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72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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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대장이 다하카르 신전으로 진입했다면 그곳에서 정북으로 전진하려 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마도 중앙 홀 직전에서 막힌 길을 만났을 겁니다.”
“안다.”
이미 이곳의 회전을 머릿속에 모두 그려넣은 카렐이 무어라 더 설명하려는 니사에게 짧게 대답하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는 4시의 아나히타 신전에서 외곽의 좁은 순환복도를 따라 시계방향으로 내려오던 참이었다.
“놈이 이곳의 메커니즘을 모른다면 지금은 6시의 다하카르 신전 북쪽 어딘가에서 헤매거나 다시 되돌아오고 있겠지.”
갈래길에서 잠시 멈춰 선 카렐이 양쪽을 돌아보았다.
“왼쪽은 6시의 수호신이신 다하카르 신의 신전입니다. 아마 적들이 저곳으로 들어왔을 겁니다.”
니사가 가리킨 곳에는 무너진 흙더미, 그리고 누군가 최근에 뚫은 구멍이 신전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저긴 왜 저래? 왜 막혀 있지?”
“옛날에 저곳에서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장 들어가 보고 싶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군.”
카렐은 아쉬움을 애써 감추며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런 곳을 왜 만든 거지?”
카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팔에 안긴 니사에게 물었다.
“12분의 신들께선 1년에 12번 바뀌는 달을 상징하시고, 12시간을 각각 나타내십니다. 그 뜻을 나타내기 위한 조형물일 뿐입니다.”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원리를 아는 사람에게는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습니다.”
니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12분의 신들께선 각각의 시간을 가지고 계십니다. 당신의 시간, 그리고 반대방향으로 마주하고 있는 신의 시간에 고요함 속에서 휴식을 가지실 수 있도록......”
“잠깐, 이제 슬슬 입단속을 해야겠다.”
자리에서 멈춰 선 카렐은 뒤따르는 가디언들에게 입을 열지 말라 수화를 보내고는 팔에 안겨 있던 니사에게도 입을 가려보였다. 그리고는 위장포로 그의 얼굴까지 완전히 가려버리고는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군용 수화를 모를 테니 할 말이 있으면 내 어깨를 꾹꾹 누르도록 해. 이제 불을 끄겠다.”
니사는 카렐의 목을 돌려안은 팔에 힘을 꽉 주며 고개를 살며시 끄덕거렸다. 랜턴이 완전히 꺼지면서, 이제 그가 느낄 수 있는 건 자신을 안고 있는 카렐의 낮은 숨소리와 심장박동, 그리고 체온뿐이었다. 어둠에서 오는 본능적인 공포감에, 그는 카렐을 안은 팔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내 신진대사를 최대한 낮출 테니 너희는 앞사람 어깨를 붙들고 따라오도록.’
카렐이 수화로 뒤의 부하들에게 일렀다. 어둠 속에서 부하 가디언들을 인도하던 카렐의 체온이 조금씩 식으면서, 가디언들의 적외선 시야에 보이던 그의 모습도 점점 희미해졌다. 이제 앞을 볼 수 있는 건 난생 처음 사용해보는 파란 시야로 어둠을 꿰뚫는 카렐뿐이었다.
‘3시 35분입니다.’
카토가 카렐의 어깨를 툭툭 치며 수화를 보냈다. 그리고 어김없이, 짧은 진동이 그들의 발밑을 울렸다.
‘좋아.’
카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다하카르 신전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직진해 왔으니 조금만 더 전진하면 베흔과 만날 거다.’
카렐의 희미한 형상이 손놀림을 딱 멈추었다. 그의 정면, 완만하게 꺾이는 모퉁이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막다른 길에서 되돌아오던 타크마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자신이 한 괜한 제안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는 죄책감이 그의 무거운 기분을 더더욱 짓누르고 있었다.
“대장은 지금쯤 도착했겠지?”
타크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일행이 맞이한 길은 그다지 순탄치 못했다. 그의 원래 계획은 5시 에시마 신전 앞에서 왼쪽으로 돌아 안쪽 순환복도를 타고 북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깥쪽 순환복도를 타고 크게 빙 도는 것보다는 시간을 절약하리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안쪽 순환복도에서 사방으로 막다른 길을 만났고, 결국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베흔의 지시대로, 다하카르 신전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에시마 신전일 테니까.......”
방향을 잃은 타크마는 지금 자신이 왔던 길을 남남동으로 되돌아가 5시의 에시마 신전을 향해 걷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안쪽 순환복도에서 헤매는 동안 ‘분침’이 돌면서 실제로는 6시의 다하카르 신전을 향해 정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길이 어딘지 낯설지 않습니까? 처음 온 길이 아닌 것 같은데요?”
