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74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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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도대체........뭐냐.......”
후배 가디언 하나를 바닥에 잡아당긴 채 맥없이 주저앉아 있던 1소대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베흔이나 타크마같은 지도급 가디언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함정에 빠졌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만한 베테랑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화강암 벽을 쾅쾅 두들겨 보았지만 미세한 진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 돌벽 뒤는 그냥 빈 것도 아닌, 그냥 단단한 화강암 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벽을 짚은 채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죠?”
소대원들이 공포어린 눈길은 마찬가지로 막막한 궁지에 빠져버린 이 소대장만을 향하고 있었다. 벽을 짚은 채 조금 전 보았던 지도를 머릿속에 몇 번이나 그려보며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그는 다시금 발밑에서 울리는 쿠르릉 하는 얕은 울림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금 몇 시냐?”
“04시 05분입니다.”
“작은 소리는 5분마다 한 번씩이군. 이 벽은 04시 정각에 움직였었고.......이번엔 안 움직였고.......”
잠시 입술을 깨물었던 1소대장은 이마에 단 랜턴의 광도를 높이며 뒤로 휙 돌아섰다. 원리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신전이 시간에 맞춰 살아 움직이는 무시무시한 유기체라는 것 정도는 이제 알 수 있었다.
“계속 간다.”
“예? 어디로요?”
“정확치는 않지만.......이 벽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안 움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갈 출구가 없습니다.”
“없지는 않지........아마도.”
소대장은 막혀버린 벽 반대편을 가리켰다. 카타콤베 반대편인 그곳에는 또다른 복도가 지상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까 다하카르 신전에서도 카타콤베 반대편에 황궁 남문 위병소로 나가는 문이 있지 않았었나. 저쪽 반대편에도 무언가 있겠지.”
소대장은 무기력하게 주저앉아있는 부하들에게 일어나라고 손짓을 보냈지만 선임가디언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에아 신전으로 가서 베흔 대장과 합류해야.......”
“어느 세월에.”
소대장이 단호하게 대답하며 앞장서 걸었다.
“12시 방향 에아 신전은 포기한다. 지도상 위치로 보아 여기는 10시 방향이니 황궁 본관에도 아주 가깝다. 나가서 위치를 보고, 나쁘지 않으면 외부에서 우리만이라도 황궁을 직격한다. 어차피 황궁은 우리들에게 익숙하지 않나.”
“알겠습니다.”
분대장들, 그리고 말단 가디언들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지휘권자의 명령을 거스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 다른 길’을 결정한 1소대원들은 당초 이곳에 들어왔을 때와 비슷한 오르막 램프를 따라 급히 걸어올랐다. 소대장의 예상대로 이곳의 구조 역시 처음 들어왔던 다하카르 신전과 마치 쌍둥이처럼 비슷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얼마 가지 않아 램프의 끝에 다다랐다.
“여기도 나선계단입니다.”
선임가디언이 랜턴으로 머리 위를 비추었다. 다하카르 신전에서처럼, 긴 나선계단이 공중으로 높이 솟구쳐 있었다.
“이 위가 어디일까요?”
“글쎄. 이런 것도 흥미진진한걸.”
소대장이 부하들에게 힘을 주려는 듯 나름대로 밝은 투로 말했다.
“도상 위치로 보아서는 황궁 서쪽별관 부근이거나 본관 서쪽쯤 되겠지. 일단 모두 따라와.”
소대장은 양손검을 등에 불끈 짊어지고는 몸소 앞장서 달려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예상대로, 한참을 돌아서 올라간 꼭대기에는 좁은 구멍과 철문이 위를 단단히 막고 있었다. 소대장은 단검을 뽑아 자물쇠 사이에 꽂아넣고 있는 힘껏 잡아당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좀 도와줘 봐.”
소대장의 손짓에 다른 가디언까지 함께 달려들어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꽤 오랫동안 쓰인 일이 없었는지, 자물쇠와 묵직한 손잡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다들 달려들어.”
문이 열리지 않자 문에 달라붙은 가디언들도 한 명, 두 명씩 계속 늘어났다. 결국 손 짚을 곳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가디언들이 낑낑대며 달라붙어 잡아당기자, 지금껏 고집스레 저항하던 버팀대가 비로소 조금씩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번에!”
