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86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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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흔을 업은 1소대장, 그리고 그를 뒤따르는 40여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은 랜턴으로 앞을 비추며 가파른 나선계단을 필사적으로 달려내려갔다. 그리고 이들을 발견한 십여 명의 페로 가디언들, 그리고 숫자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정규군들 역시 그 뒤를 급히 따라붙어오고 있었다.
“저놈들을 어쩌죠?”
“신경 쓸 것 없어!”
나선계산에서 훌쩍 뛰어내려 지하에 내려선 1소대장을 선두로, 그들은 재빨리 랜턴을 켜고 허겁지겁 하오마 신전을 향해 달렸다. 그들을 쫓아 나선계단을 달려 내려온 페로 가디언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구르는 소리, 앞이 잘 안 보인다며 악을 쓰는 욕지거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4시 58분입니다!”
“알아!”
베흔을 업은 1소대장이 다리에 더더욱 힘을 붙였다. 멀리 하오마 신전의 널찍한 공간, 그리고 여전히 화강암으로 단단히 막혀 있는 반대편의 출구가 보였다.
“소대장님, 아직.......”
당황한 선임가디언이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랜턴을 든 정규군들과 합류한 십여 명의 페로가디언들이 그들의 뒤를 좁혀오고 있었다. 그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40여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은 사지에 제 발로 뛰어든 꼴이었다.
“씨발! 따라오라니까!”
1소대장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바로 그때, 시계가 5시 정각을 가리켰다. 기다렸다는 듯, 쿠르릉 하는 낮은 울림이 그들의 발밑을 가늘게 흔들었다.
“저리로!”
1소대장이 막 움직이고 있는 화강암 벽을 가리켰다. 그의 예상대로, 조금 전까지도 단단히 닫혀 있었던 시커먼 입구가 조금씩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의 등에 업혀있던 베흔, 그리고 뒤따라온 선임 가디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날 따라와!”
1소대장은 막 입을 벌린 구멍 안으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뒤따라 추격해오던 페로 가디언들이 할룩스로 무언가 알리려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원군을 요청하는 것 같았지만 작동이 되지 않자 짜증스레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제기랄! 일단 쫓아가!”
페로 가디언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근위대 가디언들의 뒤를 당장이라도 따라잡을 듯 계속 쫓아왔다. 이미 이곳을 ‘헤매면서’ 이곳의 지긋지긋한 구조에 어느 정도는 익숙해져 있는 근위대 가디언들을 따라잡는 건 쉽지 않았다. 근위대 가디언들은 제법 널찍한 방사형 회랑을 타고 1소대장을 따라 카타콤베의 ‘중심점’을 향해 필사적으로 뛰었다.
“앞에 갈림길입니다!”
선임 가디언이 앞쪽을 랜턴으로 비추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말대로, 정면, 그리고 좌우로 갈라지는 3갈래길이 그들의 앞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지금 몇 시냐!”
“05시 4분입니다! 어디로 갈까요?”
“정면!”
1소대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끝을 앞으로 가리켰다. 그의 지시대로, 40여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은 갈래길에서 서슴없이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막혀 있으면 어쩌죠?”
“무슨 상관이야! 모두 정지!”
1소대장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서자 필사적으로 도망만 치던 가디언들이 움찔하며 자리에 서서 소대장을 돌아보았다. 그는 등 뒤에서 흐느적거리고 있는 베흔을 부하 가디언의 등에 업혀주고는 랜턴으로 급히 바닥을 살폈다.
“그래, 이제야 알았다. 여기로군. 5분마다 움직이는 경계선이.”
1소대장의 입가에 짧으나마 엷은 미소가 번졌다.
“예? 더 안 가고요?”
“여길 지킨다.”
1소대장이 뒤쫓아오는 페로 가디언들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헐떡거리며 뒤쫓아오던 페로 가디언들이 느닷없이 저항하는 그들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멈춰 칼을 겨누었다.
“지원군이 오고 있다. 우리에게 저항해 봤자 소용없으니 투항하는 게 좋아.”
페로 가디언들이 칼을 겨눈 채 여유만만하게 말했다. 그들의 말대로, 베흔을 비롯한 근위대 가디언들에게는 이젠 갈 곳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1소대장은 눈을 부릅뜬 채 상대가 아닌, 시계만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 페로 가디언들 역시 상대 가디언들의 등급이 만만치 않은 것을 잘 아는지라 함부로 덮치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이대로 지키고만 있는다면, 어쨌든 시간은 그들의 편이었다. 최소한 그들의 생각에는.
그 때, 1소대장이 다시금 눈동자를 움직여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05시 0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 지금까지 떠드는 거 잘 들었다. 그런데 이제 안녕이로군.”
“뭐?”
시계가 움직인 순간, 베흔과 40여 근위대 가디언들이 선 바닥, ‘분침 부분’이 왼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페로 가디언들이 그 틈새로 얼른 칼을 내질러 막아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복도는 중간에 걸린 칼을 그대로 동강내버리며 옆으로 돌아 그들의 시야에서 천천히 사라져갔다. 두 눈 멀쩡하게 뜬 채 코앞에서 적들을 놓친 페로 가디언들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잠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 이게.......이게 도대체 뭐냐.......”
카타콤베의 분침 부분에서 추적을 떨치고 감쪽같이 사라졌던 베흔, 그리고 근위대 가디언들이 다시금 모습을 나타낸 건 10여분 후, 에아 신전에서였다. 그들이 설마 이곳에 다시, 그것도 처음 난입했던 같은 길로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동맹군 병사들은 그곳에서 불에 탄 집기들을 청소하고 시체와 부상자들을 한참 수습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처음과는 달리, 두 번째로 난입한 그 40여명의 가디언들은 그곳에서 별다른 ‘전투’를 벌일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그들은 놀라 도망치는 사역병들과 몇 되지 않는 경비병들을 무시한 채 욱리하와 연결된 수로의 차가운 물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어슴푸레하게 새벽 여명이 비치는 욱리하 쪽으로 그대로 사라져갔다.
