에 관해서는 일체 묻지 않을 테니 부담스러워 할 것 없다. 설사 거기서 너희가 종종 예배를 가졌다고 해도.”
니사가 카렐을 올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명색이 교단 통합본부였던 아케메니안 궁 지하에 에아 신전 하나만 남아있다는 게 어색하기는 했어. 아마 에아 신전은 공교롭게도 파헤쳐진 덕에 드러난 것뿐일 테고, 나머지 11개 교단의 신전들 또한 카타콤베에 남아있다는 뜻이겠지? 너희가 종종 드나들었을 테고.”
니사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렐이 눈에 잔뜩 힘을 주며 물었다.
“그곳 구조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누구누구냐?”
“현재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마구스님과 저와.......당시 고위 신관으로 계셨다가 아직까지 운 좋게 생존해 계신 몇 분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것 역시 완전치는 않습니다.”
카렐이 격앙된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날 안내해줄 수 있나?”
“그곳은 무척 좁습니다.”
니사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제일 넓은 방사형 회랑도 가디언 세 명이 함께 지나면 꽉 찰 정도입니다.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고.......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카렐이 계속 말을 끌며 머뭇거리는 니사에게 거칠게 목소리를 높였다.
“날 안내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저희 성소들을 훼손하지 않고.......그 존재를 비밀에 붙여준다는 약속만 해 주신다면.......제가 길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카토! 루토!”
카렐이 한 손에 칼을 쥐며 뒤로 휙 돌아섰다.
“근위가디언 중 제일 뛰어난 30명만 뽑아라. 입이 무거운 놈들이어야 한다.”
“겨우 30명으로는 적들을.......”
“좁은 카타콤베에서 숫자가 많아봤자 소용없다. 루토! 남문 위병소를 포위한 병력에 지금 당장 무조건 공격을 개시하라고 해! 그리고 넌 가디언 100명을 데리고 에아 신전에서 놈들을 차단해라. 카타콤베와 황궁이 직접 연결되는 부분은 그곳 뿐이니 거기만 막으면 적이 바로 침입하는 건 막을 수 있다. 그리고 황궁 외곽에 아메샤 스펜타 정규군을 배치해서 행여 다른 구멍으로 나올 경우를 대비해!”
“폐하께선.......”
“난 카토와 함께 카타콤베 안에서 직접 놈들을 잡겠다.”
“성벽에서의 전투는 어쩌시려고......”
“상관없어. 할룩스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니까. 다른 곳 전황은 그곳에서 내가 몸소 지휘할 테니.”
“알겠습니다.”
“그런데 폐하.”
니사가 다시 카렐의 팔을 얼른 붙들었다.
“카타콤베 내부는 자기장이 강해서 외부와의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할룩스든 무엇이든 무용지물이고 나침반 또한 작동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폐하께서 몸소 지휘하실 수 없습니다.”
“제기랄.”
카렐이 입술을 꽉 악물었다. 연락을 할 수가 없다면 바깥의 누군가가 그를 대신해 이번 전투의 총 지휘를 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성벽에서의 지휘권은 총리에게 일임하겠다. 그리고 궁은.......“
카렐이 보안국장 루토를 힐끔 쳐다보았지만 이 잔혹하고 똑똑한 가디언이 ‘베흔을 상대해야 하는’ 이번만은 어딘지 미덥지 않았다. 루토는 가디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똑똑하고 용의주도했지만 지나치게 꼼꼼해서 결단력이 떨어지는데다가, 몰아붙이는 뚝심이 없다보니 ‘일선 지휘관’보다는 지금같은 보안국장이나 누군가의 참모로 적당한 인물이었다.
‘제네르가 쓰러진 게 이렇게 아쉽다니.’
이 순간 카렐의 머리에 바로 떠오른 건 신중한 제네르, 혹은 황궁 사정에 밝은 릴라크였지만 사정이 녹록치 않았다. 그 둘 중 하나에게 궁을 맡긴다면 편한 마음으로 나갈 수 있겠지만 둘 모두가 아직 병실에 누워있는 신세였다. 카렐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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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 정도에 2부 출판본 표지안을 공개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