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588화 (587/1,132)

< -- 588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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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흔 그놈과는 연락 안 돼?”

의료차량에 오른 제롬은 ‘전군 퇴각 결정에 대한 동의’를 구하러 온 샤자한 공을 옆에 둔 채 부관에게 버럭 화를 냈다.

“아직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황궁에서 변을 당하신 것이 아니신지......”

부관이 더듬더듬 대답하며 이 거친 상관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까지 몇 번의 패전도 있었지만 지난번 황궁을 내주었을 때를 제외하면 압도적인 병력 덕분에 최소한 ‘후퇴’만은 단 한 번도 해 본 일이 없었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이번 사건은 충격이었다. 그의 군대가 큰 패전을 한 것도 아니었고, 전략상의 실패 때문도 아닌, 2개 가문의 느닷없는 배신 덕분에 이 꼴이 된 것이었다. 북쪽에서는 세닉 가 보병대가 호지 가를 향해 칼끝을 돌렸고, 플라칼 가는 남진해서 델루지 가의 옆구리를 향해 전진해오고 있었다.

“씨발......”

제롬이 이를 뿌드득 갈며 유일하게 성한 오른손에 힘을 꽉 주었다. 병상에 있다보니 전군을 제대로 지휘할 수도 없었고, 이번 작전이 샤자한 공의 지휘 하에 이루어진다는 것도 그의 자존심을 긁어놓았다. 퇴각 결정에 대한 동의---사실상 일방통고에 가까웠지만---를 구하러 샤자한 공에게 그는 ‘자기가 있었다면 퇴각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신경질을 냈지만 사실 그 역시도 퇴각을 피할 수는 없음을 이미 깨닫고는 있었다.

“근위대장하고 계속 연락 좀 해 봐.”

제롬이 다시금 버럭 화를 냈다. 그가 베흔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 결코 아니었지만 급하거나 막막한 때 항상 나타나 그의 구세주 역할을 해 준 건 이미 죽은 아버지 테번이 아닌 그였다. 그리고 이 급박한 순간 그의 머릿속을 맴도는 얼굴도 테번이 아닌, 베흔이었다. 그와의 연락이 끊겼다는 보고를 들은 순간, 제롬은 마치 땅 속으로 꺼져버리는 듯 모든 것이 막막해진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설마 탄현성까지 꽁지 빠지게 퇴각하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거기까지 가는 데 꼬박 하루가 넘게 걸리는데 가다가 다 뒈지라고요?”

“물론 아닙니다.”

샤자한 공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일단 퇴각하면 적들이 대규모 추격을 할 테니 샤마시 평원에서 전열을 정비해 대규모 회전으로 맞서야지요”

“여기 있는 보급품이나 장비들은 어쩌고요!”

“가능한 만큼만 가져가고.......나머지는 불태워야겠지요.”

샤자한 공이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제롬이 결국 버럭 역정을 내고 말았다.

“그러면, 회전에서 패한다면 끝장 아닙니까! 보급품도 없고......”

“물론입니다.”

샤자한 공의 대답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오자, 제롬은 순간 할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럴 바에는 몇 부대를 떼어서 놈들한테 던져주고.......”

제롬이 일단 교과서적인 다른 안을 내놓았지만 샤자한 공은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적들을 겁내시는지요? 플라칼 가가 이반할 수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시나리오고, 세닉 가의 병력은 많지 않고, 원래부터 소극적이라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따져보면 우리 군대는 아직 건재합니다.”

“그러면서 퇴각하자는 말은 왜 먼저 꺼내셨는데요?”

제롬이 잔뜩 심통이 어린 말투로 냉큼 되물었다. 샤자한 공이 쓴웃음을 지으며 이 젊은 최고제후를 달랬다.

“어쨌든 지금 여기가 싸우기 어려워진 건 사실이니까요. 사방이 모두 적군이 되어버렸으니.......지난번 근위대장 말마따나 탄현성으로 돌아가 일단 전열을 정비하고, 비엔에서 훈련 중인 보충병력 준비가 끝나고 도착하는 1달 정도는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나는 건.......”

“적들이 우릴 잡겠다고 회전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예?”

“배신자들을 떨어내고 봐도 지금 우리 병력은 보병만 13만이 넘고, 기병들의 숫자도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막강한 우리 동부기병대가 있고, 근위대가 있습니다.”

