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593화 (592/1,132)

< -- 593 회: 파트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

.

.

“세상에!”

테이블을 치우고 있던 유레트는 열린 문 너머에서 나타난 익숙한 모습에 얼른 앞치마를 내던지고 달려왔다. 문 앞에 서 있던 오르마즈는 자신을 올려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유레트에게 피식 웃음만을 지었을 뿐이었다.

“코윈에서 안 좋은 일 당하셨다고.......세상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유레트는 입을 가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앞에 마치 든든한 기둥처럼 서 있는 오르마즈였지만 온통 찢긴 얼굴과 안대를 댄 한쪽 눈만으로도 그만을 기다리던 이 여자의 가슴에 그보다 더 많은 상처를 남기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부러져 프레임을 댄 왼팔, 그리고 옷으로 가려진 몸 안에는 그보다 더 큰 끔찍한 흔적들이 남아있을 터였다.

“세네피스가 와서 뭐라고 했군요.”

오르마즈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당신 때문이라고 억지를 부리던가요?”

“친언니가 그 지경을 당했으니 뭐 그럴 수도 있죠. 괜찮아요, 오르마즈님.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유레트는 코 옆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급히 옷소매로 훔쳐내고는 굳어진 얼굴에 애써 미소를 지었다.

“녀석, 나한테는 아무 소리도 안 하더니.......”

오르마즈는 별것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유레트는 코윈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오르마즈를 제일 안쪽의 큰 안락의자로 이끌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가 항상 앉아있곤 하던 낡은 원탁과 안락의자는 ‘예약석’이라는 팻말이 붙은 채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심지어 그가 피던 물담배까지도 예전 그대로였다.

“유평이 좋아하는 호두쿠키를 좀 사왔죠. 수에니에 과자 정말 맛있게 하는 집이 있거든요.”

유레트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의자에 앉은 오르마즈는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큰 보따리를 불쑥 내밀며 딴청을 피웠다.

“세상에, 이 상처가.......친 할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떻게.......”

유레트는 오르마즈의 눈치를 보며 잠시 머뭇거렸지만 오르마즈는 그에게 뭐라고 나무라지는 않았다.

“어차피 아버지 가족들은 자손으로 취급하지 않던 분이니까요. 정말 괜찮다니까요.”

오르마즈는 애꾸가 되어버린 그의 한쪽 눈을 더듬는 유레트의 손을 장난스럽게 쳐냈다.

“맞으신 거예요?”

“.......몽둥이에 맞아서 왼쪽 안구가 터졌죠. 몇 달 후면 다시 괜찮아질 겁니다.”

“이게 웃을 일인가요? 할아버지라는 사람이 친손녀를 고문했다고요! 그것도 황제의 칙서를 가져간 황실 내무대신을요!”

“아케메니아의 황제가 어디 황제입니까. 술이나 좀 주시죠. 아픈 거나 좀 잊게.......”

“안돼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유레트는 급히 가게문을 닫고는 주방 할멈에게 ‘특별한 저녁 식사’를 마련하라며 이것저것 잔소리를 하고는 다시 돌아왔다.

“일단 이거라도 드세요. 저녁은 곧 가져올게요. 방은 청소해 두었으니까 하룻밤 편하게 주무시고 가세요.”

걱정스런 얼굴로 따뜻한 코코아를 내미는 유레트에게 오르마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레트 역시 자신 앞에서 ‘공적인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 그의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

카파키 가가 테번의 선례를 따라 조만간 독립 세력을 구축하리라는 건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실제로 오르마즈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코윈의 재벌 빌루이 카파키는 연초부터 나에스탄, 바하칼리와 하임달, 센지의 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물밑교섭을 본격적으로 벌이고 있었다.

테번, 바니샤드의 독립국 선언을 막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겁던 황제에게 그 첩보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허울 좋은 황제의 이름을 파는 것 외에는 그의 이런 행동을 막을 수단이 딱히 있던 것도 아니었다. 민병대의 전사들, 장교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황실 근위대’는 계속 줄어들기만 했고, 황실에는 새로운 인원을 받아들여 근위대를 보강할 돈 따위는 없었다.

당초 오르마즈는 바니샤드와 테번 사이에 분쟁거리를 만들어 일단 주의를 돌리자며 꽤 현실적인 제안을 했지만 우유부단한 황제는 그의 제안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테번, 바니샤드와 ‘독립선언 유보’와 ‘세금 감면’을 주고받는 얼토당토않은 막후 거래를 했고, 그 사실을 전해들은 카파키 가가 반발한 것도 당연했다.

그간 황실에 가장 많은 세금을 바쳐 왔던 사업가 빌루이는 자신에게도 공평한 감세 혜택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이미 재정이 바닥난 것을 빤히 아는 황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리고는 ‘네 할아버지니 네가 나서서 좀 해결해라’며 중간에 끼어버린 오르마즈만 옥죄고 있던 판이었다.

