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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582화 (581/1,132)

< -- 582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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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명의 가디언들을 거느리고 황궁 100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린 베흔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이 타고 오른 엘리베이터에 불을 질러 아래층으로 도로 내려보낸 것이었다.

이들의 난입을 미리 예상해 릴라크가 주기장에 깔아놓은 동맹군 경비병들과 한참의 숨바꼭질을 한 베흔은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의 절반을 털어내 사방에 불을 놓고 그들의 주의를 분산시켜놓아야만 했다. 그리고 이제 그의 곁에는 15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어쨌든 목표에 거의 다다라 있었다.

“오호, 황궁에 잘 돌아오셨습니다.”

연기와 불꽃을 뚫고 황궁 101층에 막 오른 베흔을 처음 맞아준 건 20여명의 그저 그런 아메샤 스펜타의 가디언들, 그리고 그 중간에서 의자에 앉아있는 릴라크의 냉소적인 웃음소리였다. 다른 동맹군 무장 같았으면 바로 욕부터 쏟아내고 돌진했을 베흔이었지만 이번만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이번만은 잘못된 선택을 용서해 주지. 지난번 일이 그 지경까지 된 데 내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니......”

베흔이 손가락을 치켜들며 짐짓 너그러운 척을 했다. 하지만 릴라크의 대답은 냉소적이다 못해 비웃음에 가까웠다.

“오호, 지금 누가 누굴 용서합니까? 운도 지지리 없어서 못 볼 꼴 본 덕분에 품에서 지 새끼까지 보낸 이 한심한 년을 이제 너그럽게 용서하신다고요?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움찔한 베흔이 대번 이를 드러냈다. 릴라크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말하는 건 자신이 벌여놓은 짓들이 이미 카렐의 귀에도 다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그건 오해다.”

베흔이 딱 잘라 말했지만 따로 구질구질하게 변명을 할 거리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 베흔으로서는 일단 칼을 세우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투항하면.......”

“목숨이라도 살려주시겠다고요?”

릴라크가 다시 키득거리며 베흔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무릎 위에 있던 할룩스로 들어오는 보고를 계속 확인하며 손으로는 무어라 연락을 보내고 있었다.

“살아서 남편 얼굴 다시 보건, 저승 가서 죽은 새끼 다시 안아보건 저한테는 거기서 거깁니다만?”

베흔은 반쯤 미친 저 여자와 더 이상의 말다툼을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럼 뒈져!”

마스크를 쓴 베흔이 한 손에 무기를, 한 손에 고체연료 덩어리를 집어들고 으르렁거렸다. 릴라크의 '방어선' 너머, 통제실 안쪽에는 동맹군 핵심 인물들이 놀란 얼굴로 모여 있었다. 릴라크의 마지막 방어선까지 뚫린다면 그들 모두 끝장이었다.

“싸우면서 시간 끌 생각 따위는 없다. 그러니까........”

불을 붙인 연료 덩어리를 통제실 안쪽에 확 집어던지려던 베흔은 그곳에서 나타난 눈에 익은 모습에 잠시 움찔했다. 비록 방연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 눈빛과 체구만으로도 베흔이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솔의 팔에 안긴 채 서 있던 네페티 역시 그와, 그의 손에 들린 불덩이에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베흔이 노리고 있는, 황성의 방어체계와 성문, ‘격벽식 방어체계’를 제어하는 제어장치가 바로 네페티의 등 뒤, 실장실 안에 있었다.

“오호, 불붙이시게요? 어쩌죠? 여긴 끌 사람이 꽤 많군요. 소방 시설도 잘 되어있고.”

릴라크가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무릎에 있는 할룩스를 짚고 있었다. 할룩스 밑에는 어디서인가 집어온 듯 보이는 전투용 망치도 함께 놓여있었지만 저 몸으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릴라크가 계속 빈정거렸다.

“괜히 시간 끄느니 그냥 한판 붙으시죠?”

