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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575화 (574/1,132)

< -- 575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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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명의 가디언들을 이끌고 에아 신전에 있던 보안국장 루토는 신전 어딘가로 베흔이 튀어나올 끔찍한 순간만을 기다리며 잔뜩 긴장의 끈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곳의 에아 신전, 그리고 그 주변 지하실들은 은밀한 입지와 어려운 접근성 덕택에 세나우스 2세가 황궁을 세웠을 당시부터 ‘비밀스런 부서’들이 밀집해서 자리를 잡았던 곳이었다. 그가 지금 맡고 있는 보안국의 가장 핵심부서인 20여개의 정보팀들 역시 이곳 에아 신전 바로 옆, 옛 신전의 창고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껏 그 누구보다 이곳에는 익숙하고, 그 누구와 대적해도 이길 수 있다고 믿어왔던 그였지만 베흔을 상대해야 하는 지금 이 순간만은 아니었다. 수십 년을 베흔의 최측근 참모 역할을 해 왔다보니, 그는 상대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지금은 도리어 그것이 독이었다.

충분히 똑똑한 그인 만큼, 그는 황제가 자신에게 이 임무를 맡기면서 어딘지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였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루토 스스로도 이번 임무는 정말로 내키지 않았지만, 제네르가 지난 전투에서 쓰러졌고, 그 자리를 대신할 릴라크 역시 몸이 성치 않다보니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국장님! 국장님!”

누군가의 외침에 지레 놀란 루토가 고개를 휙 돌렸다. 위층에서 달려내려온 그 보안국 가디언이 다급한 목소리로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적 가디언들입니다! 본관 남서쪽 출입문 앞에 나타났습니다! 최소 50명 이상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가디언? 여기가 아니고 거기라고?”

순간 혼란에 빠진 루토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신전 안을 두리번거렸다.

“베흔 대장이 거기에 나타났나?”

“아직 모릅니다. 지금 놈들 중 일부가 출입문을 이미 돌파해서 황궁 내부에까지 진입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가 100층 이상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로 접근하고 있다는 연락입니다.”

“제기랄.”

루토가 말라붙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카렐과는 연락이 되지 않았고, 근위대들은 이쪽보다 황궁 내부에 도리어 더 밝았다.

“101층에는 황궁 방어시설을 통제하는 통제실이 있다. 놈들은 틀림없이 거기를 노리고 있을 거야. 가디언 30명 이상을 동원해서 그곳의 방어를 최대한 강화해라. 내가 직접 올라가서 침입한 놈들을 잡겠다.”

“하지만 국장님, 황상께서 이곳을 지키라고 하셨는데.......”

루토의 지시에 당황한 부장이 걱정스런 얼굴로 되물었지만 루토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알아, 알아. 하지만 이미 적들이 모습을 나타냈는데 여기서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게 더 미련한 짓이지! 그네들은 우리보다 황궁 안 사정에 더 밝으니 우리로서는 숫자로라도 압도하는 수밖에 없다. 너희 60명은 내 뒤를 따르고, 40명은 여기 남아서 신전을 지켜.”

“40명으로 될까요? 카타콤베 안에 적들이 또 있을지도 모르는데......”

부장의 걱정에 루토가 버럭 화를 내며 대답했다.

“우리가 여기서 차단하면 황상께서 뒤에서 놈들을 치겠다고 하셨으니 모험 따위는 생각도 말고 자리를 지키기만 해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에아 신전을 부장에게 맡겨놓은 루토는 60여명의 가디언들을 이끌고 급히 황궁 지상층으로 뛰어올랐다. 그는 지상을 공격하고 있는 ‘적 가디언’중에 베흔이 제발 없기를 바랬지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카렐이 카타콤베에서 베흔을 잡고 있을는지, 아니면 이미 놓치고 그의 꽁무니만 쫓고 있을는지.

타크마의 3소대를 잡아낸 카렐로서는 이제 베흔과 함께 있을 2소대를 잡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타크마의 말대로라면, 그는 다하카르 신전에서 정북쪽으로 올라갔다고 했으니 시간이 흐른 지금쯤에는 카타콤베의 남서쪽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20명으로는 너무 적지 않을까요? 근위대장이 50명을 거느리고 있다고 했는데......”