“그래서요!”

제롬이 씩씩대며 되물었다.

“놈들은 황도 수비군에서 많아야 2만쯤 동원할 수 있을 테고, 플라칼 가와 세닉 가 병력까지 모두 모아도 보병은 10만이 채 안됩니다. 기병은 우리보다 물론 훨씬 적고요. 게다가 몇 시간 전까지 칼을 겨눈 적이었던 군대와 별다른 합동훈련이나 사전 계획조차 없이 대오를 이루고 대규모 회전에 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제롬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샤자한 공은 ‘너무 잡다한 구성’이라는, 지금 동맹군의 약점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었다. 샤자한 공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저들은 일단 동맹군 편을 들었지만 통일된 통신체계도, 명령체계도 아직 없습니다. 저라면 저런 부대를 이끌고 회전에 절대 못 나갑니다. 부대별로, 가문별로 나뉘어 잡다하게 우리를 쫓는 정도는 가능하겠지만요.”

“그래서요?”

그새 조금 안정된 제롬이 목소리를 한 톤 낮추며 물었다.

“카렐 놈이 맞서 주기만 한다면 최소한 회전에서 우리의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고, 머리를 좀 써서 회전을 피한다면 최소한 안전하게 퇴각할 시간이라도 벌 수 있겠죠. 둘 중 어느 쪽이든, 우리는 언제든 회전을 벌일 태세로 최대한 가시를 세우고 공격적인 자세로 물러나는 게 무조건 빨리 물러나는 것보다 낫습니다.”

“어쨌든 퇴각하려면 누군가 남아서 시간을 벌어줘야 하는데.......”

제롬이 불만어린 표정으로 지도를 살폈다. 함께 지도를 살피던 그 둘의 시선은 결국 한 곳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아비 없는 자식을 누가 지켜주겠소.”

샤자한 공이 앞니를 살짝 드러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근위대장과는 연락도 안 되고 있으니 우리 책임은 아니죠.”

제롬이 지도를 접으며 고개를 저었다.

“꼴에 근위대라고 자존심은 있으니 항복 따위는 하지 않을 테니.”

개전 이래 처음으로 ‘죽이 맞은’ 둘은 의료차량의 창 너머, 관산수변에 있는 근위대 1군단을 쳐다보았다. 원래 1만 5천이었던 그들은 지난 첫 번째 공성전에서 2천 정도를 잃었고, 드루그와 함께 포구 공략에 나섰다가 실패한 선발대 1천이 또 떨어져 나가면서 지금 1만2천 정도가 남아있었다.

그들 중 8천 정도의 본대가 드루그의 성공시에 포구로 상륙하기 위해 강변에서 준비하고 있었지만 수비탑에서의 분전으로 드루그의 선발대가 포구 점령에 실패하면서, 그들은 상륙할 곳도 잃고 오도가도 못한 채 강변에서 전황만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저 정도 전력이면 적들도 두려워서 함부로 우회하지 못하겠죠.”

할 말을 마친 샤자한 공이 지도를 잡으며 의료차량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가 무언가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아참.”

“이번 전투에서 적들 역시 잃은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얻은 것이고.”

“예?”

샤자한 공의 생각지도 않은 말에 제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샤자한 공은 의료차량 벽에 붙은 황제령 지도의 남반구를 가리켰다.

“타르서스가 계속 저들의 편에 있을 수 있을까요? 적들의 후방 보급기지였던 그곳이?”

제롬의 얼굴에 그제야 희색이 감돌았다. 아케메니아 포구에서 대규모 폭동을 일으킨 타르서스 직할군들은 이제 동맹군 편이라 부르기도 애매해진 상황이었다. 타르서스인들의 묘한 집단의식을 생각해본다면, 그들이 계속 카렐에게 충성을 바칠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본가에 연락을 보내서 그곳 토호들과 접촉하도록 명령을 내리지요. 아참.”

제롬이 창밖을 다시금 내다보며 이를 갈았다.

“플라칼 가는 물론이고.......세닉 가도 절대 용서 못하겠군요.”

“물론.”

샤자한 공이 냉큼 대답했다.

“근위기병대장 루이제 대군은 당장 잡아들이라고 이미 명령을 내려 줬습니다. 대공주와 그 일가를 당장 비엔으로 압송하라고 했고요.”

