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95 회: 파트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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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문장은 왜 떼었는데요?”
“원래 세닉 가 소속이라 보기 싫으니 떼라고 했지요.”
샤자한 공이 다시금 얼굴을 찡그렸다. 신중한 그답게 이번에도 짚고 넘어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혹시 다른 속내가 있을지도 모르니 뒷조사를.......”
“아, 걱정 마십시오. 이미 조사 다 했으니. 종가 주치의였다가 요아킴 경 사후에 이렌느 그년한테 심한 모욕을 당하고 쫓겨난 전력이 있더군요. 그 뒤로 세닉 가와는 일절 연락을 끊고 쳐다보지도 않았다가 이번에 반 강제로 잡혀온 처지랍디다. 이렌느 그년 이야기만 하면 이를 갈더군요.”
일단 수긍한 샤자한 공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 사이, 근위병들이 버둥대는 루이제의 목에 어렵게 밧줄을 걸고 있었다. 워낙에 큰 덩치에 기운까지 센 그다 보니 무려 3명이나 되는 근위병들이 진땀을 빼 가며 그의 팔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그때, 지금껏 조용히 서 있던 ‘페이 코다 박사’가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샤자한 공이 다시금 제롬을 돌아보았다.
“저 여자는 또 왜 나섭니까?”
“교수형은 끌어올려 놓으면 가끔 되살아나는 일이 많다더군요. 확실히 목숨 끊어진 걸 의사가 확인해야 된다던데 참모들한테 알아보니 정말로 그렇다고 하더군요. 사망확인을 직접 하겠다고 지원하길래 하라고 했지요.”
“하긴, 저도 전에 반란 노예놈들 집단 처형하는데 1시간이나 매달아놨어도 나중에 세 놈이 벌떡 일어나서 사람들이 혼비백산한 일이 있었지요.”
그 사이 목에 밧줄이 묶인 루이제에게 다가간 ‘페이 코다 박사’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이 거친 무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가 누군지 알아본 루이제가 버둥대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씨발, 할아버지가 총애하셨다더니, 이젠 저 개새끼들 앞잡이가 된 거냐!”
루이제가 이를 드러내며 눈앞에 똑바로 마주선 이 여자의 얼굴에 침을 퉤 뱉었다.
“후훗.”
수나 마구스가 쓴웃음과 함께 얼굴의 침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이번엔 루이제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우욱!”
순간 거구의 루이제가 반쯤 튕겨나가며 바닥을 맥없이 굴렀다. 목에 걸린 밧줄에 걸려 자빠지지 않았다면 한참을 밀려나가 나동그라졌을 정도의 엄청난 일격이었다. 멍해진 얼굴의 루이제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어 그 엄청난 괴력의 ‘의사’를 멍하니 올려보기만 했다.
“이거 볼만한데.”
그 광경을 뒤에서 지켜보던 제롬이 모처럼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미소를 짓고 있던 수나 마구스가 루이제에게 천천히 다가가서는 완전히 다른 표정과 함께 이 맏손녀의 얼굴 양쪽을 붙들고는 목을 어루만졌다.
“다른 사람이 다 해 줄 테니 넌 조용히 떨어지기만 하면 돼, 알았냐.”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근위병들에게는 마치 비아냥거림처럼 들렸지만 루이제는 지금까지의 그 당당하던 모습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 멍한 표정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수나 마구스는 가져간 가방에서 언뜻 바이탈사인 측정기처럼 생긴 것을 루이제의 귀 밑에 꾹 눌러 붙였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근위병들에게 끌어내라고 손짓을 보냈다. 그새 순한 양이 되어버린 루이제는 힘이 빠져버린 다리를 후들거리며 근위병들에 이끌려 성벽 모퉁이로 비틀비틀 다가갔다. 근위병들은 물론이고 겁에 질린 루이제까지도 자신의 목에 그가 붙인 것이 무엇인지, 양쪽 목을 쓰다듬던 수나 마구스가 무엇을 발랐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학, 학.”