그렇게 황실에 대한 불만을 계속 쌓아 온 빌루이는 결국 별다른 내용도 없는 칙서를 들고 떠밀리듯 찾아온 손녀이며 황실 내무장관 오르마즈 앞에서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그의 격노는 전범이라는 명목으로 손녀를 체포해 감옥에 쳐넣은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오르마즈에게 거의 고문에 가까운 지독한 폭행을 가한 후 재판정에까지 끌어내 겁 많은 황제에게 그 모습을 보란 듯 공개하는 초강수까지 놓았다.

실제로 코윈의 법정은 그에게 성전 당시 민병대가 저지른 몇 건의 민간인 살해를 이유로 당시 사령관이었던 그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한쪽 안구가 산산조각나고 팔뼈와 갈비뼈가 부서진 채 처참한 몰골로 코윈의 법정에 전범으로 끌려나온 그의 모습은 성전 세력의 몰락을 그대로 보여주는 치욕스런 사건이었다.

그렇게 사형수 신분이 된 채 쿠트라스에 갇혀 집행일만 기다리던 오르마즈는 어느 날인가 감옥에서 감쪽같이 사라졌고, 며칠 후, 아케메니아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황제와 빌루이가 모종의 거래를 한 것이 아니냐며 넘겨짚었지만 정작 오르마즈는 그곳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서는 단 한 번도 입을 연 일이 없었다.

“오르마즈 왔어요?”

누군가 계단을 쿵쾅거리며 뛰어내려오는 소리에 오르마즈와 유레트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13살, 아니 곧 14살이 될 아이 치고는 좀 작아 보이는 한 소녀가 2층의 살림집에서 고개를 불쑥 내밀고 있었다.

“이분 이름 막 부르지 말라지 않았니.”

“쳇.”

엄마의 잔소리에 소녀가 대번 입을 삐죽거렸다.

막 청소년기에 접어든 반항기여서인지, 원래 인상이 그런 것인지, 소녀의 입가에는 묘한 심술 혹은 고집이 잔뜩 어려 있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유평의 얼굴에는 그 아버지 샤미르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은 우습게도 그의 외모는 도리어 숙부인 마시야스 황제와 꽤 흡사했다. 그렇다보니 유평을 처음 본 사람들도 그가 옹주라는 말에 매번 ‘그럴 줄 알았어’라는 반응을 보이곤 했다.

“이름 막 부르기는 오르마즈.......아니, 카파키 내무대신도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난 어쨌든 이 나라 옹주라고요.”

“하여간 저 어린 게 벌써부터 말대꾸 하는 거 하고는.......”

유레트는 골치가 아픈지 이마를 싸쥐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르마즈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 콧대 높은 소녀에게 말을 건넸다.

“법도에 따라 16세가 되시기 전까지는 옹주라 해도 따로 존대받지는 않으십니다.”

“어차피 2년밖에 안 남았는데 뭘. 어, 근데 얼굴이 왜 이래요? 팔도.......”

“사고를 당했습니다. 별것 아니니 곧 낫겠죠.”

“정말.......도대체 조용히 사는 날이 없다니까요.”

어린 유평은 한참 감수성 예민한 나이의 소녀답지 않게 이런 몰골의 오르마즈에게도 별다른 걱정의 말이나 위로조차 해 주지 않았다. 자신의 상처에서 냉담하게 관심을 끊는 그의 모습에 오르마즈도 잠시나마 드는 섭섭함이 없지 않았지만 크게 미련을 두지는 않았다.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의 성격 탓일 뿐, 정말로 관심 없는 것은 아님을 그도 잘 알고 있기에.

“어? 이게 뭐에요?”

유평은 오르마즈가 앞에 내려놓은 보자기를 마치 자기 것인 양 풀어서는 안에 들은 쿠키를 오독거리며 씹어먹기 시작했다.

이 소녀가 평소에는 이렇게 버릇없는 모습을 보이는 왈가닥이기는 했지만, 드물게 가는 황실 행사에서 그가 법도에 어긋나는 막되어먹은 행동을 보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배다른 형제자매들 사이에서도 유달리 과묵했고, 진지한 대화든 가벼운 대화든 항상 듣기만 할 뿐 자신의 의사를 대놓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누가 의도적으로 ‘시사적인 문제’에 관해 물어도 ‘전 어려서 그런 거 몰라요.’라며 어린애같은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우움, 맛있네.”

