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81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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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에 계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머리에 드레싱을 감은 채 이동 의자에 힘없이 앉은 제네르는 지하 8층 ‘유리방’ 안에 선 다히르 경과 아들 네자드에게 조금은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황궁에서의 전투 직전, 아버지 샤자한 공에게 강제로 등 떠밀려 사신 자격으로 왔다가 억류된 그들은 이 감방 안에서 도리어 편안한 표정이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제네르의 물음에 다히르 경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할 질문인 것 같구나.”
다히르가 의자를 유리벽 쪽으로 바싹 당겨앉으며 제네르의 엉망이 된 얼굴을 살폈다. 물론 그와 아들 네자드도 지난번 카렐에게서 태형을 선고받기는 했었지만 형리가 쓴 건 말 그대로 ‘형식적인 채찍’이었다.
“도리어 우리야 맘이 편하다만.......”
다히르는 뒤에 말없이 서 있는 아들 네자드를 문득 돌아보았다. 정치범을 수용하는 이 ‘유리방’에서 한 감방, 아니 감방 2개를 터서 이렇게 부자(父子)가 같이 쓴다는 것도 실은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전 같았다면 차가운 침대 하나만 있었을 감방 안에는 따뜻한 침구와 책장은 물론이고 안락의자와 옷장, 따뜻한 난로, 심지어 차를 끓여먹을 수 있는 찻잎과 주전자, 간단한 간식까지 갖춰져 있었다. 말이 감방이지 사실상 영빈관을 옮겨놓은 것에 다름없었다.
“폐하께 큰 뜻이 있으신 것 같으니 이곳이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시면.......”
“그래, 그러시겠지. 생각 없이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시니.”
다히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밖에는 전투중입니다.”
“언제쯤 끝날 것 같으냐?”
“아직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무언가 크고 은밀한 계획을 진행 중이신 것 같은데 그 이상은 밝히지 않으시니까요. 어쩌면 이번 혼란도 그 끝이 머지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보긴......”
무어라 말을 이으려던 제네르는 갑자기 주변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에 입놀림을 딱 멈추며 천장을 올려보았다. 다히르 역시 놀란 표정으로 위를 올려보았다.
“내가 잘못 느낀 게 아니라면.......”
“죄송합니다. 전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자드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던 제네르가 급히 담요를 어깨에 걸쳤다. 네자드가 급히 창을 짚으며 멀어져가는 제네르를 애타게 쳐다보았다. 그에게 잠시 미소를 지어보였던 제네르는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시종에게 빨리 가라며 손짓을 보냈다. 순간, 묘한 진동이 다시금 황궁 전체를 울렸다.
‘설마.......포격이 여기까지?’
황궁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굳이 정식 보고로 전해지지 않아도 자욱하게 들어차기 시작한 연기만으로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불과 유독가스는 엘리베이터 코어, 환기장치를 타고 무서운 속도로 위층으로 번져나갔지만 소방시설 덕분에 당장 큰 불로 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잔불을 끌 임무가 있는 황궁 종사원들과 공무원들이 근위대의 난입 소식에 놀라 도망부터 치려 한다는 점이었다.
그 덕분에 이미 불이 꺼진 곳에서 다시 연기가 솟는 곳도 있었고, 되살아난 불이 아예 소방시설을 망가뜨려 걷잡을 수 없이 불이 번지는 곳도 더러 있었다.
“멋대로 도망치는 놈들은 무조건 잡아 죽여!”
뒤늦게나마 배치된 아메샤 스펜타의 경비병들이 난잡하게 도망치는 민간인들을 막아서기 시작한 건 황궁이 막 통제불능의 혼란상황에 빠져들기 직전이었다.
“슈로 기사단장 릴라크 예리노프 대장군님의 명이시다! 각자 위치로 돌아가서 불을 끄고 대기해라! 불이 번진 지역 담당자 놈들은 나중에 추적해서 목을 베어버리겠다!”
칼 혹은 곤봉을 든 그들은 자신들의 몸부터 빠져나오려 도망치던 시종, 혹은 공무원들을 막아서고 릴라크에게서 명령받은 대로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서 본보기로 출구 부근에 동댕이쳐버렸다. 그들의 무자비한 진압에 놀란 시종들은 허겁지겁 각자의 위치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황궁의 통제실로 급히 향하던 릴라크 자신도 이런 강압적인 진압이 일시적인 효과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황제가 1층의 적들을 제압하고 다시 황궁의 질서를 잡을 때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되는 일이었다.
황궁, 그리고 황성의 방어체계를 총괄하는 통제실은 황궁의 101층에 보안국 기간요원들의 엄중한 감시 하에 운영되고 있었다. 조금 전 그의 명령에 따라 배치된 20여 가디언들이 이 통제실 곳곳에 흩어져 혹시 모를 적들의 난입을 대비하는 중이었다. 이곳에 당초 배치하라고 지시한 가디언들은 50명이었지만 불 때문에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차단되면서 이곳에 도착한 건 채 그 절반도 되지 못했다.
