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70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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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토 넌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베흔의 무리가 궁 내부로 잠입하는 것을 막아라. 여기 있는 아메샤 스펜타 예비대 5백을 빌려주지.”
“알겠습니다.”
루토 역시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의 어마어마한 무게를 아는지 비장한, 아니 조금은 어두워진 표정이었다. 한때 베흔의 참모로 있었던 똑똑한 그인 만큼, 그 옛 상관이 자신에게 버거운 상대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새, 30여명의 믿을만한 가디언들을 뽑아 온 카토가 그들을 정렬시켰다. 카렐이 그들을 노려보며 단호하게 지시를 내렸다.
“내 몸소 앞장서니 너희는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다만 지금부터 너희들이 볼 것들은 전투가 끝나는 대로 모두 잊어라.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그들 가디언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니사가 다시 끼어들며 말했다.
“그곳에서는 스코프나 가디언의 적외선 시야가 크게 제한될 겁니다. 랜턴을 꼭 가져가셔야 합니다.”
“어렵지 않아. 혹시 모르니 여분도 하나씩 가져가라.”
보병에게서 랜턴을 빼앗듯 받아 든 카렐은 앞장서는 니사를 따라 성벽 아래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뒤따르는 가디언들 역시 보병들에게서 건네받은 랜턴을 급히 챙겨 뒤를 따랐다.
비로 미끄러워진 계단 위를 조심스레 걸어 내려가는 니사의 모습에 카렐이 답답하다는 듯 입가를 찡그렸다. 누군가 다가오는 느낌에 무심코 뒤돌아보려던 니사는 자신의 몸이 공중에 붕 뜨자 악 소리를 지르며 반사적으로 황제의 목을 꽉 껴안았다.
“시간이 없으니 어딘지 방향만 말해라.”
카렐은 니사를 왼팔에 안은 채 계단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악!”
바닥으로 뚝 떨어지자 겁먹은 니사가 카렐의 목을 껴안은 채 비명을 지르며 눈을 꽉 감았다. 카렐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비가 흥건히 고인 젖은 땅바닥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리고 뒤를 따르는 가디언들 역시 계단 중간께에서 몸을 휙 날려 고양이처럼 바닥에 내려섰다.
“어디냐니까.”
카렐이 재촉하듯 다시 묻자 니사가 그의 목에서 차마 팔을 풀지 못한 채 벌벌 떨며 말했다.
“지난번 그분과 만나셨던 그 집 지하.......”
“뭐?”
카렐이 그 매서운 눈동자를 움직여 니사를 슬쩍 흘겨보았다. 그에게 따질 것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당장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알았다.”
황제와 그를 따르는 30여 가디언들, 그리고 이곳 성벽에 배치되어 있던 북부보병 예비대 5백은 이젠 거의 폭우가 되어버린 험악한 날씨를 뚫고 텅 비어있는 황도 시내를 급히 가로질러 뛰기 시작했다.
황제의 ‘무조건 공격’명령을 하달받았을 때, 황성 남문의 아메샤 스펜타와 북부보병들은 ‘근위대 가디언들이 도망친’ 위병소와 경비중대 숙소를 완전히 포위한 채 추가병력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이게.......정말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이라고?”
아메샤 스펜타의 경비중대장은 명령이 믿어지지 않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들은 다 합쳐야 정규군 3백이 조금 넘었고, 건물 안에 갇힌 건 200명에 육박하는 가디언들이었으니 선제공격을 하라는 건 누가 듣기에도 ‘미친 짓’이었다. 가디언인 그는 물론이고, 휘하의 다른 가디언 지휘관들까지 이 말도 안 되는 공격명령에 크게 당황했지만 ‘황제의 명령’이라는 한 마디에 그들도 다른 도리가 없었다.
“적들이 왜 보이지 않지?”
중대장이 너무도 조용한 건물 안쪽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건물 안으로 도주한 적들은 조명도 모두 꺼 놓은 채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면공격할 생각이십니까.”
“미쳤나.”
중대장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불을 지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벽을 깨고 한 번에 쏟아져 나오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머릿속이 아파진 중대장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전력에서 지나치게 차이가 나는 그로서는 쳐들어갔다가 몰살당하는 것도, 불을 질러 적들을 쏟아져 나오게 하는 것도, 모두 생각하고 싶지 않은 시나리오였다. 그때, ‘빨리 공격하지 않고 뭘 하나’라는 재촉이 그의 스코프에 문자로 나타났다. 이제 그로서는 선택권이 없었다.
“가디언들을 선봉으로 공격한다.”
중대장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놈들은 건물 안에 갇혀 있으니 가디언들만으로 맞서게 시나리오를 짜 보면 승산이 없지않아.”
“알겠습니다.”
하급 지휘관을 맡고 있는 가디언들이 마지못해 무기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2열로 들어가고, 동선이 엇갈려서 오인공격하지 않도록 조심해.”
