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77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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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을 내리고 문을 향해 급히 쇄도하려던 베흔은 옆에서 무언가 달려드는 무서운 기세에 고개를 휙 돌렸다. 마치 야수처럼 회색빛 눈을 부릅뜨고 칼을 내질러오는 검은 옷의 전사와 눈이 마주친 그는 온몸이 바싹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젠장!”
당황한 베흔은 칼을 힘껏 올려쳐 일단 상대의 칼끝만은 옆으로 치워낼 수 있었지만 그 무지막지한 힘만은 당해낼 수 없었다. 그는 카렐의 어깨에 겨드랑이를 받히며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듯 지독한 고통에 베흔이 비명을 지르며 에아 신전 한구석의 수로 옆을 굴렀다.
“잘 걸렸다!”
카렐이 번쩍 치켜든 ‘나즈라의 검’ 의 푸른빛 예리한 날이 그 옛 주인의 숨통을 끊었던 원수의 목을 똑바로 겨누고 바닥에 내리꽂혔다. 순간 당황한 베흔의 눈에 띈 건 바로 옆, 한 길이 넘는 물이 철렁거리고 있는 싶은 수로였다.
“여기서도 날뛸 수 있나 보자!”
베흔은 칼을 내리꽂으려는 카렐의 목을 와락 껴안고 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물, 특히 깊은 물을 유달리 싫어하는 카렐이 움찔하며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중심을 잃은 채 베흔과 함께 큰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 속에 풍덩 빠져들었다.
“아, 아푸!”
물에 젖은 베흔은 뼛속깊이 스며드는 찬 기운에 몸서리를 치며 급히 빠져나가려 했다. 몸이 무거운 카렐이 물 밑에 가라앉은 채 그의 발목을 붙들려 했지만 최소한 이곳에서는 베흔이 유리했다. 그는 버둥거리며 수로 벽을 짚으려는 카렐의 손끝을 발로 꾹 밟아 으스러뜨리며 물 밖으로 재빨리 빠져나갔다.
“우욱!”
거의 수십 초간을 힘겹게 숨을 참았던 카렐이 수로 모퉁이의 돌을 붙들고 가까스로 호흡을 내뱉었지만 숨을 고르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카토가 올 때까지 어떡해서든 시간을 끌어야 하는 카렐 역시 결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베흔에게 밟혀 비틀린 손가락 2개의 고통을 악을 쓰고 참으며 팔에 힘을 주었다.
“도망가려고! 이 비겁한 새끼!”
흠뻑 젖은 카렐이 엉금엉금 기듯 물 밖으로 빠져나왔지만 베흔은 그새 에아 신전과 황궁이 이어진 출구 쪽으로 황급히 도망치고 있었다.
그곳에는 카렐의 명령을 받고 몰려든 3명 정도의 가디언들이 있었지만 베흔, 그리고 그와 함께 돌진하는 십여명의 상등급 가디언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베흔은 그 중간의 가디언을 힘으로 힘껏 들이받아 쓰러뜨리고는 신전과 황궁 본관이 이어지는 계단실로 다급히 뛰쳐나갔다.
“아윽.”
힘차게 1층에 걸음을 내딛던 베흔이 잠시 휘청거렸다. 카렐에게 받혔던 옆 가슴이 칼로 찌르듯 쑤셔왔다. 그는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는 지독한 통증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젠 우리 세상이다!”
비록 적진이었지만, 그에게는 집보다도 더 익숙한 공간이었다. 등 뒤에서 뒤쫓아오는 카렐의 손에 죽어 쓰러지는 부하들의 비명소리가 연이어 들려왔지만 당장은 중요치 않았다. 앞장서는 베흔의 뒤를 쫓아 2소대장, 그리고 그를 따르는 분대장들과 30여명의 상등급 가디언들이 악 소리를 지르며 황궁 1층을 향해 뛰쳐올랐다.
지키고 있던 가디언들을 모조리 에아 신전에 쏟아부어놓은 동맹군 측, 아니 황궁 내부에는 이제 이들을 막을만한 정예 가디언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완전한 동공 상태였다.
“우리 숫자가 적으니 적들을 좀 더 혼란에 빠뜨려야겠다.”
베흔이 이를 악물었다.
“바깥에 알려! 우리 ‘아나콘다’의 사정거리를 최대한 늘려서 황궁을 직접 치라고!”
“화, 황궁을요? 하지만 이 거리에서는 정확도가........”
당황한 2소대장이 급히 물었다. 다른 곳도 아닌, 황궁을 직접 공격한다는 건 세나우스 1세의 죽음 이후 ‘반역’과 동일시되어 온 터부의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의 베흔에게는 이번 기회에 전쟁을 결판내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더 우선이었다.
베흔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얼굴까지 붉힌 채 언성을 높였다.
“상관없다! 황궁 위층에 핵심 시설들이 몰려 있으니 아무 곳이나 마구 때리라고 해!”
