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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583화 (582/1,132)

< -- 583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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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창문을 막 부수던 솔은 반대편, 실장실에서 들려오는 네페티와 이라즈의 비명소리, 그리고 불꽃에 고개를 휙 돌렸다. 방향을 휙 돌려 되돌아가려던 그의 앞 연기 속에서 확 튀어나온 웬 거구의 가디언이 막아섰다. 양쪽 모두 상대가 아군인지, 아닌지를 두고 잠시 망설였지만 먼저 상황을 깨달은 건 솔 쪽이었다.

“으, 음?”

그는 뒤늦게 상대를 알아본 근위대 가디언이 장검을 머리 위에 내려찍기 전에 재빨리 바닥으로 몸을 날려 반대편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저기, 저기 적 황빈년이 간다!”

네페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려던 솔의 앞을 가로막은 건 적군이 아닌, 뜨거운 불꽃이었다. 그 불꽃 안쪽에서 무어라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며 불을 끄고 있는 이라즈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그때, 쉬익 하는 소리가 솔의 귓전을 때렸다. 이미 몇 번이나 들은 일 있던 무시무시한 ‘아나콘다’가 날아드는 소리였다. 솔은 이번 아나콘다가 향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 통제실이라는 것을 바로 느꼈다.

“엎드려요!”

솔의 말이 끝맺기가 무섭게, 그 검은 괴물, 그리고 사람 몇은 날려보냄직한 무시무시한 후폭풍이 솔의 앞을 덮쳤다. 동시에 날아든 3발의 아나콘다는 하나는 바닥, 하나는 통제실 벽,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조금 전까지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던 실장실 내벽을 뚫고 그 안쪽을 일거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아, 아아악.......”

후폭풍에 밀려난 솔은 하마터면 까마득한 101층 밖으로 날아갈 뻔했다. 바닥에 고정된 탁자를 붙들고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그의 앞으로 박살난 벽의 파편, 그리고 부서진 가구의 조각이 확 날아들었다.

“이런!”

취익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실장실 안쪽에서 이번엔 부서진 파편들이 이미 뚫려있는 창밖으로 빨려나가듯 확 날아갔다.

“조심해!”

누군가의 비명소리와 동시에, 누군지 알 수 없지만 부상자 중 한 명이 파편에 맞아101층 밖으로 튕겨나가는 끔찍한 광경이 솔의 눈에 들어왔다. 날아가는 부상자를 잡으려 급히 달려나가던 솔은 발이 어딘가로 푹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앗!”

정신을 퍼뜩 차린 솔이 재빨리 몸을 돌려 중심을 잡고 뒤를 내려다보았을 때, 아나콘다에 명중당한 바닥이 완전히 붕괴되어 아래층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이곳 바로 아래의 100층은 황궁 주기장이다 보니 층고가 유난히 높아 웬만한 4층 높이인 40척(12m)에 달했고, 자칫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정도였다.

“세상에.”

솔은 조금 전 튕겨나간 부상자가 101층에서 튀어나가 100층 모서리에 부딪히고, 다시 밖으로 날아가 버리는 끔찍한 모습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황비 전하! 황비 전하!”

애써 정신을 차린 솔은 쓰레기더미가 되어버린 실장실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갔다. 실장실 내벽을 뚫은 아나콘다는 중간이 꺾인 채 파편이 되어 사방에 널려 있었고 십여명이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그들 중 네페티는 없었다.

솔은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콜록거리며 기어나오는 네페티의 모습에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누구 많이 다쳤어요?”

“모, 모르겠다. 자네는?”

네페티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솔의 안전을 살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마찬가지로 파편 밑에서 기어나와 헐떡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이라즈와 눈이 딱 마주쳤다. 마찬가지로 멍한 표정을 한 채 주변을 둘러보던 이라즈는 무너진 벽에 깔려 버둥대고 있던 부상자에게 허겁지겁 달려가 어깨로 벽을 밀어내려 했다.

“이, 이라즈 경.......”

창백해진 네페티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하지만 이라즈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벽을 미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 도와주십시오, 황비 전하, 제 혼자 힘으로는.......”

“이라즈 경, 그거 놓고.......자리에 앉아. 제발.”

네페티가 입가에 갑자기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이라즈를 달래려 했지만 그는 자신의 팔을 붙든 이 황비를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볼 뿐이었다.

“왜, 왜요? 지금 여기 환자가.......”

순간, 네페티가 평소 한 번도 지은 일 없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이라즈에게 쏘아붙였다.

