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85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
.
.
“할머니 유평대제께서 네놈을 믿지 않았다는 건 확실해. 그런데도 네놈에게 후사를 맡길 수밖에 없었던 건 죽음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택한 선택이었겠지. 물론, 네놈은 그 예상을 저버리지 않고 배신을 저질렀고.”
카렐은 왼쪽에서 들려온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휙 돌아섰다. 반사적으로 칼을 내지르려 했던 카렐은 가스에 질식한 채 몸을 꿈틀거리는 부상자의 모습에 다시 입가를 씰룩거렸다.
“신기한 건 할머니께서 그때까지 널 살려두고 아버지의 안전을 맡기려 하셨다는 그 자체야. 나라면 어떤 식으로든 안전책을 마련해 두었을 텐데 말이다. 할머니가 그렇게 허술하신 분이 아니신데 말이야.”
카렐은 자신의 주변에서 동시에 느껴지는 여러 움직임에 다시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래, 그야 어쨌든, 나도 이제 황제고, 할머니처럼 네놈의 가치를 잘 알고 있어. 잘만 쓴다면 ‘등급없는 가디언’ 출신 잔혹한 황제 밑에서 네 본능을 맘껏 발휘해 줄 수 있으리라는 걸 말이다. 나도 그런 놈이 하나쯤 필요하고 말이다.”
카렐의 회색빛 눈동자가 좌우로 천천히 굴렀다.
“넌 이번이 과욕이 심했어. 지금까지처럼 적당히 2인자, 3인자에 만족했었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내 그걸 이제라도 수습할 기회를 주지. 그래, 솔직히 말하지. 네놈의 그 잔혹함이 탐나. 아주 간절하게 말이다.”
‘저놈이.......’
바닥에 엎드려있던 베흔 역시 카렐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다. 그가 놀란 건 카렐이 이런 깜짝 놀랄 제안을 했다는 것이 아니고, 이런 감언이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정도로 그가 뻔뻔해졌다는, 그리고 당당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군.’
베흔은 옆구리와 등의 지독한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움직이려던 그의 귀에 카렐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아직 넌 모르겠지만 남부 최고제후는 곧 바뀔 거다. 지금의 델루지 가.......아니, 제롬의 핏줄이 2제후로라도 상급귀족으로 살 수 있을는지는 지금 내 손에 달려있지. 이젠 네가 선택해라.”
바닥을 조심조심 기어가던 베흔은 하마터면 놀라움에 소리를 낼 뻔했다. 그가 놀란 건 아들 제롬 때문이 아니었다. 남부 최고제후 운운하는 것을 보아 카렐이 플라칼 가와 어떤 식으로든 ‘접촉’했다는 뜻이었다. 충격은 받은 베흔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카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문득 돌아보았다.
“내가 제롬 그 새끼의 정체를 알면서도 왜 입을 계속 다물고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나? 아니, 그놈이 너희 황비인 구르베스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면서도 왜 그걸 터뜨리지 않았는지도?”
베흔은 잠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카렐의 악마같은 웃음소리가 짙은 연기 속에서 가늘게 울리고 있었다.
‘저 썅년을.......’
베흔이 이를 빠득 갈았다. 카렐은 베흔, 그리고 아들 제롬을 언제든 공격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거리’를 아직 터뜨리지 않은 채 마치 비수처럼 감추어오고 있었다. 그것들이 지금껏 네페티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믿어왔던 베흔이었지만 카렐에게는 다른 속내가 함께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달아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베흔은 이 전투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다 해도 카렐이 행여 살아남아 도망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 제롬까지 모조리 정치적 위험에 처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했다. 그에게는 선택이 많지 않았다. 카렐을 죽여 ‘영원히 입막음’을 하던지, 카렐에게 고개를 숙이던지, 둘 중의 하나였다.
그때, 베흔은 실제로 밖에서 몰려들어오던 짙은 연기가 조금 전보다 한결 옅어져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카렐의 페이스에 말려든 채 지금까지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그때, 실장실 바깥에서 카토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나콘다다!”
카렐이 고개를 휙 돌렸다. 베흔의 명령을 받은 근위대 사역병단이 드디어 일제포격을 개시한 모양이었다.
“씨이!”
기회를 잡은 베흔은 등에 메고 있던 무거운 양손검까지 내버려둔 채 실장실의 무너진 틈새로 잽싸게 몸을 날렸다. 성벽 쪽에서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아나콘다는 카렐의 예민한 감각으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폐하! 피하십시오! 그쪽으로.......”
바로 코앞으로 날아드는 그 괴물에 깜짝 놀란 카렐이 자리에 엎드렸고, 동맹군 가디언들과 통제실의 병사들, 민간인들이 바닥에 몸을 날리거나 벽 뒤로 허겁지겁 몸을 피했다. 누군가에게는 무시무시한 죽음의 위협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사지에서 달아날 하늘이 준 기회였다.