“머릿수 몇 많다고 이길 것 같냐?”

릴라크의 도발에 발끈한 베흔은 연료 덩어리를 뒷걸음치고 있는 네페티를 향해 바로 집어던졌다.

“악!”

눈앞으로 날아드는 불덩이에 놀란 네페티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불덩이의 바로 앞에서 비틀거리는 그를 거칠게 잡아당긴 건 다름아닌 솔이었다. 그는 넘어지는 네페티를 얼른 옆에 밀어내며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토로 급히 불꽃을 가렸다.

“괜찮으십니까!”

불붙은 망토를 내던진 솔이 허리에 차고 있던 시미터를 재빨리 뽑아들고 네페티와 부상자들, 다른 사람들 앞을 급히 막아섰다. 칼을 뽑아든 솔은 함부로 뛰어나가지 않고 릴라크의 가디언들, 그리고 베흔의 무리가 싸우는 광경을 바라보며 잠시 상황을 살폈다. 정규 가디언들에 비한다면 아직 싸움에 서툰 그가 괜히 나섰다가 상황을 더 망가뜨릴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가디언, 그것도 근위대의 상등급 가디언들이라는 사실에 기가 눌려 감히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사방에 내던진 불꽃에 통제실 곳곳이 지독한 악취와 연기를 풍기며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연기가 감지되면서 천장에서 소화물질이 뿜어 나왔지만 이 특별한 군용 인화물질은 소화제를 놀리듯 노란 불꽃을 계속 뿜어내며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릴라크가 이끄는 동맹군 가디언들, 그리고 베흔의 가디언들이 일대 격전을 시작하면서 통제실 안은 놀라 도망치는 보안국 사람들, 이곳에 피해있던 부상자들의 비명이 온통 뒤섞여 버렸다.

“아윽.”

부하들과 함께 싸우려던 베흔은 옆구리를 움켜쥐며 잠시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잠시 버티어도 보았지만 조금 전, 카렐과의 육박전에서 부러진 갈비뼈가 계속 그의 내장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는 연기 속에서 가디언들 뒤로 재빨리 몸을 피하는 릴라크를 쫓아가려 했지만 또다시 다리가 풀리고 말았다.

“구렁텅이에 걸려든 걸 알게 해 주마.”

베흔의 시야에서 일단 도망친 릴라크는 더듬더듬 의자를 움직여서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무릎 위에 있던 망치를 힘겹게 집어들고 창을 후려쳤다. 하지만 힘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이곳 통제실의 강화 보안유리가 훨씬 더 강해서인지 그의 망치는 퉁 소리를 내며 그대로 튕겨나고 말았다.

“저년 뭐 하려는 수작이야!”

주저앉은 채 잠시 신음하던 베흔의 고함소리가 등 뒤의 연기 속에서 웅웅거렸다. 그새 100층에서 뛰어오른 서너 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이 바깥에 불을 지르고 안에 들어왔지만 릴라크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창만 두들기고 있었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솔은 그가 무얼 하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이야말로 그가 도와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물러나요!”

연기, 불꽃과 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된 통제실을 재빨리 가로질러 뛰어간 솔은 흐느적거리는 릴라크의 손에서 망치를 얼른 빼앗아들었다.

“창을 부수면 돼요?”

릴라크가 의자를 뒤로 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바로 올라오실 수 있도록 길을 뚫어드려야 합니다.”

솔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동맹군 가디언들에게 가로막인 베흔이 방어선을 뚫기 위해 악을 쓰고 있는 모습이 짙은 연기 너머 보였다.

더 늦기 전에, 솔은 망치를 번쩍 치켜들고 창을 힘껏 후려쳤다. 박살난 유리조각이 바깥의 낮은 기압에 쉬익 소리를 내며 무섭게 빨려나갔고, 통제실의 서류조각들, 그리고 짙은 연기가 무섭게 빨려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괴력에 부수어진 창이 창틀 째로 찢겨나가며 공중을 붕 날아 멀어져갔다.

