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96 회: 파트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
.
.
“베아트릭스 황빈은?”
“부상자들을 둘러보고 온다고 했습니다만.......원래 파티 체질은 아니죠.”
“그래도 핑계대고 빠질 수 있다는 게 부럽군.”
카렐이 쓴웃음을 지었다. 워낙에 파티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 베아트릭스다보니 이런 일이 있을 때는 매번 이런저런 핑계로 빠지기가 일쑤였다.
“황비도 황궁을 지키고 있던 것을 굳이 나무라고 싶지는 않지만.......앞으로는 더 중요한 것을 위해서라도 위험할 때는 무조건 안전한 곳으로 피해주면 좋겠소.”
“알겠습니다.”
카렐이 새삼스레 이런 말을 꺼내는 속내를 눈치챈 네페티는 겉으로는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으음?”
카렐은 그때 막 파티장에 들어선 한 사람에게 문득 시선을 주었다. 조금은 파리해진 표정의 세네피스가 네페티와 함께 있는 황제를 올려보며 입가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별관으로 피하신 건 정말 뜻밖이군. 이제야......”
카렐이 무어라 말하려 했던 것을 네페티가 살짝 가로막았다.
“가려 가신 것이 아니고 루토 국장이 전후사정을 알리지 않고 가디언들을 동원해서 강제로 끌고 갔다고 합니다.”
“루토 녀석, 그거 하나는 상을 줄 걸 그랬나. 그러지 않고는......”
헛웃음을 짓던 카렐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뒤에서 황제의 귀를 살짝 깨물었던 네페티가 어느새 그의 목 언저리를 다정하게 핥고 있었다.
공개 석상에서 어지간해서는 애정표현을 하지 않던 그의 이런 진한 행동에 잠시 당황했던 카렐은 그 이유를 바로 깨달았다. 황제에게 다가오던 세네피스가 잠시 자리에 멈춰 서서는 이 광경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조금 늦으셨군요, 황태후 폐하.”
네페티가 히잡으로 얼굴을 살짝 가리며 한 발 물러서서 고개를 숙였다. 이런 뻔뻔한 황비를 한 번 매섭게 흘겨보았던 세네피스는 여전히 험악한 표정으로 카렐에게 다가왔다. 감정이 돋은 것이 굳이 네페티 때문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황상, 이라즈 경의 장례를 귀인에 준해 하시려는 건 이해하지만 하필.......”
“묘 때문에요?”
카렐이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태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세네피스가 얼굴의 노기와 떨리는 음성을 애써 감추며 따졌다.
“귀인급 하나 묻자고 황제의 대묘(大墓)를 미리 짓는다는 건 과한 처사라 사료됩니다, 황상.”
세네피스의 잔뜩 붉어진 얼굴을 올려보며 네페티는 ‘그래, 이 정도면 펄펄 뛸 만도 하군.’하고 내심 생각했다. 천하의 세네피스가 자식의 묘를 짓는, 아니, 의도야 어쨌든 자신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려는 카렐의 의도에 발끈하지 않을 턱이 없었다.
“미리 지으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카렐이 짐짓 웃음 띤 얼굴로 어머니에게 자리를 권했지만 세네피스는 대답을 재촉하는 듯 자리에 우뚝 선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설계안을 마련해보라고 지시했을 뿐입니다. 지금 전비(戰費) 한 푼이 아까운데 고작 무덤 하나 만들자고 헛돈을 쓸 수는 없지요. 명색이 대제의 대묘인데 돈에 쪼들리며 허술하게 짓는 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묘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냐는 말입니다! 지금이 100살밖에 못 살던 교단 시대이기라도 합니까! 이 어미가 멀쩡히 살아있는 자식의 묘를 보면서 가슴에 멍이 들기를 원하십니까!”
세네피스의 대답이 어찌나 컸는지 단하에 있던 시종들이 움찔했을 지경이었다. 그런 세네피스의 생각에 네페티도 내심 동조했지만 이 거친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그 역시 황제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소름끼치는 구조물은 살아생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어차피 그런 이야기는 베개맡에서 황제를 다정하게 달래가며 적당한 눈물과 함께 속삭여도 되는 것이니.
물론 세네피스야 그런 ‘무기’를 쓸 수 없으니 이렇게 대놓고 발끈할 수밖에 없겠지만.