“니미럴, 오란 놈들은 안 오고 쓸데없는 것들만 죄다 모여드는군.”
릴라크가 평소처럼 막말을 중얼거리며 통제실 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시종들을 거칠게 쳐서 쫓아냈다.
“예리노프 장군님?”
난리법석이 벌어진 통제실을 바삐 뛰어다니던 통제실장이 뜬금없이 나타난 그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빌어먹을! 통제실에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명색이 통제실이 통제가 되지 않고 있잖아!”
릴라크의 호통에 통제실장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여긴 독립된 캡슐구조라 불이 나거나 건물이 붕괴되어도 그나마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그래서 인근 다른 층에 계시던 분들께서도 모두 이곳에.......”
“관계없는 사람들은 통제실 밖으로 쫓아내! 부상자들도! 거기 있는다고 당장 뒈지지는 않을 테니.”
“저.......분들도 말씀이십니까?”
통제실장이 놀란 얼굴로 통제실 안쪽, 실장실과 창고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발리스타의 포격에 중상을 입은 사람들, 화상, 혹은 질식한 채로 누군가에게 업혀 온 사람들이 치료의 손길조차 받지 못한 채 신음하고 있었다.
통제실 안에 있던 몇몇 보안국 헌병들이 구급함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급히 응급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워낙에 적의 공격과는 동떨어진 곳이다 보니 군의관은 고사하고 제대로 훈련받은 의무병조차 없었다. 부상자들의 모습에 놀란 이라즈는 릴라크를 놔둔 채 실장실로 달려가 그들부터 급히 돌보기 시작했다.
“이런, 맙소사.”
이라즈는 검댕이와 먼지, 누군가의 피로 더러워진 셔츠를 벗어던지고 급히 환자에게 달려들었다. 비록 임상의는 아니었지만, 그 역시 의학교에서 해부학을 전공하고 박사까지 딴, 엄연한 ‘의사’였다.
“부상자들이 왜? 그냥 쫓아내면 되지!”
릴라크가 짜증스레 물었다. 하지만 통제실장이 다시금 가리킨 건 그들 옆을 뛰어다니며 헌병들과 함께 환자들을 돌봐주고 있던 황비 네페티와 황빈 솔, 그리고 그 둘을 따라온 시녀들이었다.
“젠장. 귀한 상전들이시군.”
릴라크는 차마 뭐라 대답하지 못한 채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며 통제실 안으로 그대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불이 난 곳이 어디어디냐? 발리스타에 파손된 곳은?”
이라즈를 내버려둔 채 통제실 안에 들어선 릴라크는 황궁의 방재담당관을 붙들고 다짜고짜 물었다. 지금 난입한 적군보다 더 심각한 것이 황궁 이곳저곳을 게릴라처럼 옮겨다니는 불과 황궁 이곳저곳을 무작위로 마구 타격하는 근위대의 발리스타였다.
“아시다시피.......불이 환기구와 엘리베이터 통로를 타고 이동하는지라 차근차근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1층의 화재는 절반 이상 진압되었고, 11, 16층의 민원실이 불타고 있고, 25층 영빈관은 절반이 불에 탔지만 일단 큰 불은 진압되었고, 32층 영빈관은 아직 타고 있습니다.”
“그 위쪽은?”
“설비를 타고 올라온 불이 내무부가 있는 56층과 61층, 65층을 태우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방금 100층 주기장에서도 화재가 감지되었습니다. 120층 이상은 불보다는 발리스타의 포격에 의한 피해가 더 큽니다. 121층의 가디언 숙소에 발리스타 9발이 명중되어서 시설물이 완파되었고 143층 내의원과 의무실도......”
“거긴 내가 더 잘 알아.”
릴라크가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146층 황비 전하 처소에 5발의 발리스타가 명중했다고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145층 베아트릭스 황빈마마 처소에도 4발이 명중했지만 다행히 그분께선 전장에 계셔서 별 피해는 없었습니다. 대신 시녀와 시종 11명 정도가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이쪽으로 오셨군.”
릴라크가 이라즈를 돕고 있던 황비 네페티를 힐끔 돌아보았다.
“폐하께선 어디 계신가?”
“조금 전까지 지하 1층에 계시다가 1층 로비로 올라오셨다는 보고입니다. 하지만 화재 때문에 3분 전 모든 엘리베이터를 폐쇄했습니다. 때문에 이곳까지는 못.......”
“황후, 황태후께선?”
“발리스타에서 그나마 안전한 서측 별관으로 피신하셨습니다. 하지만 저 두 분께서는 황상을 전장에 내버려두고 피신하실 수는 없다고 고집을 피우셔서......”