베흔이 도망친 직후, 101층의 통제실은 비오듯 쏟아지는 아나콘다 속에서 잠시 아수라장이 되어야 했다. 가디언들은 중요인물들 하나씩을 껴안고 필사적으로 살 길을 찾아야 했고, 정규군 병사들과 기간요원들은 예측할 수도 없이 꽂히는 아나콘다와 사방에서 날리는 파편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불을 꺼야만 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황궁을 무너뜨릴 듯 쏟아지던 아나콘다의 맹렬한 포격은 어느 순간, 마치 예정이라도 했던 듯 뚝 끊겼다.
“끝났나......”
이동의자에서도 튕겨나간 채 가디언 밑에 깔려 콜록거리고 있던 릴라크가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군데군데 아직 살아있는 불꽃이 타닥거리는 소리만 빼면 어색할 만큼의 침묵이 101층 통제실에 흘렀다. 하지만 검고 자욱한 연기가 아직 그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덕분에 통제실의 상황을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전투가 이어지고 있는 성벽이 있는 동쪽과 북쪽에서는 어느 쪽 부대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거센 함성소리가 웅웅거리며 황도 주변을 뒤흔들고 있었다.
“폐하! 폐하! 어디 계십니까!”
탈진한 릴라크가 가슴 위의 가디언을 밀어내며 쥐어짜듯 외쳤다. 아나콘다가 제일 맹렬하게 때린 곳이 바로 카렐이 있던 제일 안쪽 실장실 부근이었다. 곧이어 무언가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콜록거리는 재채기 소리가 들려왔다. 정상적인 사람 목소리 치고는 어색하게, 마치 목구멍에 쇳조각 한두 개쯤 걸린 것처럼 거칠게 들리는 것을 보아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뻔했다. 릴라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가디언들은 각자 보호하고 있는 사람들의 안전을 확인하고 보고해라! 빨리!”
동생 이라즈와 함께 있던 밀리타는 뿌연 흙먼지, 그리고 짙은 연기 속에서 어렵게 눈을 떴다.
“제기랄.”
반쯤 무너져 겹겹이 쌓인 내벽 밑에 깔려있던 그는 어깨의 살점을 찢고 지나간 내벽의 프레임 쇳조각을 억지로 밀어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가슴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라즈를 보며 잠시 이를 갈았다. 그다지 예뻐하지도 않는 이 녀석을 돌보는 척 해 주느라 자신이 이 꼴이 되었다고 내심 스스로를 원망했지만 기왕 시작한 연기를 중간에 그만둘 수도 없었다.
“누, 누나.......”
밀리타는 이 ‘동생’의 목소리가 유달리 힘이 없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이라즈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갔던 파편을 재빨리 더듬었지만 조금 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아, 윽......”
상처를 보려 밀리타가 몸을 움직이자 이라즈가 변변한 말소리도 내지 못한 채 몸을 가늘게 떨었다.
“제기랄.”
이라즈의 겨드랑이에서 흐르는 피를 발견하고 순간 움찔한 밀리타는 그의 상처를 얼른 짚었다. 밀리타의 어깨에 걸린 쇳조각의 끝이 이라즈의 오른쪽 겨드랑이 뒤를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괜찮아, 조금만 참아.”
밀리타가 이라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치명적인 위치였지만 다행히 쇳조각이 그대로 박혀 더 이상의 출혈을 막아주고 있었다.
“세닉 가가 호지 가를! 플라칼 가가 델루지 가를 공격해 쫓아내고 있습니다! 적군이 공성을 포기하고 전면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릴라크의 외침에 통제실 안은 순간 우렁찬 환호성에 휩싸였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서로 얼싸안았고, 어렵게 목숨을 부지한 문관이나 부상자들도 서로서로 손을 맞잡으며 감격을 나누었다. 하지만 무너진 벽에 깔려 움직일 수 없는 밀리타와 이라즈는 그 환호성과 감동에 동참할 수가 없었다.
“이제 전쟁에 이긴.......건가요.......”
이라즈가 개미만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어차피 상처로 보아 이 이상 큰 소리를 내지도 못할 테지만.
“아마도.”
밀리타가 조금은 냉담하게 대답했다. 이라즈가 조금이나마 편안해진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뒤로 꺾었다. 그도 의사인 이상, 자신의 상처가 아주 치명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이제 다른 의사나 구급요원들이 달려와 구해주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폐하, 폐하를 뵙고 싶어요.......”
“지금? 이 와중에?”
밀리타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입가를 씰룩거렸다. 무너진 벽에 깔린 그들에게는 바깥 상황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통제실 안은 환호성, 의료진을 찾는 부상자들의 비명과 고함, 그리고 어디론가 연락을 취하며 다급하게 명령을 내리고 보고를 받는 소음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지금은 정신없으실 거다. 조금만 기다려.”
“아니에요.......지금은.......절 보고 싶어하실.......거예요.”
이라즈가 피묻은 주먹을 꼭 움켜쥐며 고통어린 표정에 짧게 미소를 지었다.
“너도 참 철딱서니 없구나.”
밀리타가 이 철없는 남동생을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이라즈는 입가에 웃음을 지은 채 여전히 개미만한 소리로 누나에게 낮게 속삭였다.
“아세요? 승은을 받았다고요.......절 내명부에 받아주기로 하셨어요. 이젠.......”
누나의 표정이 대뜸 일그러지는 모습에 이라즈가 말을 뚝 멈추었다.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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