“할머니께서도 생전에 미리 묘를 세워 두셨던 것으로 압니다. 선대황제의 묘를 보고 나니 황제의 묘를 생전에 미리 지어두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겠더군요. 내명부 역시 함께 합장될 것이니 이라즈 경의 장례로 어차피 필요성도 생긴 김에 검토를 지시한 것입니다.”
“필요성은 전혀 없습니다. 생길 일도 없고요. 세상이 끝장나기 전에는 황상께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니.”
세네피스가 눈을 험악하게 치켜뜨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라즈 경은 지금 짓고 있는 가묘(假墓) 정도면 충분합니다.”
“대묘 건립은 어차피 재정이 확충된 후에 충분한 검토를 거쳐 결정할 것이니 미리 염려하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 어미는 틀림없이 말했습니다. 그런 건.......”
“황태후 폐하, 그 사안은 상께서 결정하실 것이지 태후께서 감히 관여하실 문제가 아니옵니다. 굳이 그러고 싶으시다면 태후 자격이 아닌, 남극성당의 대제학 자격으로 유학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올리심이 가당할 것입니다.”
귀에 익은, 솜털처럼 고운 남자 목소리에 세네피스의 고개가 순간 휙 돌아갔다. 그리고 궁지에서 풀려난 카렐의 표정에도 희색이 감돌았다.
“오호,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셨구려. 리쿠 학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카렐이 성큼성큼 걸어 방금 당상에 올라온 한 키 큰 남자를 다정히 품에 안았다. 탈라스의 강렬한 사막 햇빛 때문인지, 코리온의 희던 얼굴은 구릿빛으로 변해 있었지만 그 고운 자태만은 여전했다.
“이런, 화장품이라도 선물해야 하려나.”
그는 허리 숙여 인사하려는 자신을 거칠게 껴안는 황제의 손길에 조금 놀라 움찔거렸지만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네페티에 이어 코리온까지 등장하자 세네피스의 표정은 더더욱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것도 자신에게는 ‘해 줄 수 없는’ 다정한 포옹까지 받는 모습에 그는 입술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꽉 악물고 있었다.
“무슨.......”
코리온은 포옹을 풀자마자 갑자기 자신의 위아래를 꼼꼼히 뜯어보는 카렐의 눈길에 당황한 듯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구석구석 훑어본 카렐은 조금 능글맞기까지 한 미소를 씽긋 지었을 뿐이었다.
“아니, 이번에 새로 알게 된 한 사람이.......학장과 무척 비슷해서 말이야.”
“저와 말입니까?”
누군가와 비교당한 것이 내심 불쾌한지 코리온이 눈가를 살짝 씰룩거렸다. 그런 코리온의 귓가에 카렐이 살짝 입가를 가져갔다.
“하핫, 기분 나빠할 것 없네. 그대와 비교하는 것이 아주아주 자연스러운 사람이니까.”
카렐의 입술 끝이 귓가를 스치자 코리온이 다시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평소처럼 차갑고 침착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 말씀이십니까. 그런 이야기는 이미 여러 차례 들었으니......”
코리온의 ‘그럭저럭 비슷한’ 추측에 카렐은 어깨만 으쓱했을 뿐 정확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은 지친 몸을 다시 옥좌에 기대며 코리온과, 함께 올라온 그의 보좌관 하심에게 자리를 권했다. 씩씩대던 세네피스는 토라진 것인지, 아니면 카렐을 ‘설득’할 다음 방책을 강구하고 있는 것인지, 단하의 사람들 사이에서 술잔을 들이키며 혼자 서 있었다.
“지금 막 도착한 거요? 기병대는?”
카렐이 코리온에게 손수 차를 걸러 내밀며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당초 코리온을 탈라스에 보낸 이유가 서부의 칼림과 라바니 경이 동맹군의 기병 양성소인 탈라스를 영향권에 넣는 것을 막으라는 것이었고, 그는 자신에게 임무를 준 황제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황도가 피로 물든 처절한 싸움에 말려들어 있던 지난 2달여간, 그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탈라스를 황제의 품에서 완벽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그리고 황성의 개선식과 함께 그 역시 ‘조용한 개선’을 한 것이었다.
