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87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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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악문 밀리타의 턱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 파랗게 곤두선 핏줄은 그의 주체할 수 없는 격노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누나.......”
지금껏 분신처럼 믿어왔던 이 누나의 심상치 않은 눈빛 변화에 이라즈도 순간 공포에 휩싸였다. 그는 말꼬리를 흐리며 본능적으로 몸을 꿈틀거려 누나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급소를 꿰뚫고 있는 쇳조각 때문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왜, 왜.......그래........”
“네가.......꼬리를 쳤냐?”
이성을 잃은 채 쏘아붙이는 밀리타의 귓속에는 승전에 기뻐하며 통제실을 울리는 환호성 따위는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꼬리라니.......아버지가.......”
“아버지?”
밀리타가 눈을 매섭게 부릅뜨며 놀라 떨고있는 이 동생에게 코끝이 닿을 듯 바싹 들이댔다.
“아스탈, 아니 람다 그 인간 말이냐.”
“무, 무슨.......”
‘아버지’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누나의 모습에 이라즈의 표정이 더더욱 공포로 물들어갔다. 그는 바깥에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혼란에 휩싸인 바깥의 그 누구도 폐허에 파묻힌 이들을 구하려 와 주지 않았다.
“누나, 누나, 내가 뭘.......”
“닥쳐, 누나는 빌어먹을.”
밀리타가 이라즈의 귀에 입술을 바싹 가져가며 마치 마녀처럼 속삭였다. 그의 손은 이라즈의 옆구리에 박혀있는 쇳조각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너하고 내가 공유하는 건 그레이오팔뿐이야. 그나마 네놈은 다른 놈 눈깔하고 바꿔치워서 이젠 남아있지도 않지.”
밀리타가 옆구리의 쇳조각을 쥔 것을 느끼며 이라즈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누군지 모를 다른 사람에게서 받았다는 그의 검정색 눈동자가 조금씩 커져갔다.
“아, 악......”
옆구리의 내장을 파고드는 파편을 느끼며, 이라즈가 몸을 거칠게 비틀었다.
“저승에 가거든 거기 있는 네 진짜 어미한테 인사나 해 다오.......모가지를 부러뜨려 쫓아냈어도 빼앗긴 내 운명은 여전히 잊지 못한다고.......그러니 내 운명을 이제 내 손으로라도 되찾겠다고.”
“끄, 윽.......”
이라즈가 손을 뻗어 밀리타의 손목을 움켜쥐려 했지만 죽어가는 그로서는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었다. 밀리타의 숨죽인 속삭임이 그의 귓가를 울렸지만 더 이상 들어오지도 않았다. 순간, 밀리타의 힘에 밀린 파편조각이 이라즈의 몸 속으로 푹 밀려들어갔다.
“악.......”
“넌 어차피 네 어미 오르마즈의 뱃속에 든 채로 전장에서 함께 죽을 팔자였어.”
내장이 찢기며 죽음과 마주한 이라즈의 거친 숨소리, 밀리타의 눈썹에 맺힌 눈물방울과 흐느낌이 지저분한 파편더미 밑에서 가늘게 교차했다.
“아, 으으윽.......”
이라즈가 마지막 저항처럼 다시 몸을 비틀었다.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죽어가던 그가 알아들은 건 ‘네 어미 오르마즈’라는 한 마디 뿐이었다.
“이라즈 경! 이라즈 경!”
파편더미 밖에서 울려온 거친 외침에 밀리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머리 위를 덮고 있던 무거운 문짝이 한쪽으로 확 치워지며 환한 빛이 이 둘의 얼굴을 비쳤다.
“이라즈 경?”
밀리타가 파편에서 손을 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파편은 이미 이라즈의 급소를 뚫고 그의 생명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라즈가 옆구리의 상처를 쥔 채 공중에, 아니, 멍해진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제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아, 아.......”
그는 카렐에게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 아름답고 선한 청년의 의식, 그리고 가는 생명이 의미 없이 떨리는 입술과 함께 조금씩 꺼져가고 있었다. 이라즈의 겨드랑이를 뚫은 쇳조각을 본 카렐의 표정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의사! 의사 어딨어! 이라즈 경을 빨리 후송하란 말이다!”
