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592화 (591/1,132)

< -- 592 회: 파트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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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를 마무리한 오전까지도, 황성에서 군데군데 솟고 있는 검은 연기는 멀리 욱리하 건너편 강둑에서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동맹군 경기병들과 경보병들이 도끼눈을 뜨고 경계의 시선을 사방으로 보내고 있었다.

새벽에 서둘러 강을 건너 온 이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2가지였다. 욱리하 서쪽 강안을 타고 보급로를 형성하고 있던 연합군 소부대들을 색출해 섬멸하고 초소들을 모조리 철거하는 것이 첫 번째였다.

그리고 조금 전 추가된 또 한 가지 임무는 ‘강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근위대 가디언들을 반드시 잡아내라’는, 황제에게서 직접 내려온 엄명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명령을 내린 황제도 이 정규군들이 근위대의 상등급 가디언들을 정말로 잡아낼 수 있을는지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걱정은 아직 꾸물꾸물하니 흐린 오전, 혼탁한 강물과 수초 속에서 살며시 머리를 내미는 가디언들의 존재에서 다시금 확인되었다.

“견디실 수 있습니까?”

“아직은.”

1소대장의 물음에 베흔이 힘겨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압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알아.”

베흔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1소대장은 서쪽 강안, 습지에 자란 키 큰 갈대를 조심스레 헤치고 물 위로 기어나갔다.

“여기가 맞겠죠?”

“아마도.”

물 위로 당겨 올려진 베흔이 끄응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나머지 35여명의 가디언들도 그를 따라 조심스레 마른 갈대밭 사이로 파고들었다.

“퇴각하는 우리 편 부대가 아직 남아있다는 게 기적이군.”

베흔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흐릿한 하늘을 올려보았다.

“남부 보병대는 이미 거의 퇴각했고 후미를 지키고 마지막으로 퇴각하던 근위기병대를 급히 되돌려 보낸 거라고 합니다. 시간으로 봐서 곧 도착할 겁니다. 그나마 다행이지요.”

“그래......”

베흔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내심 치욕스럽고 절망스러웠지만, 자신이 살아있다는 연락에 그리도 기뻐하던 제롬의 모습을 보며 ‘저놈도 혹시 피가 당기는 걸 느끼는 걸까’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던 그였다.

어쨌든 카타콤베를 빠져나와 물에 뛰어들었던 그와 가디언들은 거친 풍랑이 몰아치는 강물과 필사의 사투를 벌여가며 보통의 시민들이라면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거리를 새벽 내내 헤엄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정신없는 카타콤베, 그리고 거친 풍랑과 싸우는 동안 1군단이 카렐의 손에 넘어갔고, 연합군은 탄현성까지 패주해야 했다. 그래도 어쨌든 그는 살아서 연합군이 장악하고 있던 욱리하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롬의 1군이 북진하며 어렵게 개척한 욱리하변의 이 보급로도 동맹군의 역습으로 적의 손에 내주고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주둔했던 연합군 후방부대 역시 본대의 퇴각과 함께 물러나고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참모장 카산드라 호지 경이 남쪽 500스타디아(75km) 지점에서 1차 저지선을 형성했다고 합니다. 일단 거기까지만 가면.......”

베흔은 고개를 젖힌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내 말 명심해라’며 쩌렁쩌렁 공기를 울리던 카렐의 마지막 외침이 마치 악몽처럼 아직 맴돌고 있었다.

“수고들 많았다.”

베흔이 한참만에 입을 열었지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눈동자를 움직여 1소대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처구니없이 죽은 드루그, 능력에 비해 운이 너무도 따라주지 않았던 타크마에 비해 이번 전투에서 정말 큰 공훈을 세운 것이 바로 이 1소대장이었다.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어딘지 낯이 익었어. 이름이 뭐냐.”

베흔의 물음에 1소대장이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가 어렵게 입을 연 순간, 베흔은 그가 머뭇거린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힐러라고 합니다. 2등급입니다.”

“뭐?”

1소대장의 정체를 확인한 베흔은 칭찬 대신,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휴우......”

그의 입 속에서 ‘병신같은 드루그 새끼’라는 말이 빙빙 맴돌았지만 최소한 결과는 나쁘지 않았으니 방정맞은 입놀림만은 일단 참기로 했다. 이번 공격조의 가디언을 차출하고 구성한 것이 1군단장 대리였던 드루그였다. 물론 지금은 저승에 있겠지만.

“남부 파견군 부사령관으로 있다가.......”

1소대장이 더듬더듬 말했다. 이번 작전이 워낙 소수의 상등급 가디언들만으로 구성된 덕분에 ‘소대장’을 맡기는 했지만, 2등급이라면 야전부대에서는 연대장급인 중랑장에 해당하는 고위 무장이었다.

“알아.”

퉁명스럽게 대답했던 베흔은 잠시 후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결과야 어쨌든.......네 능력을 보였으니 만족스럽다. 수고했다, 힐러. 곧 좋은 보직을 주마.”

베흔의 마지못한 위로에 1소대장 힐러 역시 어색한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그 역시 베흔의 자신에 대한 평가가 ‘정말 쓸 만한 놈’에서 ‘카렐과 만났다면 제일 먼저 백기 들었을 놈’으로 순식간에 뒤바뀐 건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리고 베흔의 마지막 말이 그저 그런 립서비스일 것이라는 사실도.

카렐의 남부파견군 사령관 시절, 그는 보안국장에서 좌천당해 온 그 거친 사령관의 부관이었고, 그가 중상을 입고 황제령으로 돌아갈 때까지 중앙의 프락치 역할을 거부한 채 나름대로 충성을 바쳤던 가디언이었다.

