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94 회: 파트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
.
.
루게의 대사관에 억류 중이던 레곤 대공주는 황성의 전투가 개시되면서 비엔의 델루지 본가로 옮겨졌지만 델루지 가 쪽에서는 여전히 ‘다루기 제일 어려운 인질’이었다. 물론 황족이며 종친회장이라는 그의 지위가 대놓고 ‘인질 취급’을 하기에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어머니 유평 대제의 그것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의 유별난 성깔이 더더욱 문제였다.
남편이 연합군에서 감시당하고 있고, 딸이 사오시안트에 감금되어 있는 정도라면 지레 겁을 먹고 고분고분해졌을 보통의 어머니, 아니 인질들과는 달리, 그의 ‘황족’이라는 콧대만은 여전했다. 그는 ‘대공주로서의 격’에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대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것이 델루지 가의 고위 종사자건 아니건 지체없이 주먹이니 발길질을 날리기가 일쑤였다.
심지어 한번은 그의 위치를 ‘일깨워주려던’ 제롬의 정실 오르테 라자루스 부인의 얼굴에 ‘그래, 니 남편놈 퍽이나 잘났다’며 접시를 내던져 코뼈를 주저앉혀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게다가 그 풍성한 몸매가 말해주듯, 워낙 타고난 미식가에 엄청난 대식가인 대공주다보니 그의 식사를 챙겨주는 일만도 요리사 서너 명이 따로 달라붙어서 처리해야 할 정도로 까다로운 일이었다.
그날---황제령에서는 두 번째 공성전이 벌어진---도 대공주는 일어나자마자 받은 아침상이 ‘맛이 좀 이상하다’고 투덜대가며 마지못해 먹었지만 워낙에 입맛 맞춰주기 까다로운 사람이라 하인들 누구도 그의 일상적인 불평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최소한 아침을 먹고 한 시간 정도 후, 대공주가 갑작스런 복통에 쓰러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결국 종가 의무실까지 실려가 아침 먹은 것을 모두 게워낸 대공주는 ‘오르테 저년이 날 죽이려고 한다’며 소리까지 버럭버럭 질러댔지만 매사 계산적이고 용의주도한 오르테 부인이 자신의 코뼈를 부숴 놓았다고 대공주를 해코지할 서툰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공주의 ‘병’은 먹은 것을 모두 토한 것으로도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심한 고열과 복통에 의식까지 잃는 지경으로 가고 말았다. 대공주에게 불상사라도 생긴다면 얼마나 큰 일로 번질 수 있을는지 잘 아는 오르테 부인은 이 피곤한 인질을 결국 가까운 병원으로 데려가라고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은 그곳에서 벌어졌다.
장세척을 한다며 실려 들어간 대공주는 30분이 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상황을 의심스럽게 여긴 델루지 가 가디언이 들어갔을 때 발견한 건 얼굴이 엉망이 된 채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의사와 보조원, 그리고 부서진 창문이 전부였다.
당황한 가디언들과 델루지 가 근위병들이 병원 일대를 모조리 뒤졌지만 상황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진료실은 병원 8층에 위치해 있었고, 창문은 외부에서 부서져 있었다. 누군가 사전에 계획해 저지른 탈출극, 혹은 납치극이 틀림없었지만 증거라고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게다가 대공주가 먹은 음식 역시 나중에 조사했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다.
말 그대로 대공주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같은 시각, 사오시안트의 상지 대군에게도 어머니에게 벌어진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서 동시에 사라졌다는 것까지 알려지면서, 의심의 눈길은 당연히 루게에 있는 그의 시가, 세닉 가에 쏟아졌다.
당황한 델루지 가에서는 즉시 루게 주재 대사를 세닉 가 종장 이렌느 경에게 보내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올케와 조카의 느닷없는 실종에 당황했기는 이렌느 경 역시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상황은 델루지 가의 예상보다 더더욱 나쁘게 흘러가고 있었다.
