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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597화 (596/1,132)

< -- 597 회: 파트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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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있던 카렐은 누군가 다가오는 느낌에 재빨리 얼굴에 황제다운 근엄함의 가면을 덧씌워야 했다.

“솔 황빈은?”

카렐이 새 쥬스잔을 들고 다가온 니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수술이 끝나서 처소에서 쉬고 계십니다. 어깨의 인대가 끊어지셨고 쇄골과 늑골 3개가 부러졌습니다. 많이 아프셨을 텐데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찾아가 봐도 되나?”

“문병 정도는 괜찮겠지만 그 이상.......은 좋지 않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그러지는 않을 거야. 오늘 밤은 나도 혼자 자고 싶으니.”

잠시 머뭇거리던 니사가 카렐의 손에 든 빈 쥬스잔을 바꿔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혼자 계시는 것보다는 누구든 함께 있어 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지금 폐하께선......”

카렐은 문득 고개를 들어 니사의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니사는 단하에 있는 황후 아메스와 황비 네페티를 힐끔 쳐다보며 용감하게 덧붙였다.

“얼마나 힘드신지 압니다. 저도 소중한 사람을 보내 봤으니까요.......그것도 저의 잘못으로요.”

니사가 엷은 미소와 함께 카렐의 큰 손등을 살며시 짚어주었다.

잠시 대답이 없던 카렐이 애써 사무적인 표정으로 돌아갔다.

“아참, 포구에서 큰 공훈을 세운 보안국 헌병대 중랑이 한 명 있다며? 그 친구도 병원에 있나?”

“아, 사에나 쉐너 중랑 말씀이시군요. 동쪽 별관의 황립병원에 입원 치료중입니다.”

“이름이 바로 나오는군? 알고 있던 사람인가?”

순간 번득이는 카렐의 눈길에 깜짝 놀랐던 니사가 머쓱한 웃음으로 감정을 재빨리 감추었다.

“아닙니다. 낮에 회진을 나갔다가 만났는데 워낙에 인상이 강해 보여서 뇌리에 박힌 모양입니다. 온몸에 타박상과 얕은 자상, 절상을 입었지만 증세가 심하지는 않아서 2,3일 후면 내근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카렐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쉐너 가 사람이라고? 그럼 지난달에 쉐너 가에서 집안 사람들 죄다 문안인사를 왔을 때 있었을만도 한데 영 생소하군? 명색이 발현자라는 내 기억력이 고장난 게 아니라면.......”

카렐이 영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니사도 그 이상은 황제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어쨌든 혹시 모르니 143층에 데려다 놔. 내 잠깐 만나볼 테니.”

“알겠습니다.”

니사가 평소처럼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파티 분위기에 휩쓸린 다른 사람들의 흥분과는 전혀 별개의 세상에 살고 있는 듯, 그는 여전히 진지하게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카렐은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니사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자네도 수고 많았네. 명색이 파티니 잠깐이라도 놀고 좀 어울려 봐. 교단 신관도 항상 근엄함만 따지는 건 아니었다고 들었는데.”

“폐하야말로 밤을 완전히 새셨는데 파티는 적당히 마치시고 한숨 주무시지요.”

“의사의 권고는 항상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지.”

카렐은 파티장에 어색한 표정으로 막 들어선 부마 예르마크 경, 그리고 카나르 경을 비롯한 플라칼 가 사람들을 가리키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참, 세닉 가 인질들은 어떻게 되었지? 수나 마구스가 책임진다고 하지 않았었나?”

“이미 상황 완료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왔습니다.”

니사가 내민 봉투 안에 들은 건 바람 문자로 쓰인 짧은 편지글이었다. 펜으로 직접 쓴 그 글씨는 머리와 꼬리가 분명했고, 선은 어느 한 군데 흔들린 곳 없는 예리한 직선으로 힘있게 이어져 있었다.

“필체만 봐도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지. 훗, 고대어는 아니지만.......글자에 힘이 넘치는 게 보이는군. 명필 손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닌 모양이야. 가만, 그러고 보니 내 어머니도 명필이셨던가?”