거의 80척(24m)에 달하는 까마득한 성벽 밑을 내려다본 루이제가 겁에 질린 듯 고개를 저었다. 성벽 밑에서는 이번 패전에 분노한 남부연합군 병사들이 ‘죄인을 빨리 떨어뜨려라’며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루이제를 모퉁이까지 끌고 간 근위병들이 마지막으로 사령관들이 있는 누대 위를 올려보았다. 제롬은 별다른 머뭇거림조차 없이 손을 치켜들어 집행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누대 주변을 울리는 북소리 속에서, 루이제가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누군가 그의 등을 거칠게 떠밀었다.
“아웁!”
성벽 밑으로 잠시 곤두박질친 루이제의 목이 순간 뒤로 확 꺾였다. 입을 벌린 채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는 루이제의 끔찍한 표정처럼, 샤자한 공의 표정 역시 조금씩 일그러졌다. 하지만 버둥거리던 루이제의 발악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십여 초 정도를 꿈틀대던 루이제는 온몸에서 가는 경련을 일으키며 천천히 늘어지기 시작했다.
“덩치가 커서 그런가, 생각 외로 싱겁군, 쳇.”
제롬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잠시 저대로 둬야겠지요.”
샤자한 공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그 광경에서 시선을 떼며 짐짓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뒤에 기다리고 있던 탈주병들, 그리고 도망치다가 붙들린 플라칼 가와 세닉 가의 파견무장들이 차례대로 끌려나와 목이 잘리거나 태형에 처해졌다. 축 늘어진 루이제의 ‘시체’는 그 시간동안 내내 성벽에 맥없이 걸린 채 참수당한 다른 무장들의 머리와 함께 끔찍한 전시물로 방치되어 있었다.
‘논공행상’이 모두 끝난 후, 끔찍한 처형으로 충분히 분풀이를 한 연합군 병사들도 모두 각자의 위치로 흩어지고 이제는 뒤처리만이 남아있었다. 보기싫은 시체를 치우고 피로 물든 누대를 청소하는 일은 노예들과 사역병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성벽에 걸려 있던 루이제의 무거운 시체를 끙끙대며 끌어올려 바닥에 눕혔다.
그때까지 성벽 위에서 말없이 기다리고 있던 수나 마구스는 어깨에 달린 ‘훈장’을 무표정하게 떼어 가방 속에 넣어버리고는 바닥에 늘어진 루이제에게 다가갔다. 물론 그의 손에는 바이탈사인을 체크하는 간단한 장치와 ‘사망확인서’, ‘시체인수증’ 양식이 들려 있었다.
처형당한 시체는 사역병단이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지금처럼 신분이 높은 특별한 경우, 시체 자체가 협상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보니 의무병단에서 따로 보존처리를 해서 특별 보관하는 것이 관례였다.
수나 마구스는 루이제의 몸에 계측기를 몇 군데 형식적으로 대 보고는 확실히 죽었다며 엄지를 아래로 꺾어 보였다.
“됐지요? 이건 의무병단에서 가져가는 거죠?”
성벽 위 청소를 감독하던 사역병단 중랑장이 ‘시체 인수증’에 재빨리 사인을 하고는 바쁜 티를 있는 대로 내며 일을 슬그머니 떠넘겼다. 그에게 눈을 슬쩍 흘겼던 수나 마구스는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내가 알아서 가져갈 테니.”
천천히 일어선 수나 마구스는 뒤따라온 의무병, 군의관들에게 루이제의 시체를 들라고 눈짓했다.
“보존처리해야 하니 내 진료실에 가져다 놔라. 명색이 황족 시체니 아무도 손 못 대게 하고.”
“알겠습니다.”
루이제를 봉지 안에 잘 밀봉한 의무병들은 그 육중한 ‘시체’를 들것에 싣고 어딘가로 급히 사라져갔다. 그들이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 루이제의 상태가 어떤지 그 뒤로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각 사람들과 무장들은 연합군을 탄현성으로 쫓아내고 위풍당당하게 ‘개선’한 황제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굳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묻지도,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아니, 굳이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도리어 바로 몇 시간 전 승은을 내린 남자의 죽음에도 별다른 언급조차 없이 전투 마무리를 직접 지휘하던 황제의 모습에 놀라움을 표시할 지경이었다.