죽어가는 그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카렐이 이라즈의 피묻은 손을 움켜쥐며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새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은 밀리타가 카렐의 팔을 와락 껴안으며 울부짖었다.
“제발, 동생을 살려주세요! 폐하, 제발요!”
카렐은 팔을 안은 밀리타를 거칠게 밀어내고는 이라즈를 바닥에 붙들어놓고 있던 쇳조각을 두 손으로 그대로 꺾어내 버렸다. 그제야 바닥에서 풀려난 이라즈의 눈동자는 옆에서 짐짓 울먹이며 기가막힌 ‘연기’를 하고 있는 밀리타, 그리고 자신을 부둥켜안으며 거칠게 고개를 젓는 황제를 향해 번갈아 움직였다.
“아, 악.......”
이라즈는 황제의 팔을 짚으며 여전히 무어라 말을 이으려 했지만 그의 입술은, 조금씩 약해져가는 심장박동은 더 이상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의 눈썹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지금껏 별다른 의식조차 하지 않고 살아 온 자신의 복잡한 핏줄 따위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조금씩 기운이 빠져가는 머리를 황제의 가슴에 천천히 기댔다.
“이라즈 경?”
카렐이 이라즈의 뺨을 짚으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라즈는 황제의 남자로서 죽을 수 있었지만 자신이 계속 기억될 수 있을는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황제의 찢겨진 옷깃 사이로, 그는 자신이 황제의 몸에 남겨주었던 검은 용의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라즈는 자신을 향해 부릅뜨고 있는 그 무시무시한 눈동자에 입술을 가져갔다. 모든 것이 희미해져갔지만, 그는 일생의 유일한 여자, 아니 자신의 마지막 작품에 안겨 이렇게 죽을 수 있는 자신이 운 좋은 예술가였다고 여기기로 했다. 모든 것이 끝이었다.
“이라즈......”
카렐은 막 숨이 끊어진 이라즈를 팔에 안은 채 자리에서 부르르 떨었다. 가슴에 대고 있던 이라즈의 마른 입술이 조금씩 미끄러지며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카렐은 먼지와 피로 범벅이 된 이라즈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며 갈라진 입술을 터져라 깨물었다. 이라즈의 젖은 옷 위로 번지고 있는 물기가 그의 피 때문인지, 아니면 황제의 눈물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폐, 폐하?”
뒤늦게 달려온 의료진은 꿇어앉아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황제의 뒤에 선 채 당혹스런 표정으로 눈짓을 나눌 뿐이었다.
“폐하, 폐하!”
그때, 통제실에 막 뛰쳐든 니사가 움찔했다. 황제의 가슴에 안긴 채 축 늘어져 있는 이라즈를 멍하니 쳐다보던 그는 한쪽에서 의료진들의 응급처치를 받고 있던 밀리타를 힐끔 돌아보았다. 니사의 심상치 않은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밀리타는 짐짓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카렐이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는 얼굴에 묻은 이라즈의 피얼룩을 닦아내는 척 눈가의 눈물자국을 급히 닦아냈다. 비록 그가 몇 시간 전까지 같은 침대에 누워있었던 남자라 해도, 황제로서 아랫사람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귀인에 준해 대우해 주도록.”
“예?”
아직 승은 사실을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하지만 이곳에 와 있는 각 가문의 ‘손님들’은 명목상 ‘귀인 대우’ 였고, 그간 황제의 관심을 받아 온 그에게 사후 귀인 대우를 해 주는 정도는 그다지 이상하지 여기지 않는 분위기였다. 카렐이 그른 그들에게 쐐기를 박듯 한 마디를 던졌다.
“아니, 짐의 첫 번째 정식 귀인이니 내명부 명부에 정식으로 올리도록.”
카렐은 이라즈의 축 늘어진 몸을 들것 위에 눕혀주고 손수 담요를 덮어주는 정도의 선에서 자신의 감정을 모두 접어야 했다. 최소한 겉으로는.
“폐하, 전 이제 어떡해요, 동생이 없으면 전.......”