카렐의 팔에 안겨있던 니사가 뒤따르는 가디언들을 랜턴을 잠시 비춰보고는 걱정스레 물었다.

그의 말대로, 카렐은 항복한 3소대와 타크마를 내보내고, 동시에 안쪽의 소식과 카렐의 명령을 바깥에 알리기 위해 10명의 가디언들을 다하카르 신전을 통해 따로 보내야만 했다. 원래부터 30명밖에 되지 않던 가디언들 중 이제 그의 뒤를 따르는 건 20명이 고작이었다.

“막상 들어와 보니 여기서는 20명도 너무 많아. 제대로 된 놈 10명이 더 낫겠어. 차라리 잘됐지.”

카렐이 냉큼 대답하며 니사를 번쩍 추켜올렸다.

“어차피 베흔 그놈이 나갈 길은 뻔하니 루토가 반대편만 제대로 막아주고 있다면 뒤에서 모조리 도살할 수 있어.”

“예.......전 싸움에 관해서는 잘 모르니까요.”

“불은 꺼 주겠나.”

“아, 예.”

니사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랜턴을 얼른 껐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니사는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카렐의 목을 더 꼭 껴안았다. 이젠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맞닿은 카렐의 가슴 너머, 조금은 거칠어진 그의 숨소리와 빠른 심장박동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지금 가는 길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양쪽 벽은 거의 자연동굴과 다를 것 없이 울퉁불퉁했고, 어느 곳은 카렐 같은 덩치는 낑낑대며 겨우 통과할 정도로 좁았고, 또 어떤 곳은 네댓 명이 수다를 떨며 지나가도 너끈할 정도의 넓은 공간이었다.

위아래로도 역시 평평하지는 못해서, 어딘가에서는 10척(3m)가까이를 뛰어내려야 했고, 또 그 뒤에는 위험천만한 암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제일 앞서가는 카렐의 몸은 덕택에 흙과 먼지로 뒤범벅이었고, 군데군데는 찢기거나 긁힌 상처도 널려있었다.

“젠장, 이런 개떡같은 곳이 있나.”

니사는 카렐이 무어라 혼자 욕을 중얼거리는 것을 느끼며 내심 웃음을 참았다. 그가 욕을 할 만한 상황인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온 중 제일 높은, 15척(4.5m)가까운 돌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통로는 그 꼭대기에 겨우 몸 하나 우겨넣을 정도 크기의 ‘개구멍’으로 이어져 있었다.

‘기다려’

수화로 지시한 카렐은 안고 있던 니사를 잠시 세워두고 혼자 구멍을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쉿.”

구멍 위로 머리를 내밀었던 카렐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며 뒤따라오는 카토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어느새 익숙해진 그의 파란빛 시선 너머, 조금 떨어진 곳에 아른거리는 기류, 그리고 벽에 남아있는 미세한 온기가 보였다. 적들이 지나간지 오래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제야 걸렸군.’

카렐이 침을 꿀꺽 삼키며 ‘앞에 적이다. 천천히 따라와라’는 지시를 내렸다. 앞을 막았던 타크마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뒤를 쫓아야 하는, 조금 불리한 상황이었다.

바로 뒤따라 벽을 기어오른 카토가 수화로 조심스레 물었다.

‘뒤부터 잡을까요?’

‘에아 신전에 루토가 이미 기다리고 있을 테니 먼저 공격하지 않고 우리는 뒤만 쫓아간다. 아니면 막다른 길을 만나서 돌아설 때 완전히 차단할 수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라말라 박사를 후미로 돌리고 가디언 2명이 보호하도록.’

‘예.’

카토에 뒤이어 나머지 가디언들이 천천히 기어올라 카렐의 뒤를 따랐다. 앞서가는 자들이 베흔의 부대인지, 아니면 1소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저들까지 잡으면 이제 2/3은 해결하는 셈이었다. 최소한 지금 상황에서 그가 베흔을 잡을 확률은 50%였다. 천재일우의 기회임을 깨달은 카렐의 칼을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는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벽과 바닥에 남아있는 미세한 난기류의 흔적을 쫓았다. 그때, 바닥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04시 5분입니다.’