사실 나름대로 ‘경사스런 승전’의 막판에 벌어진 이라즈의 죽음 덕분에 죄없는 아랫사람들만 황제 앞에서 표정관리를 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물론 황제는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근엄했고, 눈치없이 기뻐하며 뛰어다니는 아랫사람들에게 핀잔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고작 남자 하나 죽은 것 따위’라고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눈치빠른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황제의 표정에서 흐르는 감정의 기복을 바로 읽어낼 수 있었다.
물론 이런 모든 것을 전혀 모른 척---평소 눈치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사람들도 의아해하기는 했지만--- ‘개국 이래 제일 경사스런 날’이라며 대놓고 껄껄대며 다니는 남자도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는 총리였고, 그를 대놓고 나무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어차피 ‘감정을 감춘’ 황제 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새로 동맹군의 일원이 된 두 가문 사람들도 환영할 겸, 이후 문제도 비공식적으로 상의할 겸 연 이 파티 자리에서도 그의 이런 ‘몰지각함’은 여전했다. 그는 시작부터 ‘최고의 기쁜 날이니 이번 파티는 자이센 가에서 한 턱 내겠다’며 선언해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표정이 왜 그래? 아랫사람들이 다 부담스러워 하잖아.”
카렐에게 잔을 들고 다가온 페로는 마지못해 잔을 들고 응대해준 그에게 대뜸 짜증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너야말로 왜 그러는데.”
카렐이 페로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냉랭하게 물었다. 그 역시 페로가 이토록 기분 좋아하는 이유가 단순히 승전 때문만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표정관리하기 힘든 건 이해하지만 이럴 필요까지 있는 거야?”
“뭐, 아니라고는 안 하지.”
냉큼 대꾸한 페로는 여전히 싱글벙글하며 이번에도 잔을 번쩍 들고 내각의 대신들 쪽으로 멀어져갔다. 카렐은 욱신거리는 왼손을 주무르며 연회장 한쪽의 옥좌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이젠 저 자존심 센 남자가 ‘위로해주는 척’이라도 해 주기를 바랐던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는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지친 표정으로 앉아있는 카렐에게 제일 먼저 다가온 건 황비 네페티였다. 공식석상에 나타나는 여느 때처럼, 단정한 히잡으로 얼굴과 머리칼을 감추고 있던 그는 황제의 곁에 와서야 눈 아래를 가린 베일을 벗고 얼굴을 살짝 드러냈다. 그리고는 황제의 시선 속에서 그 값비싼 미모와 미소를 비로소 살짝 내보였다.
“그럭저럭.”
카렐은 어깨와 목을 주물러주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잠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의 따뜻한 손길 속에서 짧은 편안함을 만끽하던 그는 황후 아메스를 찾았다. 되짚어보니 파티 시작할 때 함께 입장한 이후로 그를 본 기억이 없었다.
“황후 폐하를 찾으시나요?”
네페티의 물음과 동시에 아메스를 발견한 카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그 놀기 좋아하는 황후는 오늘도 한쪽의 페로 가디언들, 그리고 페로의 측근들 중간에서 이미 고주망태가 되어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었다.
물론 네페티는 황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 것을 눈치 챘지만 이 자리에서 황후를 흉볼 정도로 서툰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사실 문제는 오늘 낮에도 있었다. 죽어서나마 내명부 정식 일원이 된 이라즈를 염하고 입관(入棺)하던 자리에 세네피스 황태후까지도 얼굴을 내밀었지만, 정작 내명부 수장인 황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 덕택에 안 그래도 불편하던 황제의 심사가 더 뒤틀어졌다는 것을 네페티는 잘 알고 있었다.
입관까지 다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간 후에야 뒤늦게 나타난 아메스는 ‘급체를 해서’라고 둘러댔지만 카렐은 그 시간에 그가 아버지 페로와 티타임을 가지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페로가 질투심에 안절부절 못 하던 딸을 꼬드겨 나가지 못하게 했었다는 사실 또한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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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회가 머지않았군요. 코멘트나 추천이 전보다 줄어든 것 같아 혹시 글에 문제라도 있지 않나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가실 때 흔적이라도 남겨서 아마추어 작가에게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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