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84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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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제발 버티어다오.”
카렐은 허리에 찬 케이블을 최대한 풀고 손을 벽을 짚어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무시무시한 악력으로 타일을 깨고 조금씩 왼쪽으로 움직여갔다. 그때, 또다시 들려온 솔의 비명소리에 카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가죽장화의 주인’이 매달린 솔을 떨쳐내려 계속 버둥대고 있었다.
“어떤 개새끼인지 잡히면 골통을 으깨 줄 테다.”
솔을 떨어뜨리려는 자를 올려보며, 카렐이 이를 갈았다. 겁먹은 솔은 다시금 카렐이 있는 밑을 내려다보았다. 조금씩 힘이 빠지는 듯 그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카렐은 손톱이 깨져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손에 다시금 힘을 주며 타일 하나를 깨부수고 왼쪽으로 움직였다. 그때 솔이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아, 아악!”
조금씩 미끄러지는 손을 결국 추스르지 못한 솔이 결국 베흔의 장화를 놓치고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솔의 비명소리, 떨어지며 펄럭거리는 솔의 옷자락이 거친 비바람에 흔들리며 요란스레 소리를 울렸다.
“이씨!”
카렐이 순간 온몸을 떨었다. 지금 그의 위치에서는 아무리 팔을 뻗어도 잡아줄 수 없는 까마득한 허공으로, 솔이 떨어지고 있었다.
카렐이 두 다리에 최대한 힘을 주며 벽을 박차고 89층의 공중으로 몸을 힘껏 날렸다. 가는 줄 하나에 모든 체중을 의지한 그의 길고 매끈한 몸이 검은 새처럼 사방으로 물방울을 튀기며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비어 젖어 번들거리는 카렐의 단단하고 긴 근육질 팔이 떨어지는 솔을 향해 죽 뻗어나갔다.
“으아악!”
공중에서 버둥거리며 눈을 감았던 솔은 공중에서 자신에게 손을 뻗어오는 카렐을 향해 본능적으로 두 팔을 내밀었다. 그런 그의 왼팔과 겨드랑이를 카렐의 굳은 팔이 거칠게 낚아채 품에 꽉 껴안았다.
“아으읍!”
어깨와 가슴, 왼팔의 지독한 고통에 솔이 비명을 질렀다. 붙들리며 뼈가 부러졌는지, 지독한 고통이 그의 가슴과 왼쪽 어깨를 압박했다. 순간, 길이가 다한 카렐의 케이블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꽉 껴안은 둘의 몸이 까마득한 공중에서 잠시 멈추며 제자리를 빙 맴돌았다.
“괜찮아, 응?”
중심을 잃고 거꾸로 뒤집어진 카렐이 몸부림치는 솔을 두 팔로 품에 꽉 안아주었다. 잠시 고통을 잊은 솔 역시 그의 허리를 부둥켜안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정점까지 솟아올라갔던 둘은 마치 시계추처럼 다시 황궁의 벽을 향해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마라.”
카렐은 공중제비를 하듯 몸을 휙 돌려 다리를 황궁 외벽을 향해 내밀었다. 그리고 돌진해오는 황궁 외벽을 사뿐하게 딛고 마치 스프링처럼 몇 발짝을 공중으로 휙 날아올라 한 손으로 외벽 틈새를 재빨리 꽉 움켜잡았다.
“이익!”
무시무시한 관성을 이겨내며, 용이 새겨진 카렐의 팔과 어깨 근육이 가는 섬유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지금껏 내어왔던 중 가장 강력한 힘으로 그 스스로와, 품에 안긴 한 사람의 체중을 버티어냈다. 긴장이 풀린 카렐이 끄응 하고 소리를 내며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거의 묘기에 가까운 공중 쇼를 연출해 낸 둘은 96층 외벽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매달려 있었다. 이 가슴졸이는 광경을 잔뜩 긴장한 채 지켜보던 카토와 동맹군 가디언들이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학, 학.”
어느새 비에 흠뻑 젖은 솔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황제의 지친 얼굴을 올려보았다.