‘앞의 놈이 베흔 녀석이면 정말 운도 지지리 좋군.’

카렐이 지도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가는 길을 따라 계속 전진한다면 누군지 모를 ‘앞의 적들’은 이곳의 방사형 통로들 중 가장 ‘무사통과할 확률이 가장 낮은’ 분침의 통로에 정확히 접어든 셈이었다.

‘적들에게 좀 더 근접해야겠다. 4명만 내 뒤를 바싹 따라오고 카토 넌 나머지를 데리고 30초 정도 거리에 떨어져서 따라와라. 내가 한참 앞서가니까 랜턴을 써도 좋아. 대신 바닥만 비춰라.’

카렐이 카토에게 손짓을 보냈다. 아무리 이쪽이 ‘감각적인 면’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는 해도 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인기척도 없이 가디언들의 뒤를 숨어서 추격한다는 건 사실상 어려웠다. 그렇다고 거리를 두었다가는 자칫 ‘돌아가는 통로’ 덕택에 적들을 놓치거나, 더 나쁘면 허리가 잘릴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카토의 본대와 거리를 둔 카렐은 길을 따라 나 있는 미세한 기류의 흔적을 쫓아 걸음에 속도를 조금 붙였다. 그리고 잠시 후, 조금씩 아른거리는 사람의 모습이 푸른빛 난기류 속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이 든 랜턴 불빛 속에서 형상은 조금씩 뚜렷해져갔다.

“무언가 이상해. 길이 자꾸 바뀌고 있는 것 같지 않나?”

앞쪽 조금 멀리에서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 카렐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의 공격본능을 자극하는 그 목소리는 틀림없이 무서운 숙적, 베흔의 것이었다. 카렐은 자신이 상대를 제대로 따라붙었음을 깨달았다. 이제 베흔이 에아 신전에 도착하기만 하면 앞뒤에서 적들을 모조리 가로막고 도살해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손과 어깨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무언가 이상합니다. 간 길로 되돌아갔어도 먼저의 길이 나타나지 않으니.......주신 지도에 그냥 지도 이상의 내용이 담겨있는 것이 아닐까요?”

“글쎄, 내가 보기에도.......”

베흔의 목소리와 함께 앞서가던 근위대들이 갑자기 자리에 멈췄다. 깜짝 놀란 카렐이 재빨리 벽에 붙으며 숨소리를 잔뜩 죽였다. 베흔을 비롯한 50여명의 가디언들은 사방으로 12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홀에 서 있었다.

“대장님! 여기에 누군가 X자로 표시를 한 흔적이 있습니다! 난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선두에서 가던 2소대장이 출구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20여분 전, 나갈 길을 찾던 1소대장이 부하들을 풀어 표시한 것들이었다.

“어느 부대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동료들이 한 건 틀림없습니다.”

2소대장이 바닥에 남은 여러 개의 족적과 자신의 군화 바닥을 비교해보며 말했다. 베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른 출구들을 살폈다.

“다른 곳도 다 표시가 되어 있는데?”

12개의 출구를 차례대로 둘러보던 베흔은 그 중 ○자로 표시가 되어 있는 단 한 곳을 곧 발견했다. 이 표시를 누가 했는지 꿈에도 모르는 베흔이 표시를 손으로 더듬으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타크마 녀석, 생각보다 훨씬 쓸만한걸. 역시 짬밥이라는 게 무시 못 하는 건가.”

“혹시 에아 신전에 이미 도착해 있는 것이 아닐까요?”

2소대장의 섣부른 예상에 베흔 역시 피식 웃음만 지었다.

“글쎄, 그래도 멋대로 공격하지는 말라고 했으니 아마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이거 우리가 제일 늦은 거면 체면이 말이 아닌걸.”

‘체면’ 타령을 하고는 있었지만 베흔도 다른 팀이 먼저 지나갔다는 데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그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자 표시가 된 터널에 접어들었고, 50여명의 가디언들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먼저 지나간 1소대 덕택에 베흔은 아주 손쉽게 이곳을 통과할 수 있었다. 방향은 조금 틀렸지만, 어쨌든 황궁 지하가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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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카페  http://cafe.daum.net/TheIronVein의 작가게시판에 2부 개인지 출판본의 표지 초안이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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