“창을 죄다 부수십시오! 죄다요!”

릴라크가 탁자를 붙들고 눈을 가리며 계속 소리를 질렀다. 한 손에 칼을, 한 손에 망치를 든 솔이 몰아치는 바람을 헤치고 창을 뛰어다니며 산산조각 부수어 바깥으로 날려버렸다.

에아 신전에서 달아난 베흔을 뒤늦게 쫓아 로비로 달려나온 카렐, 그리고 카토의 앞을 또다시 막아선 건 1소대의 근위대 가디언들이었다. 이미 사방팔방 흩어진 것인지, 아니면 진압된 것인지 그들의 숫자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숫자에서 압도적인 동맹군의 정규군과 가디언들 역시 비효율적으로 사방에 흩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황궁 내부에 흩어진 근위대 가디언들은 이미 1층 곳곳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는 민간인들을 도살해가며 황궁을 혼란 속에 몰아넣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적군의 존재보다 카렐을 더 격분하게 만든 건 에아 신전이 아닌, 1층 로비에 있는 루토의 모습이었다.

“루토!”

로비를 쩌렁쩌렁 울리는 카렐의 고함소리에 기겁을 한 루토가 움찔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똑똑한 그인 만큼, 황제가 왜 이토록 화가 나 있는지, 그리고 물에 흠뻑 젖은 채 반쯤 탈진해 거친 숨을 몰아쉬는 황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에아 신전을 지키라는 내 명령은 어디다가 팔아먹고 여기 와 있는 거냐!”

“.......”

루토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카렐도 이 다급한 상황에서 그와 말싸움을 벌이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바로 그때, 로비 한쪽 계단에서 누군가의 익숙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폐하!”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눈앞이 막막하던 카렐에게 힘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카렐은 이동의자에 몸을 실은 채 시종과 함께 나타난 제네르의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던 할룩스를 끄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폐하, 적들이 궁 안에 들어왔다뇨? 방금 릴라크 경에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만........”

“알고 있는 대로다. 25층 위쪽은 릴라크 경이 일단 통제하고 있는 것 같으니 이곳부터 25층까지는 루토가 맡는다. 난 바빠서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으니 경이 여기서 상황을 통제하고 있도록 해.”

“예? 여기를요?”

제네르가 루토를 힐끔 돌아보았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루토였지만, 카렐은 이 자리에서 그의 잘못을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않았고, 그의 지휘권을 빼앗지도 않았다. 자신의 잘못을 이미 알고 있는 루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책감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지만 카렐이 그에게 내린 ‘처벌’은 제네르와 함께 있으라는 것이 전부였다.

“으음?”

카렐이 급히 할룩스를 확인했다. 발신자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그 보고에는

-플라칼 가, 세닉 가와 거래 성사되었습니다. 곧 루게와 비엔, 사오시안트에서도 보고가 들어올 것입니다.-

라는 짧은 문장만이 담겨 있었다. 격분에 차 있던 카렐의 표정에 비로소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카렐은 제네르를 돌아보며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총리에게 말하게. 플라칼 가와 세닉 가가 이제 우리 편이라고. 여기만 해결하면 우리 승리다.”

“예?”

“그렇게만 말하면 알 게야.”

제네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폐하께선 그럼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저 위.”

“예?”

“101층 통제실로 가야 하지만 바깥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은 100층 주기장이니 거기를 통해야겠지. 어차피 계단이든 엘리베이터든 100층을 통과해야 다른 층으로 갈 수 있도록 되어 있으니. 거기만 막으면.......”

카렐은 카토가 가져온 두툼한 케이블 뭉치와 리프트 발사기, 두꺼운 장갑을 겨드랑이에 끼며 건성 대답했다. 카토와 20여명의 근위가디언들도 서둘러 몸에 리프트를 갖추고 황제를 따를 준비를 서둘렀다.