카렐의 계획대로, 동맹군의 정예 병력이 황도에서 적의 선공을 막아내는 동안, 샤드니의 관리 하에 반격을 위한 예비병력 역시 트라이앵글에 차례차례 집결하고 있었다. 이제 트라이앵글에는 이제 15만에 육박하는 대군이 반격을 위한 준비를 거의 마쳤고, 코리온이 이끌고 온 기병만 합류하면 반격을 위한 라인업이 완료되는 셈이었다.
“슈로 기사단에 보강될 중장기병 9천과 슬레이프니르에 편성될 경기병 1만1천이 이틀 후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이곳 사정도 확인할 겸, 탈라스는 마자리크 경과 카이두 경에게 맡겨두고 소인 조금 먼저 출발했습니다.”
“하긴, 칼림의 도적떼들도 물러났으니 이제 학장이 굳이 그곳에 머물 필요는 없겠지. 수고하시었소. 학장. 그리고 하심 예킨터스 교수도. 이젠 황도에서 좀 쉬시구려.”
카렐이 검게 타고 조금은 거칠어진 코리온의 손등을 부드럽게 짚어주었다. 하지만 쉬라는 카렐의 말에 코리온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소인이 해 온 일이니 일단 트라이앵글에 가서 그들을 인계하고 그 후에.......”
“푸훗. 학장이 솔직하지 않은 건 내 처음 봤소.”
카렐의 핀잔 아닌 핀잔에 코리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속내를 들켜서인지 당황한 기색만은 황제의 눈에 훤히 보였다. 비록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트라이앵글에는 그의 연인인 샤드니가 있었다.
“아참, 샤드니 경은 트라이앵글의 예비병력을 관리하느라 여기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학장이 가면 기뻐할 거요. 내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도록 선편을 마련해 줄 테니.”
코리온의 붉은 입술에 또다시 민망함의 미소가 스쳤다.
“그럼 오늘 저녁에.......”
“그러시오.”
카렐이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묘한 아쉬움이 스치는 것을 코리온도 눈치챘는지 그는 차마 말을 맺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평소 맺고 끊는 것이 누구보다 분명하던 코리온의 행동 치고는 조금 이상하다고 카렐도 생각했지만 일단 모든 미련을 접기로 했다.
“이상하지, 학장을 안았을 때 오는 찌릿한 느낌이 누구와 무척 비슷했어.”
카렐이 계속 누군가와 비교를 하는 모습에 코리온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깨를 더듬는 카렐의 손끝에서 살짝 드러난 문신을 그제야 발견한 듯 입을 열었다.
“가슴에 웬.......”
“겉보기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어쩌면 속은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코리온은 지금껏 거의 읽을 수 없던 황제의 회색빛 눈동자에 쓸쓸함이 스치는 것을 읽어냈다.
“누군지 모르겠사오나 비교하셔서 상의 맘이 편해지신다면......”
그때, 파티장에 있던 법무대신 두겐이 코리온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허둥지둥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학장님, 학장님!”
“학장도 바쁘군. 그럼 가 보시오.”
잠시 머뭇거리던 코리온은 무어라 하려던 말을 일단 접고는 카렐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카렐의 표정에 다시금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시끌벅적한 파티의 한쪽, 당상의 큰 옥좌 위에 또다시 홀로 앉아있었다. 카렐은 페로를 잠시 돌아보았지만 그는 아메스, 측근들과 껄껄대며 웃고 있을 뿐, 우울해 있는 그에게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다친 왼손에 따끔한 아픔을 느낀 카렐은 반쯤 먹다 만 쥬스잔을 든 채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허전함이 그의 가슴 속을 스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 축하는 헤아릴 수 없이 받았지만 위로는 받은 기억이 거의 없었다. 물론 사람들의 머리에 위로할 거리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겠지만.
카렐은 옷깃 사이로 반쯤 드러나 있는 용 문신을 자기도 모르게 또다시 더듬거렸다.
++++++++++++++++++++++++++++++++++++++++++++++++++++++
<드디어 600편 자축입니다. ^^ 2부 엔딩까지 가면 700편 채울지도.......>
2부 출판공지는 주중에 올릴 예정입니다. 공지와 함께 2부 1,2권 예약에 들어갑니다.
표지, 조판이 모두 달라지다보니 처음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손이 많이 가는군요.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