‘가문의 대외정책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예르마크 경의 연락이 도착한 건 이렌느 경이 델루지 가 대사 앞에서 상황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던 바로 그 시각이었다. 하지만 남동생의 긴급전문을 받아든 이렌느 경의 표정이 왜 그리 파랗게 변했는지, 평소 차갑기로 소문났던 그가 왜 ‘세상에’를 연발하며 눈물어린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저었는지 델루지 가 대사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사를 대하던 이렌느 경의 조심스럽던 태도는 전문을 받은 직후 180도 변해버렸다. 그는 가문 근위병에게 ‘대사를 바깥으로 안내해 드려라’고 명령하고는 일방적으로 자리를 비워버렸고, 대사는 영문도 모른 채 근위병들의 손에 이끌려 세닉 종가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그렇게 쫓겨난 대사는 ‘예르마크 경이 연합군을 배신했으니 종장 이렌느 경을 빨리 만나 해결책을 논의해라’라는, 본가의 명령을 바로 전해 들었지만 논의는 고사하고 그를 더 이상 만날 수조차 없었다.
어쨌든, 레곤 대공주와 상지 대군은 그렇게 연합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버렸고, 이제 남은 건 대공주의 장녀, 루이제 대군뿐이었다.
사실 그 역시 아버지로부터 ‘최대한 빨리 탈영해라’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상부에서 내려온 ‘작전 명령’과 ‘그를 유인해 붙잡아두기 위한 속임수’를 구분할 정도로 눈치가 빠르지를 못했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였다. 사령부에 정체불명의 암살수가 들어왔다는 보고에 속은 그는 사령부 주변을 뒤지느라 천금같은 10분을 까먹었고, 뒤늦게 상황을 알아채고 도망치려 했을 때는 세닉 가에서 함께 데려온 참모와 5명의 근위병들이 걸림돌이었다.
어지간한 무장이었다면 그들을 내버려둔 채 혼자 도주했겠지만 단순하기는 해도 나름대로 정은 많은 그다 보니 한솥밥을 먹던 장병들을 연합군 진영에 놔둔 채 혼자 도망칠 정도로 매정하지를 못했다. 물론 5명의 근위병들 중 2명이 델루지 가에 이미 매수되어 있었다는 것이 더더욱 문제였지만.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 끝에 결국 참모만을 대동하고 도망치려 시도했던 루이제 대군은 믿었던 근위병의 밀고로 미처 전선을 넘지 못한 채로 동부기병대에 붙잡히고 말았다.
루이제마저 도망치려 했다는 보고를 접한 제롬은 ‘대군이건 자시건 탄현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년 모가지에 밧줄부터 걸어라’며 길길이 날뛰어댔다.
사실 너무도 극단적으로 다른 남매지간이었지만, 그도 한때 오빠 코리온이 처했던 것과 비슷한 신세가 되어 연합군에 사형수 신분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근위기병대장 자리가 이렇게 파리 목숨이 되었는지 모르겠군.”
탄현성에 도착한 샤자한 공은 도착하기가 무섭게 열린 ‘논공행상’ 자리에서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결과가 결과다보니 말이 ‘논공행상’이었지 연합군에서 상을 받을만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고, 처벌을 받을 무장들 투성이였다. 그리고 그들 중 제일 먼저 끌려나온 것이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붙들린 루이제 리쿠 대군이었다.
샤자한 공의 말대로, 지난번의 릴라크에 이어 루이제까지 물의를 일으키면서, 근위기병대 병사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잔뜩 굳어 있었다.
소태령 산맥의 움푹 팬 골짜기를 마치 댐처럼 가로막고 선 이 탄현성은 성이라기보다는 ‘관문(關門)’이라는 편이 더 정확한 구조였다. 거의 직선에 가까운 두꺼운 장벽 밑으로 뚫린 2개의 큰 문이 1번 도시의 북동쪽에서 황도로의 접근 도로를 통제하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
동맹군과 근위대 사이에 있었던 이곳에서의 지난 전투는 기록상 ‘승전’이라고 남기는 했지만 수에보가 전사하고, 근위대 전차대가 치명타를 입어가면서 얻은 만신창이의 그것이었다. 게다가 조페를 비롯한 동맹군들이 혈전 끝에 물러난 것도 아니었고, 미리 세워진 전략에 따라 제 발로 물러난 것이다 보니 그다지 깔끔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1번 도시 내에 연합군이 가지고 있는 사실상 유일한 보루였다.