바로 그때, 또 몇 발의 발리스타가 황궁에 명중했는지 구조물이 우르르 떨리면서 위층에서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파편이 보였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 혹은 그 신체 일부도 떨어지는 것 같았다. 몇몇 사람들이 그 광경에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황비 네페티는 생각보다 훨씬 침착한 얼굴로 부상자의 얼굴을 감싸 안고 괜찮다며 달래주는 모습이었다.
“씨발.”
릴라크가 머리를 싸쥐었다. 베흔의 계획대로, 황궁은 건립 이래 가장 혼란스런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창문 너머 100층의 주기장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곳에서 이곳까지는 이제 바닥 슬라브 하나가 전부였다.
“방연 마스크를 배분해.”
릴라크가 통제실장에게 손짓을 했다.
“사람이 너무 많은데 누구부터 우선으로.......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마스크가 생각보다 부족해졌습니다. 고작해야 절반 정도밖에는........”
“가디언, 이곳 기간요원들이 최우선이고, 황비 전하와 황빈 마마께도 드려라. 나머지는 정규군에게 지급해라. 피신 중인 문관들과 부상자는.......직위에 관계없이 마지막 순서다. 명령대로 집행하지 않는 놈은 즉결 처단해.”
‘지급 순서’를 정하는 일은 릴라크로서도 차마 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지만 짙은 연기가 어느새 이곳까지 위협하기 시작하면서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젠장! 여기 누구 있어!”
그때, 아래층에서 막 올라온 듯, 온몸에 검댕이를 뒤집어쓴 문관 몇 명이 보안국 헌병들을 제치고 통제실 안에 뛰쳐들어왔다. 그들 중 몇 명은 적의 공격에 당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엔지 머리와 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릴라크는 그들이 누군지 바로 눈치챘지만 인사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 중 한 명이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언성을 높였다.
“아래층에 있는 망할 군인 놈들이 내 비서들을 두들겨 패서 이 지경을.......”
“이곳 통제실에서는 제가 명령권자입니다. 얌전히 계시면 쫓아내지는 않을 테니 저기에 가 계십시오. 구완 슈벨 부총리 각하.”
릴라크는 거의 협박에 가깝게 쏘아붙이며 통제실 안쪽, 네페티와 솔이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는 실장실을 가리켰다. 그곳에 있는 황비와 황빈의 모습에 슈벨 부총리도 깜짝 놀라며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라즈?”
슈벨 부총리와 함께 도착한 일행 중 한 명이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는 그를 바로 알아보았다. 이라즈 역시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리며 잠시나마 밝은 미소를 지었다.
“누나, 무사했군요!”
밀리타는 내명부 사람들인 네페티, 솔과 함께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는 동생의 모습에 잠시 눈가를 찡그렸지만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부상자들이구나.”
밀리타는 입고있던 비단포를 벗어 한구석에 던져놓으며 바로 ‘의사’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휴우, 다행이에요. 누나가 와 줘서.”
100명이 넘는 부상자들을 돌아다니며 혼자 동분서주하던 이라즈는 누나의 모습에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통증이 극심한 화상 환자들이 워낙 많다보니 하나같이 지독한 고통에 악을 쓰며 몸부림치거나 의사부터 찾아대며 반쯤 이성을 잃고 있었다.
“또 온다!”
누군가의 외침이 있은 직후, 우르릉 하는 진동음이 또다시 통제실을 울렸다. 고개를 번쩍 든 릴라크는 통제실 조금 위, 103층 정도의 곳에서 바깥의 폭우 속으로 쏟아져 내리는 마치 보석알같은 유리 파편들과 흩어지는 내부 기물들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나콘다 사격이 점점 정확해지는군. 곧 여기도 치겠어. 밑에서는 불, 위에서는 포격이라, 훗, 볼만하군.”
릴라크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입을 삐죽거렸다.
“장군님, 연기가 짙어지니 빨리 쓰십시오.”
“뭐?”
릴라크는 통제실장이 내민 방연마스크를 밀어내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나도 부상자니 마지막 순서다. 내게 즉결처분당하고 싶나?”
“누워있지 않으니 부상자가 아니십니다. 즉결처분하려면 하십시오.”
통제실장이 떨쳐내는 릴라크의 손을 쳐내며 그에게 강제로 마스크를 씌웠다. 릴라크가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상황은 그가 한가롭게 자존심 타령이나 하고 있도록 놔두지는 않았다.
“101층 계단에서도 불이 감지되었습니다.”
보고를 계속하려던 방재관은 누군가의 비명소리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환자들을 돌보던 네페티와 솔, 이라즈와 밀리타 역시 깜짝 놀라 고개를 휙 돌렸다.
“베흔이다! 베흔이 나타났다!”
“하여간, 쓸데없이 소란들 하고는.”
릴라크가 입가를 다시금 씰룩거리며 평소처럼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아마도 ‘베흔’이라는 말에도 이토록 차가울 수 있을만한 사람은 동맹군을 통틀어 릴라크 한 명 뿐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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