3소대장의 물음에 타크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한참 전부터 하던 참이었다.
“일단 내려가 봐. 에시마 신전까지만 가 보면 위치가 확실해질 테니까.”
행렬의 선두에 선 타크마는 앞쪽으로 랜턴을 향하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시간에 쫓긴다는 조바심이 그를 더더욱 괴롭히고 있었다.
“또 갈래길이군요.”
“좁은 걸 보니 또 눈속임이야. 큰길부터 가 보고 아니면 돌아오지 뭐.”
이미 수십 번도 더 만난 미로에 지쳐 있던 타크마가 별 것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3시 35분입니다.”
3소대장이 시계를 다시금 확인하며 앞뒤를 두리번거렸다.
“알아, 아니까 자꾸 상기시킬 것 없어. 넌 가서 후미나 제대로 지켜. 거기는 랜턴이 없으니 깜깜할 것 아냐.”
타크마의 짜증스런 대답에 소대장이 무안한 표정으로 원래 위치인 제일 후미로 물러났다. 방사형 회랑은 순환복도에 비하면 그나마 길이 넓은 덕분에 지금은 2열로 걷고 있었다. 하지만 셋으로 부대를 잘랐어도 50명이 넘다보니 대오는 꽤나 길었다. 하지만 이 많은 가디언들이 어두운 카타콤베를 전진하면서 쓸 수 있는 랜턴은 타크마, 그리고 3소대장이 지닌 딱 2개뿐이었다.
이마에 랜턴을 묶은 3소대장은 벽 쪽에 붙은 채 전진하는 2열의 부하들 사이를 통해 대오의 제일 후미로 물러났다.
“뭐야!”
대오의 제일 뒤에서, 갑자기 눈을 찌를 듯 밝은 빛이 비춰지자 소대장이 깜짝 놀라며 눈을 가렸다. 희미한 조명 속에서 전진하던 가디언들이 반사적으로 빛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들 역시 그 엄청나게 환한 빛에 놀라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공격!”
조금 전의 그 ‘갈래길’에 숨어 있다가 쏟아져나온 건 카토를 선두로 한 15명의 동맹군 가디언들이었다. 근위대 후미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한 카토는 빛에 놀라 뒷걸음치던 3소대장의 배에 사정없이 칼을 박아 넣었다. 카토의 번개같은 기습에 그는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채 바닥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잘 걸렸다!”
카토는 소대장이 쓰러지며 떨어뜨린 랜턴을 재빨리 짓밟아 부숴 버렸다. 이제 3소대가 가진 랜턴은 타크마가 가지고 있는 하나뿐이었다.
“길목만 막아! 막기만 하면 된다!”
카토와 함께 나온 동맹군 가디언들은 순식간에 회랑을 채우고 근위대 가디언들의 후미를 조이기 시작했다. 근위대 가디언들이 숫자로는 3배가 넘게 많았지만 양옆이 막힌 이 좁은 회랑에서 숫자의 차이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아니, 열이 길게 늘어진 근위대 쪽이 도리어 더 불리했다.
“뭐냐!”
대오 후미에서 들려온 비명소리에 놀란 타크마는 오른손에 시미터를, 왼손에 단검을 뽑아들며 부하들을 헤치고 후미로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귀에 익은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런, 베흔이 아니라니, 실망이 막급이군.”
타크마는 벌벌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랜턴 불빛 너머, 제일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상대의 이마에 맨 검은 비단띠와 그곳에 새겨진 화려한 금빛 용 문장이었다.
“하, 악.......”
타크마의 숨결이 멎었다. 카렐은 랜턴도 켜지 않은 채, 눈을 붉게 번득이며 어둠 속에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도 십여명의 동맹군 가디언들, 심지어 구석에서 보호받고 있는 웬 여자 민간인도 보였지만 이 좁고 긴 회랑에서는 굳이 그들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좁은 이곳에서는 카렐 혼자 돌진해도 양쪽이 차단당한 근위대 가디언들이 ‘줄줄이 도살’당하기는 충분했다.
“오랜만이다, 타크마. 특등급으로 승급했다지?”
붉은 눈을 번득이며 살짝 이를 드러내는 카렐의 표정이 이토록 악마적으로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베흔에게 감사해야겠군. 아주 싱싱한 특등급을 내게 선물해 줬으니.”
카렐의 손에 들린 ‘나즈라의 검’이 살짝 꺾이며 타크마의 얼굴에 파란빛 반사광을 비쳤다.