소대장의 구령에 맞춰 모든 가디언들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버팀대를 잡아당긴 순간, 갑자기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아래로 확 열리며 물에 흠뻑 젖은 무거운 흙더미와 자갈, 그리고 빗물이 우루루 쏟아져 내렸다.
“아악!”
흙과 돌에 깔린 몇몇 가디언들이 비명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았고, 부서진 두꺼운 철제 문짝은 계단 난간 한쪽을 산산조각내고 까마득한 바닥으로 너풀거리며 떨어져갔다.
“다친 사람?”
마찬가지로 온통 진흙을 뒤집어썼던 소대장이 축축한 흙더미를 힘겹게 헤치고 엉금엉금 기어나와 부하들을 급히 둘러보았다.
“저희 분대 4명이 머리를 다쳤고 3명이 팔과 다리를 조금 다쳤습니다. 다행히 중상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됐어, 그럼. 너희 분대는 대오 후미에 위치해라.”
소대장 역시도 머리 한쪽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짐짓 괜찮은 척 재빨리 모자를 눌러쓰고는 위를 다시금 올려보았다. 반쯤 무너진 흙더미 사이로 비가 들이치는 밤하늘이 멀리 보였다. 과정이야 어쨌든, 바깥은 바깥이었다.
“제가 살피겠습니다.”
소대장이 다친 것을 눈치 챈 선임 가디언이 몸에 로프를 묶고 재빨리 그 구멍에 몸을 우겨넣고 기어나가기 시작했다. 젖은 흙이 계속 흘려내려 발길을 붙잡았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몸을 날려 위로 기어나갔다. 두께가 거의 12척(3.6m)은 될 두꺼운 토사와 자갈층이 신전 출구와 지표 사이를 덮고 있었다. 황궁을 새로 지으면서, 하오마 신전의 출구는 이렇게 아예 흙 속에 파묻어버렸던 모양이었다.
이곳에 올 때보다 더 심해진 거친 빗줄기가 머리 위에 들이붓듯 쏟아졌다.
“후훗.”
‘땅 위’에 머리를 내민 선임 가디언이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낮게 웃기 시작했다.
“거기가 어디냐?”
“올라오시면 압니다.”
선임가디언이 밧줄을 버티어주며 사뭇 밝게 대답했다. 로프를 붙들고 기어나온 소대장은 움찔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나온 곳은 황궁의 서쪽 별관과 본관 사이, 낮은 관목으로 덮인 잘 다듬어진 정원 중간이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멀지 않은 곳에서, 황궁 본관으로 들어가는 북서쪽, 남서쪽 출입문과 몇 되지 않은 가디언과 경비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의 무너질 때의 소음은 거센 빗소리에, 그리고 생뚱맞게 꺼져 있는 지표면은 울창한 나무에 완전하게 감추어졌던 모양이었다.
“세상에.......여기 지하에 이런 게 있었다니......”
소대장은 땅 밑에 입을 벌리고 있는 신전 출구, 그리고 눈에 익은 풍경을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거친 빗물을 닦아내며 부하들에게 빨리 올라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이젠 어쩌죠?”
선임가디언이 눈앞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2개의 황궁 출입문을 돌아보며 사뭇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닌데.”
소대장은 일단 할룩스를 뽑아들고 베흔의 호출코드를 눌렀지만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타크마의 신호를 찾았지만 그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어쩐다.......”
소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베흔과 타크마 모두, 아직 지하 카타콤베에 갇혀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때, 우르릉 하는 낮은 굵은 진동음이 거의 백 번이 넘게 연달아서 그들의 예민한 귓가를 때렸다.
“남부의 발리스타 소리입니다. 보병들끼리 맞붙었으면 한 번에 이렇게까지 많이 쏘아대지는 못할 텐데.......아직 성벽 쪽에서는 적을 뚫지 못한 모양입니다.”
“우리끼리라도 치느냐.......아니면 대장의 연락을 기다리느냐인데.......”
이런저런 계산으로 복잡하던 1소대장의 집중력을 순간 흐트러뜨린 건 누군가의 발소리였다. 그는 막 올라오고 있는 가디언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손짓을 하며 바닥에 납죽 엎드려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저기입니다.’