이번 논공행상이 있을 곳은 주 도로를 통제하는 큰 문 위, 성의 높은 누대였다. 성의 구조 자체가 안쪽을 보호하는 독립된 성이 아닌, ‘관문’이다보니 내부에 주둔할 수 있는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고, 성벽의 방어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는 성 동북쪽에 만들어진 자신들의 숙영지에서 이 광경을 멀리 올려보아야 했다.
누대 꼭대기에 앉아있던 샤자한 공은 바로 옆에 앉아있는 제롬을 힐끔 쳐다보며 ‘이 인간이 다친 게 그나마 다행이군.’하며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몸이라도 성했다면 아마 주변의 기물이고 뭐고 하나도 남아나지 않았을 테고, 샤자한 공과도 니 잘못이네 내 잘못이네 하며 죽자사자 싸움을 걸었을 위인이었다.
하지만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처지다보니 혼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 그가 분노를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죄인.......아니, 탈영자를 끌어내!”
씩씩대는 제롬의 고함소리에 창백해진 표정의 루이제 대군이 제롬의 근위병들 손에 양 어깨가 붙들린 채 질질 끌려나왔다. 그는 제롬이 왜 ‘죄인’이라는 일상적인 표현이 아닌, ‘탈영자’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썼는지까지 생각할 정도로 사려깊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소한 어머니에서 물려받은 황족으로서의 자존심만은 여전히 대단했다.
“저 씨발새끼, 감히 황족이 어딜 가건 말건 네놈이 이 따위로 날.......”
루이제 대군은 여전히 큰소리를 치며 당상에 있는 제롬을 잠시 노려보았지만 오래 그러지는 못했다. 문 바로 위의 처형단을 본 순간 대담한 그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싹 사라지고 말았다. 성벽 위에는 참수를 위한 모루가 있었지만 그의 몫은 아니었다. 대신 성벽 위로 늘어뜨린 3척(1m) 정도 길이의 두꺼운 밧줄이 그의 최후를 위해 마련된 준비물이었다.
성벽에 매달린 채 추하게 버둥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병사들의 앞에 그대로 드러날 것임을 깨달은 루이제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명색이 황족에게 꼭 교수형을 하셔야겠소? 지금이라도 은사를 내려서 참수로......”
샤자한 공의 참견에 제롬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황족은 개뿔.......이젠 변변한 놈 하나 남지도 않은 쓰레기 혈통인걸.”
제롬의 극단적인 반응에서 샤자한 공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아무리 같은 편이라고는 해도 황족을 저렇게까지 칭하는 건 이만저만한 실언이 아니었다.
“이번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샤자한 공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매사 침착한 그가 저 젊은 최고제후의 폭주를 이 정도에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공의 젊은 혈기는 이해하오나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으니.......”
“못 들은 걸로 안 해도 좋습니다.”
순간 깜짝 놀란 샤자한 공의 어깨가 들썩했다. 그는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되어간다는 불안감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가 힐끔 돌아본 제롬은 한 손으로 턱을 짚은 채 혼자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 여자는 누굽니까?”
샤자한 공이 가리킨 건 흰 망토를 어깨에 걸친 한 중랑장이었다. 가슴에 달았던 가문 문장을 떼어내서인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이번 논공행상에서 ‘상’을 받게 될 많지 않은 사람들 중 제일 앞에 서 있었다.
“의무단 부단장이라던데.......이름이 페이 뭐시기라던가. 플라칼 가에 파견되었던 사절단을 데리고 재빨리 도망친 공훈으로 훈장을 수여하기로 했습니다. 저 여자가 아니었다면 사절단까지 모조리 포로가 될 뻔했지 뭐요. 안 그래도 의료요원이 부족한 판에 그네들까지 잡혔으면......”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