“엘리베이터를 차단했다고 하니 뛰어서라도 올라가야지.”

카렐이 로비 문을 확 열고 여전히 폭우가 쏟아지는 바깥으로 성큼 나섰다. 번쩍거리는 황궁의 외벽은 단단한 강화유리로 마감되어 있었지만, 군데군데 불이 번진 곳에서는 붉은 불꽃이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고, 100층 위쪽으로는 발리스타에 부서진 구멍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그런 황궁 본관에서 외부를 향해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유일한 구멍이 100층의 주기장, 셔틀들이 드나들던 출구였다.

“비가 많이 와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제네르가 하늘을 올려보며 걱정스레 말했지만 다른 도리가 없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100층을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이 체력적으로 힘든 것도 사실이려니와 군데군데 불 때문에 막힌 곳도 많았고, 그렇다고 별관을 통해 빙 돌아가는 것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준비!”

카토의 명령에, 가디언들은 일제히 주기장이 있는 100층을 향해 리프트를 겨누었다. 불이 번지면서 황궁 곳곳에서 붉은 불꽃과 연기가 솟고 있었지만 주기장 출구가 뚫려있는 100층에서는 유난히 많은 연기가 마치 굴뚝처럼 무섭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응?”

바로 그때, 100층보다 조금 위쪽에서 갑자기 유리창이 산산조각나며 바닥으로 비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누가 투신하려나 봅니다! 피하십시오!”

카토가 위를 올려보는 카렐을 건물 안쪽으로 밀었지만 그는 거칠게 고개를 젓기만 했다.

“저긴 황궁 통제실이야. 안에서 창을 일부러 부수고 있는 모양인데.”

“예?”

카렐은 허리춤에서 울리는 할룩스를 힐끔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누군가가 보낸 긴급 메시지가 그곳에서 반짝이며 황제를 찾고 있었다.

-바로 오실 수 있도록 창을 깨 두겠습니다. 베흔이 이곳에 있습니다. 릴라크.-

메시지를 확인한 카렐은 어깨에 선 리프트의 각도를 조금 올렸다.

“벌써 101층에 갔다니. 망할.”

조금 전까지도 승리의 기쁨에 달아올랐던 카렐의 표정이 어느새 차갑게 굳어 있었다.

“100층이 아니다. 101층이다. 창이 뚫렸으니 바로 들어간다.”

“예?”

“제네르 경, 어쩌면 성문이 열릴지도 모르겠다.”

“예?”

놀라 되묻는 제네르에게 카렐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플라칼 가와 세닉 가가 움직일 때까지.......성문을 딱 30분만 버텨라. 나를 다시 볼 때는 베흔 그놈의 대가리를 손에 들고 있을 게야.”

펑 소리와 함께 리프트가 공중으로 솟아 102층 외벽에 꽂혔다. 올라갈 준비를 하던 가디언들은 흠뻑 젖어 몸에 달라붙은 웃옷들을 귀찮은 듯 찢어 내던졌다. 하나같이 당당하고 우람한 그들의 체구가 빗물을 반사시키며 유달리 번들거렸다.

“오늘은 나도 이것들을 벗는 게 좋겠어.”

카렐은 물에 흠뻑 젖어 무겁고 거추장스러워진 망토와 찢어져 너덜거리는 튜닉을 확 벗어 내던졌다. 몸통만 가린 수트 밖으로, 당장이라도 이 황제를 안고 공중으로 날아오를 듯 용틀임치는 검은 용의 형상이 번쩍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당당하고 보기 좋으십니다, 폐하.”

제네르가 환한 얼굴로 황제를 격려해 주었다. 한때 자신의 몸을 옷 속에 꽁꽁 감추기만 했던 황제였지만 이젠 그의 ‘징그러운’ 몸을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가리려 하지 않았다. 카렐의 단단한 팔에서 긴 근섬유가 불끈 드러났다.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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