뼈가 부서진 끔찍한 고통이 가슴과 왼팔을 압박했지만, 그의 발밑으로는 여전히 끔찍한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었지만 솔은 태어나 그의 품 안이 이토록 따뜻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그나마 성한 오른팔에 힘을 꽉 주어 카렐의 허리를 안았다. 그는 카렐의 귀 옆에 거칠게 뺨을 부빌 뿐, 다른 그럴싸한 멋진 말은 단 한 마디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제 괜찮다. 내가 잡고 있으니 안심해라.”
거친 호흡과 함께 내놓은 카렐의 위로는 언뜻 무미건조했지만 솔에게는 아무 상관없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아니면 그 둘 다인지 알 수 없는 짭조름한 무언가가 그의 얼굴을 흠뻑 적시며 흘러내렸다.
“꽉 잡고 있어라.”
카렐은 팔과 어깨가 부러진 솔을 왼팔에 단단히 안은 채 나머지 오른팔만으로 다시 외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101층, 통제실이 코앞에 있었다.
릴라크에 이어 귀찮게 덤비던 솔까지도 떨쳐낸 베흔에게는 앞을 가로막을만한 것이 더 이상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 아나콘다에 이미 반쯤 부서진 실장실에 비틀비틀 들어섰다. 동맹군의 중요인사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들은 중요치 않았다.
불꽃을 피해 급히 뛰어든 그는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제어장치 위에 잔뜩 쌓인 파편을 치우기 시작했다. 실장실 안은 이미 연기로 가득 차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정도였지만 그 배치와 구조 자체에 익숙한 베흔에게는 큰 상관이 없었다.
이곳에는 격벽식 방어체계 작동스위치, ‘황룡의 여섯 이빨’에 해당하는 부속성들의 방어체계 통제장치, 황성의 성문 잠금장치, 황도의 마스터 전원이 차례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 중 격벽식 방어체계는 황제의 키가 함께 있어야 작동 가능했지만 황도의 성문 개폐장치는 그가 가진 실장의 키만으로도 충분했고, 황도의 마스터 전원과 부속성들의 제어장치는 약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해킹이 가능했다.
“이제 드디어 끝장이군, 아니, 지긋지긋한 카파키 가 놈들.”
기계를 더듬어 구멍을 찾아낸 베흔은 손에 들고있던 피 묻은 키를 꽂아넣고 일단 성문 잠금장치에 달라붙었다. 실장실 한쪽에는 황성의 5개 성문을 여는 큰 손잡이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차례대로 벽에 설치되어 있었다.
바깥, 통제실 쪽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검은 연기 너머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틀림없이 그가 데려온 근위대 가디언들의 것이었다.
“카렐이다!”
베흔이 순간 움찔했지만 이젠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는 깊이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그의 머릿속에 마치 트라우마처럼 걸려 있던 ‘북동문’의 개폐장치부터 힘껏 내리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머리 위에서 붉은 빛이 번쩍이면서, 성문의 잠금장치가 해제되고 있다는 요란스런 경보음이 통제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물론, 그는 정작 동북문을 ‘공격’하고 있어야 할 세닉 가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잠시 후, 북동문이 완전히 열렸다는 표시와 함께 붉은 등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끝장이다, 카렐 네년.”
베흔이 숨을 헐떡거리며 뒤를 잠시 돌아보았지만 짙은 연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바깥에서도 이곳을 제대로 볼 수 없을 터였다. 북동문을 일단 연 그는 델루지 가가 한참 공격하고 있을 동문의 손잡이에 급히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두 번째의 붉은 등과 경보음이 다시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이 새끼!”
손잡이를 내리고 있던 베흔은 머리 뒤에서 들려온 쉿 하는 소리에 기겁을 하고 놀라며 반사적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반대편 연기 속에서 날아온 단검이 손잡이 옆의 벽에 딱 소리를 내고 박히며 그 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베흔이 가만히 있었다면, 그의 숨골을 그대로 꿰뚫었을 위치였다.
“제기랄.”
바닥에 엎드렸던 베흔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다시금 손잡이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하지만 마치 그의 이런 행동을 예상했다는 듯, 또 하나의 단검이 연기 속에서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아압!”
베흔은 몸을 부르르 떨며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그에게 조금 전 같은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는지, 그의 오른쪽 겨드랑이 뒤, 광배근에 단검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이미 박살난 갈비뼈에 뒤이어 등까지, 그의 호흡을 조금씩 더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베흔은 다시 일어나 손잡이를 내릴까 말까 했지만 일단 포기하기로 했다.
