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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571화 (570/1,132)

< -- 571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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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사의 지나치리만큼 또렷한 대답에, 카렐은 잠시 그의 눈빛에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곧 부하들을 향해 얼굴을 돌리며 위장포를 벗었다.

“그러면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명령하면 랜턴은 바로 끄도록 해라. 내가 어둠 속에서 볼 수 있다는 것 하나는 우리가 유리하니까.”

뒤따라 내려오는 가디언들을 올려다보던 카렐은 니사의 등에 지고 있던 작은 구급낭을 급히 열었다.

“폐하?”

당황한 니사에게 말하지 말라며 손짓을 해 보인 카렐은 불에 탄 그의 작은 손바닥에 손수 화상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저 구멍은 앞으로는 들어올 생각도 말아야 하겠어. 꼴이 도대체 이게 뭐냐.”

“.......”

다친 손에 약을 바르고 재빨리 드레싱까지 해 주는 황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니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랜턴 불빛에 희미하게 비치는 그의 날카로운 옆 얼굴, 그리고 어둠 속에서 붉은 빛을 뿜는 그의 눈동자를 흐릿해진 시선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가자. 내 체온만 따라오도록 해.”

니사의 손에 약을 발라 준 카렐은 약통을 다시 구급낭에 넣어주고는 그를 불끈 안아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길은 하나뿐이군.”

카렐은 니사가 불빛으로 가리키는 복도를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신전?”

지하로 향하는 가파른 램프를 따라 한참을 달려온 그들의 앞에 펼쳐진 건 12면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지하 홀이었다. 교단의 다른 여느 성소들처럼, 중앙에는 사각형의 큰 제단이 있었고, 각 면을 따라 하나씩 세워진 기둥에는 12명의 각 신을 상징하는 화려한 양각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돔으로 만들어진 천장에는 트라카 신을 상징하는 혜성 문양의 벽화가 오랜 세월의 찌든 때 속에서도 화려한 색상을 뽐내고 있었다.

“역시나, 트라카 신전이었군.”

카렐이 니사를 돌아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지금 몇 시입니까?”

니사의 뜬금없는 물음에 카렐이 시계를 보며 건성 대답했다.

“02시 59분.”

“예?”

순간, 깜짝 놀란 니사가 카렐의 어깨를 두드리며 들어온 복도 맞은편, 카타콤베 안쪽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출구를 가리켰다.

“빨리 들어가셔야 합니다! 3시 정각이면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닫히게 됩니다!”

무슨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니사의 느닷없는 재촉에 카렐은 이 웅장한 신전을 다만 몇 초라도 더 둘러보고픈 유혹을 일단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뒤따라오는 가디언들에게 급히 손짓을 보내며 맞은편 출구로 허겁지겁 달렸다.

“빨리! 빨리 따라와!”

지름만 100척(30m)이나 되는 신전을 급히 가로질러 뛰어간 카렐은 맞은편 출구에 제일 먼저 뛰어들었다. 회랑은 양쪽으로 각각 뚫린 좁은 복도, 그리고 정면으로 뚫린 조금 넓은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에 뒤이어, 카토를 선두로 25명의 가디언들이 영문도 모른 채 무작정 황제의 뒤를 따라 달려왔다.

“씨발! 3시라고!”

시침이 바뀌는 것을 확인한 카렐이 제일 마지막에서 달려온 카토를 급히 회랑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순간, 니사의 말대로, 묘한 진동음과 함께 바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 으엑!”

마지막으로 뛰어든 카토는 중심을 잃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고, 다른 가디언들 중 몇도 어둠 속에서 중심을 잃고 바닥이나 벽을 붙들어야 했다.

“뭐, 뭐냐?”

카렐의 휘둥그레진 눈동자는 조금 전 자신이 지나온 트라카 신전이 왼쪽으로 움직이는---혹은 자신들이 딛고 선 회랑이 오른쪽으로 도는 것이던지--- 광경에 멎을 수밖에 없었다. 신전을 향해 뚫려 있던 구멍은 단단한 화강암 벽으로 가려진 이후로도 계속 왼쪽으로 움직였다.

“지금 도대체 누가 움직이는 거냐?”

“저쪽에서는 우리가 움직인다고 할 테고, 우리가 보기는 저쪽이 움직이는 것이겠죠.”

“지금 자네와 물리학 논쟁을 하자는 게 아냐. 난......”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던 카렐은 움직이는 화강암 벽 너머 전혀 새로운 공간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순간 움찔했다. 바닥의 진동이 조금씩 약해지면서, 카렐 일행이 서 있던 회랑은 이 ‘새 공간’의 입구와 정확히 맞물리면서 다시 정지했다.

“다.......끝난 겁니까?”

놀라움에 떨고 있던 가디언들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가도 되는 건가?”

아무러한 카렐도 이 순간 발을 내디디는 데 조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에도 조금만 늦었더라면 일행이 두 토막이 나던지, 누군가 문에 걸리는, 상상하기도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젠 괜찮습니다.”