“명령이니까 빨리.”

“하지만......”

네페티가 한 손으로 이라즈의 옆구리를 살며시 짚었다. 움찔했던 이라즈가 그의 손이 닿은 곳을 내려다보았을 때, 그는 자기도모르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건.......”

이라즈가 덜덜 떨며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네페티가 그에게 애써 웃음을 지으며 발로 쓰레기들을 치워내고 누울 자리를 급히 마련해 주었다.

“아.......아아악.......”

뒤늦게 고통을 느낀 이라즈가 바닥으로 천천히 무너지며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아나콘다에서 떨어져 나온 긴 쇠붙이가 살 속을 뚫고 들어가 있었다.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속으로 어느 정도나 파고들었는지 밖에서 보아서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다쳐 쓰러진 동생을 뒤늦게 발견한 밀리타가 허겁지겁 달려와 그를 팔에 안았다. 급히 숄을 벗어 이라즈의 상처를 가려주며 네페티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라즈 경이 다쳤네, 폐하께서 아시면.......”

밀리타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동생의 맥박과 호흡을 급히 확인하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제가 돌보겠습니다. 치명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부탁하겠네.”

네페티는 밀리타의 손을 꼭 쥐어주고는 급히 다른 부상자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편에서는 이곳으로 진입하려는 근위대 가디언들과, 릴라크의 몇 안 남은 가디언들과의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통제실을 짙게 채운 연기 속에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네페티는 웬 익숙한 형상의 사람이 바닥에 쓰러진 누군가의 목에서 열쇠를 거칠게 뜯어내는 광경을 보며 순간 전율했다.

“소, 솔! 조심하게!”

“앗!”

그때까지도 네페티를 지켜보던 솔은 조금 전 ‘열쇠를 집어든 자’가 내지른 양손검을 가까스로 쳐냈다. 뿌연 연기 속에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던 솔, 그리고 상대방은 움찔거리며 서로에게서 뒷걸음쳤다. 하지만 솔은 상대의 키가 카렐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잠시나마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뒷걸음치던 상대 역시 자신이 공격했던 것이 누구인지를 얼마 가지 않아 깨달았다.

“네피놈 딸년이군.”

왼손에 열쇠 꾸러미를 든 베흔이 옆구리의 지독한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중얼거렸다. 묘하게 내키지 않았지만, 꾸물거릴 시간은 없었다. 불은 이들을 혼란에 빠뜨렸지만 방의 지독한 연기는 베흔 일행의 시야 또한 옥죄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어쨌든 그들의 적이었다.

솔이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이곳에서 비켜준다면, 그의 뒤로는 실장실의 부서진 폐허와 네페티, 무수한 부상자들, 그리고 그 뒤의 방어시설 해제장치만이 남아있었다. 몇몇 장치들은 황제의 키가 동시에 있어야 작동이 가능했지만 성문을 열거나 황도의 전원을 차단하는 것 같은 일부 장치들은 그가 조금 전 빼앗은 실장의 키만으로도 충분히 손댈 수 있는 것들이었다.

“제롬 공이 첩으로 삼고 싶어 하니 죽이지는 않지. 귀찮으니 꺼져라.”

상대를 얕잡아본 베흔이 짜증스레 쏘아붙이며 솔에게 사정없이 발길질을 내질렀다. 하지만 솔은 그에게 길을 내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재빨리 한 발 물러나며 갈비뼈가 부러진 베흔이 둔하게 내지른 발을 향해 칼을 힘껏 내리찍었다.

“이년이!”

그의 저항에 깜짝 놀란 베흔이 몸을 휙 돌리며 솔의 뒤통수를 향해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급히 고개를 숙인 그의 머리털 몇 개를 잘라낸 것이 고작이었다. 이 겁쟁이 계집이 놀라 도망칠 것으로 생각했던 베흔을 더더욱 놀라게 한 건 그 다음이었다.

“얕보지 말라고!”

몸을 낮춘 솔이 악 소리를 지르며 베흔의 옆구리를 어깨로 힘껏 들이받았다. 평소였다면 이 반쪽 가디언의 등을 내리찍어 한 번에 척추를 부러뜨려놓았을 베흔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그렇게 빠르지 못했다.

“우우욱!”

부러진 갈비뼈 자리를 다시금 타격당한 베흔은 평소의 그 용명이 무색해질 정도로 맥없이 밀려나 바닥을 뒹굴었다.

“으악!”