“풉.”

니사가 참고 있던 웃음을 잠시나마 터뜨리며 단하에서 두겐과 무언가 대화중인 코리온을 힐끔 쳐다보았다. 언제 왔는지, 코리온과 함께 돌아온 자이납이 그의 주변에서 보이다 말다 해 가며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카렐이 카나르 경에게 보낼 친서를 쓰던 자리에서 수나 마구스 역시 세닉 가와 자신과의 관계를 밝힐지 말지를 많이 고민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어쨌든 니사가 아는 카렐은 독학으로나마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고, 연초, 라마단 기간 중에 비엔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사교에 적으나마 거부감을 드러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카렐은 세닉 가의 그 ‘비밀’에 화를 내기는커녕 입을 가리고 껄껄대고 웃음을 터뜨려 니사는 물론이고 그 침착한 수나 마구스조차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마구스 혈통들이 매력적이라더니 이제 리쿠 학장이 남자로 보이려고 해’라는 말로 두 사람을 어안이 벙벙해지게 만든 그였다.

어쨌든, 황제가 되고 난 카렐은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다 읽으실 수 있습니까?”

니사가 조금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것보다 마구스가 내게 보내는 편지를 굳이 바람 문자로 쓴 이유가 더 궁금한데?”

니사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카렐이 밝은 표정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이 슬픔을 감추려는 가면인지, 아니면 편지 내용 덕택에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려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떤 내용인지 소인이 알아도 되겠습니까.”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어차피 알게 될 것을.”

카렐은 편지를 니사에게 기꺼이 넘겨주었다. 그 안에는 오늘 저녁, 루이제 대군의 ‘시체’를 가지고 신성에 도착할 것이라는 내용과, 도착 즉시 바로 타르서스로 가겠다는 계획이 함께 담겨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반란을 일으킨 타르서스에 누구를 황제의 칙사로 보낼 것인지 알려달라는 내용이 함께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 칙사가 누가 되던, 자신이 성심껏 돕겠다는 내용도 함께.

“그대의 마구스는 정말 똑똑한 사람이야.”

카렐은 단하의 코리온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아니면 내게 원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카렐은 졸음이 몰려오는지 크게 하품을 하며 얼굴을 가다듬었다. 이번에 새로 동맹군의 일원이 된 부마 예르마크 경과 카나르 경이 옥좌에 다가오고 있었다.

“또 웃어야 될 시간이군.”

팔을 쭉 뻗어 하품을 하던 카렐의 눈꼬리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 니사가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아직 몸이 완전치 않다는 걸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늘 혼자 주무실 거라면.......”

“응?”

“소인이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대도 밤을 새지 않았나?”

“한숨 자고 나왔습니다.”

“고용주가 걱정된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지. 손님들 맞이 먼저 하고.”

카렐은 그에게 가볍게 손을 저어 보이고는 동맹군들 사이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는 조금 전의 그 둘에게 시선을 돌렸다. 황제에게서 물러나오던 니사의 입가에 간만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분께서 제타를 포기하신 것이 당신 때문이었을까요.......”

단상에서 내려온 니사는 왁자지껄한 파티장 사이를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걸었다. 황제 주치의였고, 그 역시 이번에 큰 공훈을 세운 공신 중 하나였지만 파티장의 그 누구도 그에게 건배를 원하거나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사교 신관인 그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니사는 두겐과 무언가 대화중이던 코리온을 문득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을 눈치 챈 듯, 코리온이 대번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고 두겐 역시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후훗.”

니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실 황실에 있는 사교도들은 적지 않았다. 보건국 소속 의사나 간부의 절반 이상이 사교도 혹은 교단 의학교 출신이었고, 일반 관료들 중에서도 정체를 감추고 있는 신도들이 그가 파악한 사람만 수십이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종교를 감추거나, 혹은 적당히 침묵하는 선에서 사람들의 눈총을 피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 역시 종교를 대놓고 묻지는 않는 것이 제국의 일반적인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니사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그런 ‘소극적인 타협’을 완전히 깨고 교단의 고위급 신관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당당히 드러낸 첫 번째 케이스였다. 그리고 그에게 돌아온 쓴 대가는 파티장에서조차 이렇게 외면당하는 외톨이 신세였다.