“퇴각! 퇴각!”
베흔의 고함소리에 2소대장을 비롯한 근위대 가디언들이 뒤로 휙 돌아섰다. 그들 대부분이 뒤를 덮친 카렐의 가디언들에게 밀려 이미 101층 창가 구석까지 밀려나 있었다. 조금만 더 몰아붙인다면 101층 창밖으로 추락사할 상황이었다.
“저기다!”
고개를 든 카렐이 도망치는 베흔의 뒷모습을 확인했지만 동시에 밤하늘에서 날아드는 수십 발의 아나콘다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카렐은 당장 그를 쫓아 달려나가 뒷덜미를 붙잡고 싶었지만 명색이 황제인 그가 그런 일에 목숨을 걸 수도 없었다.
첫 번째 아나콘다가 날아들어 실장실 안쪽, 성문을 여는 손잡이가 있던 그 자리의 벽을 산산조각내고 내장재의 크고 위험천만한 파편을 사방으로 흩날렸다.
“내가 한 말 잊지 마라!”
카렐의 경고에 가까운 외침을 뒤로하고, 베흔은 손에 들고 있던 마지막 연료 덩어리에 불을 확 붙여 카렐, 그리고 동맹군 가디언들의 앞에 던지며 허리의 리프트 케이블을 번개처럼 뽑아들었다. 연료 덩어리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나며 사방으로 확 솟구쳐 오르는 거센 불꽃에 가디언들 몇 명과 이곳의 기간요원, 민간인들이 얼굴과 눈을 가리며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다.
“성문이 이미 열렸다! 100층으로 모두 뛰어내려!”
베흔이 향하고 있는 곳은 몇 분 전, 아나콘다에 붕괴되어 100층과 이어진 채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바닥의 큰 구멍이었다. 뒤이어 대여섯발의 아나콘다가 다시금 통제실 부근을 당장이라도 때려부술 듯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아아악!”
그의 등 뒤로 아나콘다에서 튀어나온 무수한 파편들이 폭발하듯 날아들어 뒤를 때렸다. 그 폭풍에 밀린 베흔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꼬꾸라지며 그가 향하던 큰 구멍에 몸을 부딪혔다. 보통의 가디언이었다면 이미 입은 부상만으로도 고통에 몸부림치며 100층으로 맥없이 곤두박질쳐 머리부터 떨어졌겠지만 그는 5세대, 그것도 8그룹의 피를 이어받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2명 중의 하나였다.
“아쿠!”
바닥의 골조를 붙들었던 그는 공중에서 반 바퀴를 빙 돌아 주기장이 있는 100층 바닥에 다리부터 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휙 돌려 바닥을 몇 바퀴 구르고서야 어렵게 멈춰 설 수 있었다. 그에 뒤이어 101층에서 어렵게 탈출한 십여 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이 허겁지겁 그에게 달려들었다.
“대장! 대장!”
2소대장이 부상을 입은 베흔을 업으려 했지만 그는 부하를 거칠게 쳐내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궁 주기장이 있는 100층 역시 안쪽에서 뿜어나온 연기와 불꽃, 그리고 101층에서 빗나간 아나콘다들이 내리꽂히며 아수라장이 되어 이들을 쫓을 여유가 없어 보였다. 바로 위의 101층에 아나콘다가 계속 꽂히는 굉음이 천장을 뒤흔들었고, 무너진 천장에서 골조 조각이 마치 눈꽃처럼 쏟아져 내렸다.
“강하! 강하해! 혼자 갈 수 있다!”
아수라장이 된 주기장을 가로질러 달려간 베흔은 아래로 적들이 보이지 않는 출구를 찾아 리프트 케이블을 걸었다. 그리고 100층, 강풍과 빗발이 몰아치는 외벽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1소대! 내가 내려가고 있는 아래의 안전을 확보해 놔!”
베흔이 가슴과 등을 압박하는 지독한 고통을 참아내며 악을 썼다. 성벽 밖에서 근위대 사역병단이 소나기처럼 날리는 아나콘다에 황궁의 101층과 그 위아래 몇 개 층이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쏟아지는 파편들은 리프트를 타고 뛰어내리는 베흔과 그 일행들의 머리 위에까지 쏟아졌지만 카렐이 올라올 때와는 달리 거의 자유낙하에 맞먹는 속도로 내려가는 그들이 목숨의 위협을 버티어내야 하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대장! 대장!”
밑에서 미리 기다리던 1소대장이 비틀거리며 지상에 내려선 베흔의 가슴을 안으며 악을 썼다. 땅을 밟은 베흔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번졌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우리가 이겼다. 성문이 열렸고 곧 연합군이 들이닥칠테니.......”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1소대장은 지쳐 주저앉으려는 베흔을 재빨리 업으며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빨리 나가야 합니다.”