잔뜩 긴장한 동맹군 가디언들은 정규군 보병들을 일단 후미로 돌리고 빠른 걸음으로 건물을 향해 접근했다. 그들은 나름대로 몸을 잔뜩 낮추고 모습을 감추려 했지만 쏟아지는 비, 그리고 바닥에 흥건히 고인 물웅덩이 사이에서 정체를 감추기는 쉽지 않았다.
“왜 반응이 없지?”
건물에서 100척(30m) 정도 거리까지 접근한 가디언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군들에게 점거당한 건물은 불이 꺼진 채 조용했다. 가디언으로서의 예민한 감각으로도 안쪽에서 그 어떤 느낌을 얻을 수 없었다.
“조심해라. 흉계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니. 너희, 둘하고 둘. 위병소하고 경비숙소에 들어가.”
중대장이 가디언 4명을 가리켰다. 명령을 받은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건물로 다가가 얼른 안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깨진 유리창 안으로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잠시 두려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2층에서 누군가 머리를 쑥 내밀자 지레 놀란 중대장이 어깨를 들썩했다.
“미, 믿으실지 모르겠지만.......아무도 없습니다.”
먼저 들어간 정찰 가디언이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창밖에 대고 외쳤다.
“뭐?”
“건물 안은 텅 비었다고 말입니다!”
정찰 가디언이 팔을 저으며 답답하다는 듯 다시 외쳤다. 가디언들도, 시민병들도 순간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조금 전, 적군이 저곳에 들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던 그들이었다.
중대장이 술렁이는 부하들을 진정시키며 다른 소대를 가리켰다.
“너희 소대가 들어가서 내부를 확인해라. 모든 방을 다 확인해!”
중대장은 일단 할룩스를 켰지만 무어라 보고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는 다급한 얼굴로 나타난 보안국장 루토에게 더듬거리며 보고했다.
“무어라 보고해야 할지.......적들이 사라졌습니다.”
당혹해하고 있는 중대장보다 더 놀란 건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루토였다. 그는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곳에 지하로 들어가는 통로가 혹시 있었나?”
“아뇨, 그런 건 없었습니다. 지하실은 있지만 창고로 쓰일 뿐이었고.......”
“그곳을 모조리 뒤져라. 틀림없이 그곳에서 지하로 나가는 비밀통로가 있을 것이니 최대한 빨리 찾아내라.”
루토의 명령에서, 자신이 적을 놓쳤음을 깨달은 중대장은 입술을 꽉 깨물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니사가 알려준 ‘가정집’으로 달려가던 카렐에게 뜻밖의 보고가 들어온 건 목적지에 거의 다다른 그때였다. 할룩스에 나타난 건 황궁으로 보낸 지원 병력 5백을 이끌던 대대장이었다.
“적 가디언들이 황궁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있습니다!”
“시내에도 또 적들이 있다고?”
니사를 안은 채 달려가던 카렐이 헐떡이며 물었다. 성벽을 지키던 병력에서 기껏 털어내서 보낸 지원 병력이 중간에서 전진이 막혔다는 뜻이었다.
“그럼 도대체 몇 명이나 들어온 거야!”
잠시 자리에서 멈춰 선 카렐이 이를 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내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이들이 타크마가 ‘동맹군 지원 병력의 접근을 늦춰라’며 떼어 보낸 4소대라는 것을 그로서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잔말할 것 없다. 우회하든, 돌파하든 상관없으니 본대는 무조건 황궁으로 가! 놈들이 지난 공성전에서처럼 우리 후미를 치지 않게 묶어두는 거나 잊지 말고!”
지난번 수나 마구스를 만났던 집 앞에 거의 다다른 카렐로서는 그들에게 신경 쓸 여유가 더 이상 없었다. 카렐은 잠겨있던 문고리를 그대로 잡아 뜯으며 안에 뛰어들었다. 지난번 카렐이 왔을 때처럼, 집 안은 텅 비어있었다.
“바깥문을 모두 닫아라! 아무도 얼씬하게 하지 말고! 너희 5명은 남아서 이 출입문을 지켜!”
가디언 5명을 놔둔 채 집 안에 뛰어든 카렐은 비로 흠뻑 젖은 거추장스런 방수 망토를 벗어 내던지고는 니사와 마구스가 기다리고 있었던 그 뒷문을 확 열었다. 먼지 앉은 조리 도구들과 오래된 주방용품이 널려있는 그 한쪽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작은 쪽문이 있었다.
카렐은 니사의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마치 길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안으로 확 뛰어들었다.
지하실에 접어든 순간, 카렐이 움찔했다. 지하실 안은 지저분한 위층의 주방과는 달리 너무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책들이 가득 꽂힌 육중한 나무 책장, 그리고 중앙에 만들어진 트라카의 제단에는 누군가 켜 놓은 육중한 화로가 불꽃을 흔들며 이 예정에 없던 거친 손님들을 반기고 있었다. 하지만 언뜻 보이는 입구는 없었다.