“아, 알겠습니다.”
더듬거리며 대답한 2소대장이 성벽 밖에 주둔한 근위대 사역부대에 급히 대장의 명령을 전했다.
“우린 위로 무조건 올라간다!”
카렐과 동맹군 가디언들을 따돌리고 황궁 내에 난입해 계단을 뛰어올라가던 베흔은 남아있는 자신의 가디언들 숫자를 확인했다. 그를 따라온 건 2소대에 소속된 30여명의 가디언들이었고 남서문으로 난입한 1소대에도 40여명이 있다는 보고였다. 1소대 가디언들이 사방에 불을 놓으면서, 황궁 내부에 그나마 남아있던 경비병력들도 이들을 체계적으로 막을 여유가 없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20층에 도착했다. 25층에서 100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겠다.”
할룩스로 들어온 1소대장의 물음에 베흔이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황궁 주궁의 1층부터 19층까지는 각종 민원부서가, 20층부터 24층까지는 민원부서와 중앙관청 사이를 구분하고 보안을 위해 일부러 비워놓은 넓고 빈 공간이었다. 아직 병력이 보충되지 않았는지 고작 20여명의 수비병들이 있었지만 베흔과, 그를 따르는 10여명의 분대별로 나뉘어 난입해 올라오는 그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0~24층을 순식간에 가로질러 25층에 도착한 베흔은 아직 1층 로비에 있을 1소대장에게 단호하게 일렀다.
“너희는 계속 아래층을 차단하고 일부는 카렐 그놈을 지상으로 못 올라오게 묶어놔. 나머지 놈들은 1층부터 20층까지 최대한 사방에 흩어져서 모조리 불을 질러. 난 2소대를 이끌고 101층으로 가겠다.”
“불이 너무 크게 번지면.......”
“상관없어. 어느 정도 커지면 어차피 소화가스가 분사될 테니까. 안 돼도 싹 다 타죽어 버리라지. 어차피 우린 상관없잖나.”
베흔은 허리에 찬 케이블 장치를 일단 확인했다. 만일의 경우, 행여 황궁 전체가 불에 휩싸인다고 해도 이것만 있다면 그와 근위대 가디언들은 창을 뚫고 지상으로 내려갈 수 있을 터였다.
25층에 도착한 그는 분대원들과 함께 100층 주기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재빨리 몸을 실었다. 워낙에 전광석화같은 근위대 가디언들의 전진에 아직 이곳 사정에 덜 익숙한 수비병들은 제대로 된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사방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베흔이 탄 엘리베이터가 막 가속되려는 순간, 쾅 하는 진동음이 170층의 황궁을 뒤흔들었다. 아나콘다가 드디어 황궁에 작열한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 무시무시한 진동에 기겁을 했겠지만 베흔으로서는 그 충격이 마치 요람을 흔드는 손처럼 달콤하게까지 느껴졌다.
황궁이 드디어 그와, 근위대의 사정권 안에 들었다는 생각에 그의 온몸이 흥분감으로 파르르 떨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순간, 그의 머리에 떠오른 한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제기랄, 아들까지 버리고 도망간 년 내가 알 게 뭐야.'
베흔은 머릿속을 맴도는 네페티의 생각을 애써 쫓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적들도 설마하니 황비인 네페티를 불에 타죽거나 발리스타에 맞아 죽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으리라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100층을 향해 빠르게 올라갔다. 베흔은 자신이 내릴 때까지, 아니 101층에 도착할 때까지 만이라도 황궁의 동맹군 수비병들이 여전히 지금처럼 허둥대기만을 바랬다. 근위대들과의 싸움에 휘말린 황제를 대신해 누군가 이들을 강력히 통제할만한 사람이 나타나주지 않기만을 기대하면서.
자신이 남부 2제후 카나르 플라칼 경을 바로 만날 것으로 생각했던 ‘연합군 특사’ 부마 예르마크 경은 거의 1시간이 넘도록 ‘접객 막사’안에서 무력하게 찻잔과만 벗하고 있어야 했다. 그는 함께 있는 적장자 헤즈 플라칼 경에게 이미 몇 번째 반복된 질문을 다시금 던졌다.
“카나르 경은 어찌된 거냐.”
“전장에 나가 계십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특사를 보내놓고 한편에서 전투를 시작한 그쪽의 속내도 그리 순수하지는 않으신 것 같습니다만?”
헤즈의 능글능글한 응대에 예르마크 경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지금 한쪽에서 발리스타가 펑펑 날아다니는데 아버지께서 협상에 차분하게 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아버지께서 얼마나 격분해 계신지 아신다면 차마 그런 말씀은 못 하실 겁니다.”
할 말이 없어진 예르마크 경은 시계만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최소한 ‘시간을 끈다’는 임무만으로 본다면 그가 이곳에 무의미하게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이나 마찬가지였다.