과자를 먹는 중간중간 오르마즈에게 눈웃음을 짓던 유평은 갑자기 어린애처럼 그의 무릎 위에 앉으며 가슴에 무작정 기대앉았다. 부러진 갈비뼈가 눌리면서 오르마즈가 움찔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깜짝 놀라 딸을 끌어내려는 유레트에게 오르마즈가 괜찮다며 손짓을 보냈다. 오르마즈와, 그 품에 다정하게 안긴 딸을 번갈아 쳐다보던 유레트는 조금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옆 의자에 말없이 자리잡았다.

“요즘 남극성당에서 일하신다고요?”

오르마즈는 가슴에 기대앉은 이 조그만 소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냥 용돈벌이나 하는 거예요. 엄마 주는 용돈 모아봤자 군것질 값도 안 되니까.”

유평이 입에 쿠키를 가득 문 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그냥 매점 청소하고 정원에서 잡초 뽑고.......”

“조만간 저와 더 자주 만나시겠군요.”

“왜요?”

유평이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오르마즈를 휙 올려보았다.

“이번에 관직을 그만뒀습니다. 내년에 남극성당에 입학할 예정이죠.”

“내무대신을 그만두셨다고요?”

갑자기 커진 목소리로 물은 건 옆에 있던 유레트였다.

“이번 일 때문이신가요? 그건 오르마즈님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건.......”

오르마즈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특별히 잘못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언제든 때가 되면 물러날 생각이었고.......이번 일로 물러날 명분도 생겼으니까요. 어쨌든 제가 당초 관직에 들어간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젠 잠시 물러나 공부라는 걸 좀 해 볼 생각입니다.”

“목적이라뇨?”

유레트의 물음에 오르마즈는 별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지, 유레트는 조금은 침울한 표정이었다.

“학교 기숙사에 묵을 테니 여기도 자주 올 수 있을 겁니다.”

비로소 표정이 조금 풀어진 유레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가에 어색하나마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세요, 저녁 가져올게요. 다 같이 먹어요. 한 식구처럼......”

엄마 유레트가 주방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유평이 입에 물고 있던 쿠키를 꿀꺽 삼키고는 자신을 안고 있는 오르마즈에게 조금 전처럼 반말로 물었다.

“남극성당 무슨 과로 가기로 했어? 오르마즈 아빠하고 동생이 육서과정에 있으니까 그리로 가는 거야?”

“아뇨, 전 십경과정으로 갈 겁니다.”

유평이 무언가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극성당에 들락거리다보니 무언가 주워들은 것들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육서과정은 중도파하고 원리주의가 많고, 십경과정은 개혁파들이 많던가? 그런데 십경과정은 교내에서 힘이 별로 없는 것 같던데 왜 그리로 가? 그래도 아빠가 교수로 있는 데로 가면 학점도 잘 주지 않을까?”

나름대로 실리적인 유평의 질문에 오르마즈가 입가 가득 미소를 지었지만 자신이 아버지를 피하려는 이유에 관해서는 별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유평 역시 그런 것을 꼬치꼬치 따져묻지는 않았다. 대신 오르마즈의 상처를 짚으며 조금 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아빠가 힘써서 풀어주신 거야?”

“예?”

“우리 아빠가 오르마즈 할아버지하고 협상해서 풀어주신 거냐고?”

겨우 13살짜리 꼬마의 맹랑한 물음에 오르마즈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다음 물음은 이런 그의 놀라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아빠가 그럴 정도로 오르마즈를 아끼는 것 같지는 않던데?”

“......”

유평이 큰 쿠키 한 개를 입 안에 또 넣고 오물거렸다.

“나도 알 만큼은 알아. 남극성당에서 생도들 수군거리는 거 다 듣고 있단 말이야. 거기 서생들 맘대로 추측하는 건 어차피 정확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오르마즈가 코윈에 잡혀 있었던 것까지는 맞잖아.”

“조금 전에는 왜 모른 척 하셨습니까?”

“엄마는 내가 정치 얘기하는 거 무지하게 싫어해. 난 어차피 궁에 돌아가기는 틀렸으니까 그냥 가문 좋고 나 좋아해 주는 사람 만나서 결혼하는 게 제일이래.”

유평이 오르마즈의 목을 힘주어 꼭 안으며 실없이 키득거렸다.

“네가 돌아와서 정말 좋아. 아빠 덕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유평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오르마즈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돌아온 건지 비밀을 지켜주실래요?”

“응. 빨리 말해 봐.”

유평이 여전히 입 안에 쿠키를 가득 문 채 호기심으로 가득 찬 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르마즈가 그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꺼내주셨죠.”

오르마즈의 얼토당토않은 대답에 유평이 대번 얼굴을 찡그리며 입 안에 든 쿠키 조각을 사방으로 튀겼다.

“날 아직 어린애 취급하는 거야?”

“언젠가는 제 말의 뜻을 알게 되실 겁니다.”

유평이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오르마즈는 그 이상 친절하게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있는 샤미르의 마지막 흔적을 조용히 안아줄 뿐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