“여기냐?”
니사를 바닥에 내려 준 카렐은 이마에 맨 검은 비단 머리밴드를 다시금 고쳐 묶으며 이 작은 성소를 빙 둘러보았다. 누군가 관리하고 있던 듯, 구석구석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지금부터 소인에게 손을 대시면 아니되옵니다. 폐하.”
“무슨 소리냐? 입구가 어딘데?”
다급한 마음에 니사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려던 카렐은 두 손을 가슴에 X자로 모은 채 화로 앞에 꿇어앉은 이 ‘신관’의 모습에 얼굴을 찡그렸다.
“빛의 수호자이시여, 불의 응징자이시여, 이 불경한 종의 출입을 부디 허락하소서.”
바닥에 이마를 몇 번이나 가져갔던 니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불타고 있는 화로를 두 손으로 덥석 붙들었다.
“이, 이봐.”
당황한 카렐이 니사를 급히 떼어내려 했지만 그는 작고 나약해 보이는 손에 온통 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힘을 꽉 주며 화로를 밀고 있었다. 살점이 타들어가는 소름끼치는 냄새와 함께, 육중한 화로 밑으로 사람 한두 명이 겨우 들어감직한 작은 구멍이 천천히 모습을 나타냈다.
“아, 악......”
화로를 밀어낸 니사는 타서 문드러진 손을 꽉 움켜쥐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당황한 카렐이 쓰러진 그를 와락 껴안았다.
“바보같이! 밀어달라고 하면 열 번이라도 밀어줬을 텐데! 맨손으로 뭐 하는 짓인가!”
“저걸 말입니까?”
니사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화로 옆, 그가 쥐었던 손잡이를 다시 가리켰다. 그 뜨거운 손잡이에는 화로 아래 바닥의 잠금장치와 연결된 작은 고리, 음성 판독장치, 그리고 지문 혹은 유전자를 감식하는 장치로 보이는 작은 센서가 붙어 있었다.
“제 기도의 목소리, 그리고 살아있는 제 살점을 불에 바치지 않는 한, 신께서는 문을 열어주지 않으십니다.”
순간 보인 니사의 기묘한 미소에 카렐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만 같았다. 결국 지금까지 니사가 한 기이한 행동들은 이 정교한 출입 통제장치를 열기 위한 절차에 불과했다.
“빨리 들어가십시오. 이 문은 정확히 30초간만 열려있을 겁니다.”
순간 욱한 카렐이 무어라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는 손을 움켜쥔 채 신음하는 니사를 급히 안고 좁은 구멍 안으로 몸을 우겨넣었다. 그리고 25명의 가디언들 역시 문이 닫히기 전 화급히 구멍 안에 들어섰다.
“아무도 온 적이 없었나.”
구멍 밑은 바닥이 거의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사다리였다. 그리고 사다리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인 듯, 먼지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카렐이 채 바닥을 딛기도 전에, 머리 위의 작은 구멍이 우르릉거리며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세상에 온 걸 환영한다, 카렐.”
사다리에 매달린 카렐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앞에 보이는 건 가디언인 그에게는 익숙지 않은 짙은 어둠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거의 대낮과 다름없이 볼 수 있던 그였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수직으로 뚫린 통로의 희미한 윤곽만 가까스로 보일 뿐이었다.
“엇.”
바닥에 내려선 카렐은 하마터면 발을 헛디디고 넘어질 뻔했지만 벽의 기둥을 얼른 붙들고 어렵게나마 일단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니사가 고통이 섞인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가디언이라면 넘어졌을 것입니다. 폐하께선 다른 가디언보다 가시(可視) 파장대가 훨씬 넓으니......”
“내가?”
카렐이 뒤따르는 카토에게 급히 물었다.
“이봐, 네 눈에는 지금 주변이 어떻게 보이지?”
“체온 때문에 폐하 몸의 윤곽만 희미하게 보입니다. 폐하의 체온이 워낙 다른 사람보다 낮아서.......주변 기물은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위장포까지 입으시면 완전히 암흑이 될.......아쿠!”
아니나다를까, 바닥을 딛자마자 무기력하게 엉덩방아를 찧은 카토가 당황한 표정으로 팔을 휘저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니사를 바닥에 내려 준 카렐은 눈에 힘을 주며 제자리를 한 바퀴 빙 돌았다.
“내 눈엔 그 정도는 아닌데?”
그의 눈이 낯선 어둠에 서서히 적응하면서,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새롭고도 기묘한 영상은 카렐 자신도 놀랄 지경이었다. 곳곳의 벽, 그리고 바닥과 움직이는 사람의 형상, 체온과 찬 공기의 흐름이 희미하지만 화려한 파란빛 물결의 영상으로 서서히 그의 뇌 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아니 가디언들에게는 안 이렇다고?”
“그렇습니다.”
니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폐하만이 그렇게 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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