선임가디언이 가리킨 곳에 있는 건 군인이 아닌, 작업복 차림의 민간인 2명이었다. 검은 우비를 뒤집어쓴 채 한 손에 삽과 공구를 든 모습을 보아 이곳 황궁 정원사들인 것이 분명했다.
“이런 제기랄.”
소대장은 무너진 구덩이, 그리고 그 위로 쓰러져버린 몇 그루의 키 작은 나무들을 둘러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나다를까, 그들 중 한 명이 무너진 토사와 쓰러진 나무를 발견한 듯 이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무어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빗소리가 워낙 시끄러워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반쯤 욕지거리를 섞어가며 ‘비 때문’이라고 투덜대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발, 제발 오지 마라......”
소대장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필사적으로 기원했지만 ---최소한 그들에게는---불운하게도 정원사들은 그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는 않았다. 그들은 삽을 어깨에 짊어지고는 이곳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정을 내린 소대장은 옆에 있는 선임 가디언에게 한 명을 맡으라며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각각 한 명씩을 맡은 그 둘은 양쪽으로 흩어지며 ‘목표’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번에도 또다시 운이 없었다.
그때, 두 명의 정원사 중 한 명이 갑자기 울리는 할룩스를 꺼내들며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함께 온 동료를 앞서 보낸 그는 ‘엄마는 별일 없어. 문단속 잘 하고......’라며 시답잖은 내용으로 빗속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아마도 황성의 전투 소식에 놀란 가족이 보낸 안부연락임이 분명했다. 그 사이, 앞서가던 동료는 어느새 움푹 팬 ‘구덩이’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뭐야........이봐!”
별 생각없이 구덩이 안을 들여다보던 그 정원사는 그 안에서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까마득한 공간에 놀란 듯 랜턴을 들고 안을 비췄다. 순간, 그의 눈과 마주친 건 무시무시한 살기를 띤, 누군가의 푸른빛 시선이었다.
“아읍!”
놀라 뒤로 물러나려던 그 정원사의 이마 중간에 딱 소리와 함께 작은 손도끼가 정확히 날아와 꽂혔다. 그리고 그 소리는 할룩스를 들고 잡담을 하고 있던 후미의 다른 정원사의 귀에도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뭐야? 거기.......”
할룩스를 끄고 동료에게 말을 걸려던 그는 눈앞에서 무언가 번쩍 하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로 날아오던 도끼는 옆머리 구석을 무서운 충격으로 후려치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사, 사람살려!”
그 여자 정원사는 깨져서 피가 흐르는 머리에서 미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어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가 향한 곳은 가장 가까운 빛이 보이는 황궁의 남서쪽 출입문, 그리고 그곳 앞을 지키는 동맹군 경비병들이었다.
“잡아!”
다급해진 소대장이 도망치는 정원사를 쫓아 달려 나가며 다시 도끼를 던졌다.
“까악!”
어깨를 도끼에 명중당한 정원사가 비명과 함께 관목 숲에서 튕겨나가듯 나동그라졌다. 도망치는 ‘목격자’를 쓰러뜨린 건 좋았지만 그가 쓰러지며 내지른 거친 비명, 그리고 이 빗속에서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동맹군 가디언의 존재는 그에게 또 다른 불운이었다.
“무슨 소리야?”
황궁의 남서쪽 문을 지키던 동맹군 페로가디언이 순간 눈을 부릅뜨며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머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알아듣기도 어려운 괴성을 지르며 엉금엉금 기어오고 있는 정원사, 그리고 관목 숲에서 아른거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형상이었다.
“비상! 비상!”
“제기랄, 별 수 없군.”
1소대장은 그때까지도 구덩이에 매달려있던 50여명의 부하들에게 빨리 나오라며 손짓을 보냈다. 자신들이 들켰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2가지 선택’ 중 하나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을 뿐이었다. 황궁 본관 남서쪽 출입문을 지키고 있는 건 고작 가디언 5명 정도에 정규군 20명 정도가 전부였다.
저곳만 뚫으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들의 세상, 바로 황궁 내부였다.
“전원 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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