“내가 지금 무얼 말하려는 건지 알겠지?”
“저 전.......”
타크마는 지금 카렐에게 저항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무작정 투항하는 것 역시 무장으로서의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표정을 먼저 읽어낸 건 카렐 쪽이었다.
“그럼 하나 뿐이군.”
기겁을 한 타크마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쳤지만 칼을 세우고 돌진해오는 카렐 쪽이 훨씬 더 빨랐다.
“악!”
반사적으로 칼을 내밀어오는 타크마의 팔을 단번에 잘라낼 수도 있었던 카렐이었지만 이번은 그러지 않았다. 둘의 칼이 쾅 소리와 함께 맞부딪혔지만 더 충격을 받은 쪽은 타크마였다. 그는 저린 손을 움찔거리며 자리에서 몸을 낮추었고, 카렐은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거칠게 올려치는 카렐의 무릎에 팔과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타크마는 피투성이가 된 코를 움켜쥐고 다시 주춤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의 이마에 달고 있던 랜턴이 깨져버린 것이었다. 랜턴이 부족하다보니 그를 도와 ‘빛을 비춰 줄’ 랜턴이 더 이상 없었다.
“충분히 짓밟아 주지!”
“이, 이런.......”
다시 뒷걸음치던 타크마는 등 뒤로 부딪히는 무언가에 지레 놀라 무작정 칼을 휘둘렀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적외선 시야를 사용할 수 없는 이 공간에서 빛까지 잃으면서, 그는 순식간에 눈뜬장님이 되어 있었다.
“볼만하군.”
어딘가에서 카렐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어둠 속을 다시금 울렸다. 하지만 그가 상대를 죽이지 않기 위해 일부러 칼을 쓰지 않고 있음을, 그리고 그가 다가오고 있는 미세한 기류 변화를 눈치 챈 타크마는 왼손의 단검을 방금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무작정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곳에서는 허무하게 바람 가르는 소리만이 들렸을 뿐이었다.
“내 자비심을 시험하는 거냐!”
또다시 어딘가에서 나타난 카렐은 단검을 휘두르는 타크마의 손을 오른발로 사정없이 짓밟으며 왼발로 그의 얼굴을 다시 걷어찼다.
“아, 악!”
왼손이 밟혀 으스러지고, 얼굴을 강타당해 의식까지 희미해진 타크마가 어두운 바닥에 무력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오른손으로 칼을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쓸만한 놈이었다니.”
잠시 숨을 고른 카렐은 바닥에서 혼자 칼을 휘두르며 허우적대는 타크마의 모습을 혀를 차며 잠시 지켜보았다.
“칼을 놔라. 이번이 내 마지막 자비다.”
“우욱!”
가슴을 내리누르는 육중한 무게감에 타크마는 순간 한 움큼의 피를 공중으로 토해냈다. 마구 칼을 휘둘러대던 그의 팔에서도 조금씩 힘이 빠져갔다. 카렐은 그제야 타크마의 가슴을 밟고 있던 발을 천천히 치웠다. 대장이 쓰러졌지만, 근위대 중 누구도 감히 카렐에게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갈비뼈가 부서졌으니 어차피 걷기 힘들게야.”
“저, 전......”
카렐이 랜턴을 켜고 타크마의 얼굴을 비추며 다시금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무의미한 저항을 하던 타크마는 결국 양손의 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치욕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카렐은 그런 그의 옆에 쪼그려 앉으며 피묻은 뺨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내 도움이 없다면 너희들 모두 이 지독한 미로에서 영영 빠져나가지 못하고 바싹 말라 미이라가 되어버릴지도 몰라. 무슨 뜻인지 알겠나?”
“지도가 조금 틀렸을 뿐이지......”
“지도?”
카렐은 신음하는 타크마의 가슴에 삐죽 튀어나온 지도를 냉큼 빼앗았다. 지도를 펼쳐보았던 카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카렐도 난생 처음 보는 희귀한 자료였지만 첫눈에도 그 내용을 대강은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도 알지 못할 몇 내용들이 섞여있기는 했지만.
“이 지도는 틀리지 않아.”
“예?”
“지도를 볼 수는 있었지만 읽지는 못했군. 네겐 휴지조각일 뿐이야. 이젠 어쩌겠나. 부하들을 다 죽이겠나?”
칼을 쥔 카렐의 손등에 힘줄과 핏줄이 다시 곤두섰다. 타크마에게는 이제 남은 선택이 얼마 없었다.
“3소대.......무기를 내려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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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사정으로 개인지 2부 표지 공개가 조금 늦어졌습니다. ^^
조만간 팬카페에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