예르마크 경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찻잔을 집어들었다. ‘동맹군 측 특사께서 드십니다.’라는 말과 함께, 막사의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순간, 경악하며 고개를 번쩍 치켜든 예르마크 경의 눈앞에는 큰 키의 한 여인이 흰 로브와 단정한 케이프 차림으로 서 있었다. 얼굴을 가린 베일 때문에 상대가 누군지 알 수는 없었지만 ‘동맹군 특사’라는 한 가지로도 그의 머릿속을 아찔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네놈은 누구냐!”
순간, 평소의 침착함을 모두 잊어버린 예르마크 경이 찻잔을 동댕이치듯 떨어뜨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손은 평소 같았으면 장검이 꽂혀있었을 왼쪽 허리춤에 반사적으로 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단검이 있었고, 언제든 맘만 먹으면 저 정체불명의 ‘동맹군 특사’를 찔러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부마님, 이성을 찾으십시오. 저쪽도 특사이실 뿐입니다.”
헤즈가 예르마크 경의 어깨를 살며시 짚었지만 속았다는 생각에 격분한 예르마크 경의 굳은 표정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뭐냐? 지금 양쪽을 놓고 저울질하겠다는 수작이냐?”
“그래서는 안 될 것이라도 있습니까? 부마님.”
누군가의 굵고 거친 목소리에 예르마크 경이 이를 악물었다. ‘동맹군 특사’의 반대편에서 갑주 차림으로 나타난 우람한 체구의 무장은 그의 눈에 익은 남부 2제후 카나르 플라칼 경이었다.
“빌어먹을.”
예르마크 경이 분을 삭이며 일단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예르마크 경, 카나르 경, 그리고 아직 ‘정체불명’인 동맹군 특사까지, 총 3명은 병사들이 가져온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서로의 눈짓, 그리고 몸짓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폭우가 지붕을 세차게 두드리는 허름한 막사 안, 이 작은 회의실에서 오갈 대화, 그리고 결정될 사항들이 앞으로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으면서.
“내 아들 헤즈와 근위중대장 후스 콘스탄츠 중랑만 빼고 모두 자리를 비워주었으면 좋겠군.”
카나르 경의 손짓에 회의실을 지키던 근위병들이 차례차례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헤즈는 아버지 카나르 경의 뒤에, 후스는 ‘동맹군 특사’의 뒤에 각각 자리를 잡았다. 예르마크 경은 자신의 뒤에만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카나르 경이 ‘동맹군 특사’에게만 호위무장을 붙인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손이 고운 걸 보니 문관이시군요. 누군지 정체는 알고 이야기를 시작합시다.”
예르마크 경이 ‘동맹군 특사’를 노려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내 무장인 것이 불안하다면 먼저 무장해제하지요.”
예르마크 경은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스스럼없이 풀어 회의장 한쪽에 던져버렸다.
“그 정도로는......”
카나르 경이 조금은 걱정어린 표정으로 ‘동맹군 특사’쪽을 돌아보았다. 예르마크 경의 도발은 후스를 내보내고 ‘공평하게’ 시작하자는 암묵적인 요구였다. 하지만 칼이 있든 없든 남부의 손꼽히는 맹장과 호위도 없이 가까이 마주앉아 있는 건 상대를 심적으로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예르마크 경이 먼저 심리전을 시도한 것이었다.
“전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동맹군 특사’가 웃음어린 어조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예르마크 경은 어딘지 귀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부마께선 저를 해치지 못하실 테니까요.”
마치 놀리는 듯 빈정대는 그의 어조에 제대로 당한 건 이번에도 예르마크 경 쪽이었다. 하지만 ‘동맹군 특사’는 뒤에 선 후스에게 먼저 손짓을 보내 그를 또 한 번 당황하게 했다.
“혼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콘스탄츠 중랑님. 제 신변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으니.”
종장 카나르 경의 눈치를 확인한 후스는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는 이 회의장에서 마지막으로 물러났다.
예르마크 경도 자신의 원하던 뜻을 이루었지만 어딘지 찜찜한 기분만은 여전했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아니 목구멍에 칼을 들이댄다고 해도 위축될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문과 식솔들의 운명을 걸고 온 이상, 그도 순순히 물러나 줄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제가 아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만, 무얼 그리 감추고 싶으신지?”
예르마크 경이 ‘동맹군 특사’를 노려보며 집요하게 계속 물었다. 그의 말을 들은 순간, ‘동맹군 특사’의 흰 베일 아래 살짝 드러난 입가에 갑자기 묘한 미소가 번졌다.
“감추고픈 것은 없습니다. 최소한 지금 이 시대에는 말이죠. 제가 즐겨 입는 이 차림새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기꺼이 벗지요.”
‘동맹군 특사’ 아니, 수나 마구스는 얼굴에 드리운 베일을 천천히 벗어 옆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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