니사 역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카렐의 큰 손을 붙들었다. 카렐은 ‘새 공간’에 들어서서 천장을 올려보았다. 조금 전 지나 온 ‘트라카 신전’과 똑같은 규모, 똑같은 구조와 형태였지만 천장에 그려진 벽화는 혜성이 아닌, 나뭇가지 다발의 문양이었다.

“여긴 아나히타 신전? 트라카 신전은 어디로 가고?”

카렐은 머릿속이 복잡한 듯 이마를 싸쥐었다.

“시간이 없지만.......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트라카 신의 축복의 시각은 3시, 아나히타께선 4시, 다하카르 신께서는 6시입니다. 우리는 3시 방향의 트라카 신전에서 30도를 돌아 4시로 온 겁니다.”

“무슨 뜻이냐?”

니사를 바닥에 내려주며, 카렐이 눈가에 힘을 잔뜩 주었다. 니사가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급히 그림을 그려 보였다. 2개의 동심원, 그리고 그 중심에서 12방향으로 각각 뻗어나가는 6개의 선이 마치 거미줄처럼 차례대로 그려졌다.

“카타콤베의 통로는 중앙을 관통하는 방사형의 회랑들, 그리고 안쪽과 바깥쪽, 2개의 동심원 순환 복도로 구성됩니다. 직선 회랑의 폭은 5척(1.5m) 정도지만 순환복도는 그 절반으로 무척 좁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니사가 빠른 손길로 완성해가는 그림은 카렐은 물론 가디언들의 눈에도 익숙한 어떤 형태였다.

“이건.......시계?”

“이 카타콤베는 그 자체가 12시간, 모두 12분의 신들을 상징하는 거대한 시계입니다. 카타콤베 외곽을 빙 둘러 12개의 신전이 있고, 바깥쪽 순환복도에서 안쪽 순환복도사이의 이 도넛 모양 구조는 시침으로 1시간마다 움직입니다. 안쪽 순환복도를 포함한 그 안쪽 원형 부분은 분침으로 매 5분마다 움직입니다.”

니사의 간단한 스케치만으로도, 황제, 그리고 카토의 입을 놀라움에 쩍 벌어지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 아니 그냥 지하 구조물이 아니고.......도대체 무슨 동력으로 수백 년 동안을 움직였다는 거지?”

“이곳은 욱리하의 수력으로 움직이는 반영구적인 기계장치입니다. 이마 230년, 아케메니안 궁을 처음 건립하면서 같이 만들어진 장치입니다.”

“그럼, 네가 말한 그 ‘축복의 시각’은 그 신전이 폐쇄되는 때를 뜻하는 거냐?”

“시침, 그러니까 바깥쪽 회랑과 순환복도는 ‘막혀있는 1개’가 바늘을 뜻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12개의 신전 중 ‘축복의 시간’을 맞은 신전과 그 맞은편 신전은 ‘폐쇄 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 2개의 신전으로 향하는 통로는 회랑이건, 외곽 복도건 모두 폐쇄됩니다.”

카토가 이해하기 복잡하다는 듯 얼굴을 살짝 찡그렸지만 니사는 빠른 어조로 계속 설명을 이었다.

“바깥쪽 시침이 돌면서, 폐쇄되는 신전은 매 1시간마다 바뀌게 됩니다. 지금은 보시다시피 3시의 트라카 신전과 9시의 스루바라 신전이 폐쇄된 상태입니다.”

“안쪽의 분침은?”

“안쪽 회랑과 순환복도는 외부의 시침과는 반대로 ‘열려있는 1개’가 분침입니다. 5분마다 30도씩 그 전체가 도니까 이곳 카타콤베의 통로 개폐상태는 매 5분마다 계속 바뀌는 셈입니다.”

“내부에서는 나침반도 작동되지 않고, 길 자체가 움직이니.......설사 지금 시간을 안다고 해도 방향을 잃는다면 자기도 모르게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겠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원리 자체가 복잡한 건 아닌 듯 한데? 이 스케치대로라면.......”

“이건 모식도일 뿐이지 실제 내부는 이렇게 매끈한 직선이나 곡선은 아닙니다. 상하기복도 심하고 바닥 마감, 통로의 폭도 제각각입니다. 심하게 꺾이는 길이나 막다른 함정도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니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근위대장이 이 비밀을 모두 알고 있다면 모를까 그것이 아니라면.......이 안에서 스스로의 행운을 시험해야 할 겁니다.”

“적들이 뒤를 쫓을지 모르니 흔적을 남기지 마라! 여기도 그대로 보존해! 아무 것도 건드리지 말고!”

베흔은 지하로 내려온 가디언들을 일렬로 최대한 빨리 전진시키며 그들을 단속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곳까지 오는 과정에서 20명을 잃었고, 4소대 35명은 타크마가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지만 그래도 그가 단속해야 할 병력은 150여명이나 되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베흔은 50여명이 줄어든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내심 생각하던 참이었다.