“잘 하셨습니다. 돌아가는대로 본때를 보여줘야죠."

냉큼 대답했던 샤자한 공이 다시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플라칼 가에 보냈던 사절단은 배신 사실을 먼저 눈치 채고 조금 전 복귀했습니다. 다행히 물자와 의무대도 모두 무사합니다. 페이 무슨 중랑장이라던가.......의무대 부단장이 눈치빠르게 대응했답니다. 가뜩이나 물자와 의료인력이 부족해질 차에 일단 한숨 돌렸지요.”

“무슨 일 있어? 카렐?”

황성의 동문으로 급히 달려온 카렐을 맞아준 페로의 첫 마디는 평소와 그다지 다를 것 없는 이런 무뚝뚝한 물음이었다. 그리고 카렐 역시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짙은 노란빛 스코프로 퉁퉁 부은 눈과 굳어진 표정을 가려버렸다.

“별 것 아냐. 매운 연기를 오래 쐬서 이 꼴이 됐나봐.”

“베흔 그놈은?”

“질긴 놈이야.”

카렐이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너라도 무사하니 됐어. 근데 이건 뭐야? 또 다친 거야?”

언제 눈치챘는지, 페로가 카렐의 왼손 굳은 손가락을 덥석 움켜쥐며 대번 얼굴을 찡그렸다. 에아 신전에서 베흔에게 밟혀 뼈가 어긋나버린 곳이었다. 어긋난 관절을 재빨리 맞추기는 했지만 인대가 손상되었는지 왼손이 굳어서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아야. 살살 좀 해.”

페로가 조심성없이 손을 확 뒤집자 카렐이 움찔하며 손을 뽑았다. 카렐은 ‘이라즈였다면 함께 아파하면서 따뜻하게 매만져줬겠지’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문득 발견했다.

“하여간, 맨날 다쳐서 오기나 하고. 내 이럴 줄 알았지.”

페로는 카렐의 상처에서 그대로 관심을 끊으며 말에 훌쩍 올라탔다. 여전히 무관심하던 그는 한 손으로 말고삐를, 나머지 한 손으로 상처를 쥔 채 갑자기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는 카렐의 모습에 다시 짜증을 냈다.

“뭐 해? 밖에서 슈로 기사단이 기다려.”

“그래.......나가야지.”

카렐이 아픈 손으로 안장을 쥐고 느릿느릿 말에 올라탔다. 지난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시알피 대신, 아메스가 타던 건장한 백마에 오른 그는 반쯤 열려있는 황성 동문을 문득 올려보았다. 황성의 주문(主門)인 만큼 그 높이만도 웬만한 10층 건물 높이에 육박하는 80척(24m)이 넘었고, 황도의 동서방향 대로가 관통하는 양쪽의 폭은 200척에 달했다. 카렐이 말을 몰아 동문에 다가서며 중얼거렸다.

“꼴 한 번.......”

이미 반쯤 열린 성문에는 델루지 가 보병대가 공격을 하면서 남긴 발리스타의 무수한 흠집, 불타고 남은 그을음, 심지어 찌그러진 흔적으로 온통 만신창이였다.

“성문을 완전히 열어라! 이제 되갚아줄 시각이다!”

카렐이 성루에 대고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전사 황제를 선두로, 지금껏 성벽을 지켜 온 아메샤 스펜타와 북부보병대 5천, 3천의 슬레이프니르, 그리고 5백여의 페로가디언들이 대로를 따라 위풍당당하게 성문을 나섰다.

동맹군의 그 어느 깃발보다도 거대한 황제기 ‘다라프시 카비아니’가 이 행렬에 누가 있는지를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당당히 알리며 황도 성문 밖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라즈의 죽음도, 포구에서 전사한 유시프 장군, 오난 중랑장도, 중상을 입은 솔에 대한 걱정도,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황궁도, 최소한 지금만은 그의 머릿속에서 모두 지워야 했다. 어쨌든, 그는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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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7월이 시작되는대로 개인지 2부 1,2권에 대한 예약을 개시하겠습니다. ^^

세부사항은 그때 공개할 예정입니다만 일단 각권 460~480페이지 내외, 연재본 기준 파트3까지 들어갈 예정입니다. 가격도 이전에서 크게 변화는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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