거의 창가까지 밀려난 베흔은 하마터면 솔에게 허리를 붙들린 채 함께 바깥으로 튕겨나갈 뻔 했다. 눈앞이 아찔해졌던 베흔은 모서리를 붙들고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씨발, 이년이 미쳤나!”

베흔이 쓰러지며 거칠게 휘두른 칼날을 솔이 어떻게든 막아보려 일단 칼날을 가져갔지만 아무리 그가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감히 힘에서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우읍!”

팔뼈를 부러뜨릴 듯 어마어마한 충격에 솔이 휘청거리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창밖으로 꺼져!”

그새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베흔이 솔의 머리채를 비틀어 쥐고는 훤히 뚫린 창밖을 향해 힘껏 떠밀어버렸다. 하지만 밀려나가던 솔 역시 지지 않고 그의 발목을 꽉 움켜쥐었다. 101층 상공으로 밀려난 솔의 필사의 비명소리가 비오는 창밖을 날카롭게 울렸다.

“으앗!”

그에게 발목을 채인 베흔은 어어하는 새, 그는 바깥으로 튕겨나가던 솔의 체중에 당겨지며 창 바깥으로 다시 미끄러졌다.

“이런!”

바닥을 칼로 찍어 모서리에서 어렵게 멈춘 베흔은 마치 물귀신처럼 그의 발목을 붙들고 바깥에 매달린 솔을 노려보며 이를 뿌득 갈았다. 이 귀찮은 계집 때문에 거의 1분 가까이를 제어장치에 접근하지도 못하고 묶여 있었다.

그리고 솔은 베흔의 한쪽 다리를 끌어안은 채 101층 공중에서 버둥대고 있었다.

“이년이! 놓지 못해!”

베흔이 악을 쓰며 다리를 흔들었지만 그의 발목을 붙든 솔 역시 놓치면 끝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거친 비가 몰아치는 101층의 까마득한 허공이 펼쳐져 있었다.

“아, 아악.......”

공포에 질린 솔이 반쯤 비명을 지르며 공중에서 버둥거렸다. 한 손으로 베흔의 발목을 붙든 솔은 그의 장화자락을 필사적으로 움켜쥐며 나머지 한 손으로 외벽을 짚으려 했지만 비로 흠뻑 젖은 황궁 외벽의 타일은 야속할 정도로 미끄러웠다. 게다가 베흔의 가죽장화 역시 물에 젖으면서 조금씩 더 미끄러워져갔다. 그때, 거센 바람이 한 번 몰아치면서 그의 손이 조금 더 아래로 미끄러졌다.

“제발.......살려주세요.”

추락의 코앞에 직면한 솔의 머릿속에 아버지 네피의 순박한 표정, 카렐의 믿음직한 미소가 차례로 스쳐 지났다.

“제발, 제발.”

그는 밑을 내려다보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은 그 스스로도 모르게 까마득히 먼 땅 쪽을 향했다. 순간, 그의 밝은 눈은 바로 같은 시각, 실처럼 가는 케이블 하나에 의지한 채로 빗속에서 외벽에 매달려 올라오던 30여명의 동맹군 가디언들, 그리고 그 중간에서 101층이 있는 공중을 막 올려보던 익숙한 회색빛 눈동자와 똑바로 마주쳤다.

“솔?”

황궁 외벽을 타고 85층 가까이까지 기어 올라온 카렐은 101층, 통제실 창밖에서 무언가에 매달려 비명을 지르고 있는 솔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며 손을 저으려는 솔에게 급히 입을 가려 보였다. 카렐의 이름을 부르려던 솔 역시 입술까지 걸렸던 숨을 꿀꺽 삼키며 입을 다물었지만 공포에 질려 있는 것은 여전했다.

솔의 모습에도 애써 냉정함을 찾으려 애쓰며, 카렐은 함께 기어오르고 있는 카토에게 급히 수화를 보냈다.

‘적이 이미 들어와 있는 모양이다. 기도비닉에 유의해라.’

위험에 처한 솔의 모습을 보아 통제실 안에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이 분명했다. 깨진 통제실 창밖으로 검은 연기, 그리고 드문드문 불꽃도 보였다.

카렐은 다시 솔을 올려보았다. 누군가의 발목을 붙든 솔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아 저대로는 미끄러져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카렐은 자신의 위치와 솔이 매달린 위치를 재빨리 가늠했다. 솔은 카렐이 오르고 있는 위치의 수직 위에서 왼쪽으로 적어도 40척(12m) 가까이 떨어져 있었다. 솔이 손을 놓치고 떨어진다면 밑에서 그를 받아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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