“묻은 거 다 털어내! 발자국을 남기면 안 되니까!”

타크마가 구멍을 막 빠져나온 부하의 흙투성이 머리를 털어주며 명령했다. 다하카르 신전의 출구가 막혀있던 덕택에 전진은 예상보다 더 더뎠다. 베흔 일행이 힘들게 뚫었던 구멍은 덩치 큰 가디언들은 1명이 가까스로 통과할 정도였고, 중간중간 체격이 더 큰 놈이라도 있을라치면 몇 명이 달려들어 불안감 속에서 다시 구멍을 넓혀야 했다.

“또 시작이군요.”

갑자기 바닥을 울리는 진동에, 움찔한 타크마가 한 명이 벽을 짚으며 투덜댔다. 5분마다 한 번씩 반복되는 이 미세한 진동에 처음에는 신경을 곤두세웠던 가디언들은 이제 그럭저럭 익숙해졌는지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조금 전.......3시 정각에 있었던 진동은 조금 길고 강했는데.......도로 약해졌군요.”

“그런 데 신경 쓸 것 없어. 계속 주기적인 걸 보니까 우리하고는 별 관계없는 것 같아.”

베흔은 손을 저으며 일단 말을 돌렸다.

“드루그 말고 타크마 널 불러온 게 그나마 다행이야. 그 덩치가 이 구멍 통과하려면 혼자 10분은 잡아먹었을 거다.”

진짜 호의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베흔의 알쏭달쏭한 농담에 타크마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좁은 복도를 랜턴으로 비추며 조심스레 말했다.

“150명이 한 번에 움직이기는 복도가 생각보다 너무 좁습니다. 이대로는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것 같은데 부대를 셋 정도로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베흔은 ‘자기만의 부대’를 이끌고 작전을 펼치고 싶은 타크마의 욕심을 바로 눈치 챘지만 그의 말이 나름 일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카타콤베의 복도 폭은 넓어야 2, 3명이 통과할 정도였고, 중간중간 무너지면서 돌아가야 했던 우회로의 폭은 그나마 더 좁아서 가디언 1명만 서도 양쪽이 꽉 찰 정도였다.

“그렇긴 한데 지도에 나와 있는 길이 그다지 정확치를 않아.”

베흔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지도를 내보였다.

“3부대로 나누어서 가려면 길이 3개여야 하는데, 두 부대는 안 가 본 길을 새로 뚫어야 한다. 자칫 길을 잃으면 헤맬 수도 있어.”

“방향이 틀렸으면 되돌아오면 되겠지요.”

타크마가 지도의 사본에 랜턴을 들이댔다. 그곳에는 베흔이 내려온 길이 노란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타크마가 이번에는 붉은 펜으로 선을 긋기 시작했다.

“대장은 북쪽의 에아 신전에서 회랑을 따라 쭉 남진해 오셨으니 오셨던 길을 따라  안전하게 그대로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하지만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카타콤베는 6개의 방사형 회랑을 큰 축으로 작은 협로가 2개의 동심원을 그린 거미줄 형태입니다. 각 방사형 회랑 끝에는 12개의 신전이 마치 시계의 숫자판처럼 자리잡고 있고요.”

“그래서?”

“남북을 가로지로는 방사형 회랑이 물론 최단거리이기는 하지만 서쪽과 동쪽의 협로를 타고도 에아 신전으로 우회해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3개 소부대로 나누어서 전진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그래,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타크마의 제안이 합리적이기는 했지만 이곳까지 길을 뚫는 데만도 지독한 고생을 했던 베흔으로서는 어딘지 미덥지를 않았다. 중간중간 막힌 길이 널려있었다 보니 어디가 막혔는지, 어디가 열려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한 부대에 행여 문제가 생겼을 때 통신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문제 또한 있었다.

잠시 고민을 하고 난 베흔이 일단 절충안을 내놓았다.

“길을 찾지 못한다면 되돌아와라. 거리 자체는 먼 것이 아니니 10분 정도면 아는 길로 뒤따라올 수 있을 거다. 03시 50분에 에아 신전에서 만나자.”

“알겠습니다.”

“난 2소대를 데리고 왔던 길로 가겠다. 넌 3소대를 데려가서 우측으로 우회하고, 1소대는 소대장이 직접 이끌면서 좌측으로 우회하도록 해. 그래, 타크마 네 말대로 150명이 일렬로 간다고 해도 어차피 그 정도 시간은 지체될 테니까.”

베흔은 지도의 사본을 타크마와 1소대장에게 각각 내밀었다.

“3방향으로 흩어진다. 모두 에아 신전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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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 추가 설명이 필요하신 분들께선 팬카페 http://cafe.daum.net/TheIronVein 의 Tasawwuf`s Story 게시판을 확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림과 약간의 해설을 올려놓았습니다. ^^ 유조아 삽화 기능에는 넣을 수가 없군요;;>

참;; 가기 전에 코멘트나 추천은 잊지 마시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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