밀리타가 황제의 품에 몸을 던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남동생의 죽음에 오열하는 그에게 모두 딱하다는 표정과 함께 한 마디씩의 위로의 말을 던졌지만 떨떠름한 표정의 니사만은 예외였다.
“미안하네, 지켜주지 못해서.”
카렐은 이라즈의 가장 가까운 혈육인 그를 말없이 끌어당겨 꼭 안고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황제가 처음으로 밀리타에게 보인 다정한 몸짓이었다. 품에 안긴 밀리타의 얼굴에 어느새 분홍빛 홍조가 번지고 있었지만 카렐은 물론 알 수가 없었다.
“폐하, 슈로 기사단이 지금 하안에서 상륙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플라칼 가와 세닉 가 또한 세부명령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알았다.”
릴라크의 재촉에 카렐이 밀리타를 놓아주고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그는 황제였고, 이 자리에서 죽은 건 이라즈뿐만이 아니었다. 황제인 그가 고작 남자 한 명의 죽음에 슬퍼하며 지금의 축제분위기, 그리고 적들을 몰아붙여 숨통을 끊어야 하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을 엉망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결국 일을 저지르셨군요.”
황제가 통제실 밖으로 사라진 후, 치료를 하는 척 밀리타에게 다가선 니사가 눈을 매섭게 부릅떴다.
“파편에 맞은 걸 어쩌라고.”
밀리타는 자신의 상처를 지혈하는 니사의 손길에서 시선을 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정말로요? 제가 부검이라도 할까요? 파편이 한 번에 박힌 것인지, 두 번째 외력이 다시 가해진 것인지 밝혀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어느새 눈가가 축축해진 니사가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쏘아붙였다. 격분을 애써 감추고 있는 그의 눈꼬리에 맺힌 축축한 눈물은 짐짓 슬퍼하는 척만 했던 밀리타의 거짓된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밀리타가 여전히 눈물이 맺힌 눈을 살짝 흘겼다.
“승은을 내린 남자의 시체에 다시 칼을 대는 걸 황상께서 허락하실 것 같나. 생각보다 바보로군. 아악!”
니사가 상처를 꽉 조이자 깜짝 놀란 밀리타가 순간 비명을 질렀다. 니사는 피가 배어날 정도로 꼭 묶은 붕대의 매듭을 쥔 채 쏘아붙였다.
“표현은 정확히 하시죠. 승은을 내린 것이 아니고.......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원했던 ‘사랑’ 말입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으시겠지만.”
“오호, ‘우리’라고 했나? 그 말을 들으니 정말로 안도가 되는군.”
밀리타가 붕대를 짚은 니사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이를 드러냈다.
“어쨌든, 방법은 다르지만 그대와 난 ‘우리’일 수밖에 없으니.”
밀리타가 니사를 거칠게 밀어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내 운명을 되찾을게야. 이젠 내 힘으로.”
“그래 봤자 람다와 놀아난 당신의 원죄는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텐데요.”
니사의 독설을 무시하며 옷을 툭툭 털어낸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꿇어앉아 있는 니사의 귀에 대고 쏘아붙였다.
“하긴, 오르마즈 그놈한테 엉뚱한 살덩어리를 준 게 그대였지? 안됐군, 그대의 노력이 모조리 허사가 되어버려서.”
“‘모조리’라고요? 당신이 그렇게 원하는 그분을 지금까지 지킨 게 누구였죠?”
니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애써 태연한 척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 애썼다. 하지만 사람들의 위로를 받으며 멀어져가는 밀리타의 발소리를 느끼며, 그도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니사는 엷은 미소를 띤 채 누워 있는 이 아름다운 청년의 얼굴을 조심조심 더듬었다.
“부모님을 그대로 닮았군요.......제타.”
이라즈의 차가워진 뺨을 짚은 채, 니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에게 전해주려 했던 친부모 이야기, 그동안 가족 행세를 해 온 저 둘의 정체에 관한 모든 것들을 이젠 뒤늦은 아쉬움의 눈물과 함께 목구멍 뒤로 삼켜버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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