니사는 수백 년간 익숙해진 이런 따돌림 사이를 태연히 지나 자기 갈 길을 내디뎠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입가 가득 비록 묘한 비웃음을 띤 채로.

카렐은 허리를 굽히며 가슴에 손을 가져갔던 예르마크 경을 갑자기 가슴에 덥석 끌어안았다. 욱 하는 소리와 함께 카렐의 품에 조금은 거칠게 안긴 예르마크 경이 느낀 건 친밀함이나 반가움이 아닌, 그의 바위처럼 단단하고 거대한 몸과 육중한 힘이었다. 무장으로서의 본능 때문인지, 그는 순간 바싹 위축되는 스스로를 느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뒤이어 그 ‘거친 인사’를 받은 카나르 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

예르마크 경은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급한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을 바로 눈치 챈 카렐이 먼저 선수를 쳤다.

“수나 마구스에게서 조금 전 연락이 왔더군요.”

예르마크 경의 얼굴에 순간 긴장감이 스쳤다. 카렐은 수나 마구스에게서 받은 편지를 카나르 경에게 넘겨주고는 말을 이었다.

“하긴, 부마께선 못 읽겠군요. 조금 전 대군을 데리고 탄현성을 빠져나왔다는 연락입니다. 곧 우리 동맹군이 주둔중인 신성에 도착할 거요.”

그제야 모든 것에 안도한 예르마크 경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다시금 걱정거리가 떠올랐는지 카나르 경과 약간 거리를 벌리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혹시 그분께서 루이제에게 관계를 밝히셨을까요? 아니 부인이나 상지에게라도.......제가 걱정하는 건 다른 식솔들 때문이 아니고......”

“아마도 아닐 거요. 리쿠 학장 때문에라도.”

카렐이 이번에도 선수를 치자 예르마크 경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는 것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 그는 아직 단하에 있는 아들 코리온을 돌아보며 더 작아진 소리로 물었다.

“행여 저 아이가 알게 된다면.......”

“마구스 핏줄을 끊는답시고 자기 목에 칼을 들이대고도 남을 사람이니.”

카렐이 장난스레 대꾸했지만 예르마크 경은 여전히 심각했다. 카렐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마구스에겐 학장에게 따로 생각이 있는 것 같으니 그냥 놔두시구려. 일단은 부마와 이렌느 경만 알고 있도록 하시오. 레곤 고모님께서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좀 두고 봐야 하겠고.”

“알겠습니다.”

예르마크 경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새, 수나 마구스의 편지를 읽은 카나르 경이 카렐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반격은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반격보다 더 급하게 챙겨야 할 곳이 있어.”

카렐은 아랫사람들에게 모이라고 손짓을 하고는 당상 한쪽의 테이블로 향했다. 코리온에게도 오라며 손짓을 보냈던 그는 마지막으로 페로를 잠시 돌아보고는 입가를 씰룩거렸다. 무엇이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술잔을 든 채 내각 대신들 사이에서 여전히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기분 좋은 파티장에서 이런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지만.”

카렐은 테이블 위의 술잔들과 안주를 치우고 황제령 지도를 대신 펼쳐놓았다.

“타르서스의 반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의 반격계획이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카렐의 손끝이 가리킨 곳은 황제령 프라임 지역과 타르서스, ㅤㅋㅞㄹ크가 각각 만나는 속칭 ‘트라이앵글’ 지역이었다. 바로 동맹군 예비병력이 반격을 위해 집결하고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연인 샤드니를 그곳에 두고 있는 코리온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지만 지금까지처럼 그에 대한 걱정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다.

“수고하고 막 돌아온 리쿠 학장에게는 미안하지만, 학장이 직접 가서 그곳의 발칙한 토호들에게 황제의 위엄을 알려주고 오셨으면 좋겠소. 그곳만 바로잡으면.......내 대군을 이끌고 몸소 친정을 나가 적의 숨통을 마지막으로 끊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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