“뭐?”
탈진한 채 부하의 등에 업힌 베흔이 버럭 화를 냈다. 101층에 올라간 이후로, 그는 할룩스로 들어온 무수한 보고들을 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아니, 카렐에게서 몰래 도망치느라 감히 그럴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나가긴 어딜 나가! 아무 곳이나 숨어서 버티기만 하면 된다니까! 동문으로 델루지 가 군대가 들어오고 있으니 몇 분만 있으면 이곳은.......”
“지금 그게 아니라니까요!”
1소대장은 자신이 감히 베흔에게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는 데 지레 놀라며 그의 눈치를 재빨리 살폈다. 그에게 업힌 베흔 역시 부하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를 바로 눈치 챘다.
“무슨.......뜻이냐?”
“델루지 가는 동문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1소대장이 베흔을 업고 어딘가로 급히 뛰어가며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베흔이 쓰러진 이상, 이제 그가 선임자였다.
“지금은 여기서 달아나는 게 우선입니다.”
“상황이 어떻냐니까!”
베흔이 바락바락 악을 썼다. 마치 몇 달 전, 이곳을 카렐에게 내주고 떠날 때처럼 지독한 무력감이 그를 땅 밑으로 잡아끄는 것 같았다.
“세닉 가가 호지 가를 쳤고, 플라칼 가가 델루지 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연합군은 붕괴 직전입니다. 페로와 제네르 두 놈이 아메샤 스펜타로 동문을 직접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 같아서는.......성 안으로 진입할 여력이 없습니다.”
베흔이 숨을 멎었다. 1소대장은 ‘붕괴 직전’이라고 표현했지만 그의 말대로라면 이미 붕괴나 마찬가지였다.
“세, 세닉 가까지?”
1소대장은 대답 대신 주변부터 살폈다. 설상가상으로 사방에서 모여든 동맹군 병사들과 가디언들이 도망치는 그들의 주변을 조금씩 조여오고 있었지만 사방에서 쏟아지는 아나콘다의 맹렬한 포격과 본관을 태워들어가고 있는 불 때문에 아직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해가 뜨고 적들이 황궁을 제대로 통제하기 전에 빠져나가야 합니다.”
1소대장의 등에 업힌 베흔은 잠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곧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황궁 컴플렉스 외부는 이미 완전히 폐쇄되었을 텐데.”
“없지는 않습니다. 제 짐작이 맞다면 말입니다.”
1소대장이 재빨리 시계를 보았다.
“4시 45분이군요, 아직은 가망이 있습니다.”
황궁 곳곳에 불을 지르며 혼란사태를 연출한 근위대 가디언들이 1소대장에게 속속 합류했지만 황궁에 난입했던 100여명 중 무사히 살아서 돌아온 가디언들은 채 절반도 되지 못했다.
1소대장의 등에 업힌 채 이를 갈던 베흔은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수하’가 될 지도 모르는 그의 얼굴을 새삼스레 다시 쳐다보았다. 카타콤베의 지독한 어둠 때문에 이번에 투입된 수하 가디언들의 얼굴을 제대로 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아니 이번 부대의 편성을 드루그가 담당했었다보니 직책 외에는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기분 때문인가.”
베흔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업고 가는 이 1소대장과 언젠가 다른 일로 만난 일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꼬치꼬치 따져물을 여유가 없었다.
“저기! 저기 베흔 놈이 도망친다!”
누군가의 외침에 1소대장이 잠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오래 끌지는 않았다. 그는 베흔을 업은 채 황궁 본관의 서쪽,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정원에 뛰쳐들었다.
“어디로 도망간다는 거냐.”
패닉 상태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난 베흔이 이를 갈며 물었지만 이미 숨이 목에까지 찬 1소대장은 짧게만 대답했을 뿐이었다.
“와 보시면 압니다. 시간이 없으니 설명은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1소대장, 그리고 그를 따라온 40여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이 도착한 곳은 이들이 처음 지상으로 나왔던, 하오마 신전으로 통하는 지하 구덩이였다. 1소대장은 다시금 시계를 보았다.
“4시 53분........7분 남았다, 7분.”
그는 베흔을 업은 채 그 시커먼 구덩이 안에 서슴없이 뛰쳐들었다. 지하 카타콤베에 ‘학을 떼었던’ 근위대 가디언들은 이 끔찍한 구덩이에 다시 뛰어드는 그의 이 이상한 행동에 순간 당황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처음부터 1소대장을 따라왔던 선임 가디언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대장님! 여긴 막혀있지 않았습니까!”
“알아. 하지만 곧 열릴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