“이익.......”
베흔이 바닥에 웅크린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성문의 제어손잡이는 반쯤만 내려진 채 여전히 시끄러운 경보음으로 그의 귀를 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음 너머, 황성 동북쪽, 그리고 동쪽에서 들려오는 와아 하는 거대한 남부연합군의 함성 또한 함께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그 소리를 당연히 성문이 열린 데 기뻐하는 연합군의 환호성 소리로 생각했다.
북동문을 이미 완전히 열었다면 동문은 어차피 반만 연 것으로도 연합군 병력이 안으로 밀고 들어오기는 충분했다.
“내 목부터 지켜야 하나.”
더 이상 성문을 여는 것을 포기한 베흔이 쓰레기더미 속에 몸을 숨긴 채 조심조심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짙은 연기 속에서 유난히 날씬하고 긴 누군가의 형상이 아른거리며 드러난 건 그때였다.
“어딨냐, 베흔.”
쇳소리처럼 거친 귀에 익은 목소리에 베흔의 온몸이 가늘게 떨려왔다. 한 손에 오르마즈의 칼을 쥔 채 연기 속에 서 있는 건 자신이 가르치고 키웠던 바로 그 괴물이었다. 물론 베흔은 성치도 않은 몸으로 카렐에게 덤벼들 바보는 아니었다. 빗물에 흠뻑 젖은 카렐의 하얀 맨몸이 연기 속에서 유달리 번들거렸다.
베흔은 가지고 있던 할룩스로 본대에 ‘아나콘다를 모조리 동원해 101층을 쳐라’고 메시지를 조심스레 보냈다. 극단적인 선택이었지만, 달아나려면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학, 학......”
베흔이 숨을 죽인 채 연기 밑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연기로 가득 찬 이 폐허 속에는 여러 부상자들이 꿈틀대고 있었고, 베흔이 숨죽인 채 이 짙은 연기에 숨어 잘 빠져나간다면 도망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남부연합군이 곧 성 안으로 들이닥칠 테고, 이곳만 빠져나간다면 승전의 영광은 그의 차지였다.
검은 연기로 가득 찬 쓰레기더미 사이에 선 카렐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쓰레기더미 사이사이에서 신음하는 부상자들, 채 3척(90cm)도 되지 못할 최악의 시계, 지독한 연기와 사방에서 혀를 낼름거리는 불꽃 때문에 베흔의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놈만 잡으면.......’
카렐이 두 눈에 힘을 주었지만 이 숙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베흔이 데려온 20여명의 가디언들은 실장실 밖에서 카렐이 데려온 가디언들과 마지막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들을 제압하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였고, 이제 베흔만 잡으면 끝이었다.
“어차피 네놈이 갈 곳은 뻔하다.”
카렐이 연기 속을 향해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 잡아낼 자신은 없었다. 조금 전 손잡이가 있을만한 곳에 무작정 던진 단검으로 일단 동문이 더 열리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곳에서 내뺀 베흔이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으읍!”
발밑에 걸린 누군가의 몸에 잠시 움찔했던 카렐이 반사적으로 칼을 치켜들었지만 곧 거두어야 했다. 그곳에는 공포에 질린 검은 눈을 한 채 남동생 이라즈를 안고 있는 밀리타가 보였다.
“이라즈 경? 왜 여기에.......”
한 개의 마스크로 동생과 번갈아가며 힘겹게 숨을 쉬고 있던 밀리타는 짐짓 눈물을 글썽이며 카렐의 다리를 와락 껴안았다. 카렐은 당장이라도 칼을 내던지고 이라즈의 상태부터 살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밀리타와 이라즈에게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손짓을 보내고는 실장실 안으로 조금 더 깊숙이 걸음을 들이밀었다.
“네놈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긴 하지만, 이젠 나도 변했다.”
자신의 주변 30척(9m) 이내의 어딘가에 베흔이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카렐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혹시 아나? 내 아버지께서 너를 죽이지 말고 중용하라 말씀하셨다는 걸?”
연기 속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물론 카렐도 그 용의주도한 숙적이 무슨 반응을 보이리라 생각하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의 주의만 빼앗을 수 있다면 충분하리라고 하는 말이기는 했지만 카렐 스스로도 어쩌면 절반 정도는 자신의 진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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