그가 남부파견군 부사령관이라는, 나름대로 알짜배기 자리에서 느닷없이 중앙으로 ‘대기발령’을 받았던 것도 그때의 전력을 내심 걱정한 베흔의 지시 때문이었다.

물론 베흔은 자신의 명령으로 보직 없는 가디언이 되어버린 그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했지만.

“후우.”

1소대장, 힐러는 이마를 어루만졌다. 신전에서 천장을 무너뜨리느라 찢어진 상처가 별 이유도 없어 더 아파왔다.

“서쪽에서 기병입니다.”

부하 가디언의 낮은 목소리에 힐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갈대밭에 숨은 가디언들의 걱정에 찬 눈빛이 일제히 서쪽으로 움직였다. 지금 오고 있는 기병들이 연합군의 남부기병인지, 동맹군 기병들인지에 따라 이들의 목숨이 좌지우지될 터였다.

“도끼 문장입니다.”

제일 앞에 있던 가디언의 속삭임에 일행이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갈대밭 주변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200여기의 중장기병들은 가슴에 도끼 문장을 단 남부 3제후 호지 가의 근위기병들이었다.

“이제 돌아가서 다들 쉬어라. 힘든 밤이었구나.”

부하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베흔이 살아남은 가디언들에게 포옹을 청했다. 하지만 그가 무심결에 제일 먼저 팔을 뻗은 건 이번의 최고 공로자이고 선임자인 1소대장 힐러가 아닌, 2소대장이었다. 2소대장이 움찔하는 모습에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린 베흔이 힐러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잘 견뎌주셨습니다. 대장.”

베흔과 마지못해 포옹을 한 1소대장 힐러는 강변에서 기다리는 호지 가 기병들에게 손을 흔들며 육지 쪽으로 향했다. 무언가 모를 씁쓸함을 말없이 곱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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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 가 사람들이 그 강인했던 조상들만큼 똑똑한 인물을 못 내고 있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의아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사실 지금의 리쿠 가는 그들이 ‘세습 지도가문’로 지명받았을 때와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한마디로 참담한 지경이었다.

에르네스토의 자손과 형제들 중 교단의 손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은 무식한 게릴라 전사이거나 고작해야 소시민에나 어울릴 인물들뿐이었고, 지도가문 구성원으로서의 자부심과 품격 따위는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오랜 게릴라 생활, 혹은 도피생활을 거치고 새 세상을 맞이했지만 그들에게는 ‘황가 구성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감투를 미리 준비할 시간도, 그런 품격을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보니 그들 중 상당수는 얼떨결에 맞이한 새 인생에 적응하지 못하고 범죄자가 되거나, 황족이라는 간판만 믿고 날뛰는 오만한 졸부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부모를 보고 자라는 리쿠 가의 새 세대 역시 ‘황족’이라는, 이름만 그럴싸한 지위가 민망해질 정도의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본다면 새 황제 마시야스 리쿠는 속만 썩이는 그 친척들에 비해 그럭저럭 나은 편이었다. 자식 교육에 유달리 극성스러웠던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제국의 지도자로서는 조금 소심한 것이 흠이었지만 학식도 평균 이상이었고, 꼼꼼한 성격에 눈치도 빨랐다. 그리고 어린 나이부터 공무원으로 실무를 익혀서인지 행정 실무에도 제법 밝은 편이었다.

비록 대신들이 ‘만년 중간간부로나 앉아있었으면 딱 어울릴 사람’이라고 비아냥거리기는 했지만 사실 그는 사치스럽지도, 특별히 잔혹하거나 여색에 탐닉하지도 않았고, 분위기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만 늘어대는 답답한 멍청이도 아니었다. 그리고 가끔씩은 쓸모 있는 의견을 내서 그를 무시하는 대신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어머니를 대신해 믿음직한 조언자가 되어 줄 똑똑한 조강지처 테나스 이그나토가 곁에 있었다. 일리안의 명문가 장녀인 그는 게릴라 캠프에서 태어나 힘겹게 자란 남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학력, 결단력과 적당한 잔혹함, 야심까지도 갖춘 여자였고, 나이 또한 남편보다 70살 가까이나 많았다.

사실 테나스에게는 자신의 교양과 지식, 경륜도 무기였지만 3명이나 되는 아들 오렌, 에지드, 후사인 역시 든든한 무기였다. 그는 약간은 오만한 데다가 ‘교양 없는’ 시댁 친척들을 무시하기가 일쑤여서 종종 욕을 먹기도 했지만 최소한 자신의 자식들만은 어떻게 해야 한 나라의 태자답게 키울 수 있을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마시야스의 세 아들이 다른 친척들, 심지어 이젠 황제가 된 아버지의 어린 시절보다 훨씬 의젓하고 똑똑한 ‘태자다운 태자’로 자랄 수 있던 것도 그런 어머니 덕분이었다. 그리고 다른 첩들 역시 이런 극성스런 조강지처에게 지지 않으려 자식 교육에 필사적이었던 것까지 따진다면 마시야스 황제의 2세에 와서 리쿠 가가 비로소 ‘황족다워 진 것’은 틀림없는 테나스의 공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황후 테나스는 새로운 제국의 첫 번째 국모로서 크게 흠잡을 곳 없는 적당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최소한 가족의 틀 내에서는 그렇게 승승장구하고 있던 테나스 황후다보니 같은 시각, 남극 한구석에서 조용히 자라나고 있는 또 한 명의 황족 소녀---모두가 남편의 서녀로 알고 있는---에 관해서는 별다른 관심도 두지 않았다.

최소한 지금, 즉위 후 12년밖에 지나지 않은 기원 62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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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파트 7의 시작입니다.>

조아라 서버 문제에 개인적인 문제가 겹쳐서 연재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

아직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지만 가능한한 많이 늦어지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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