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00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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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태자들이 서로 아웅다웅 싸워대는 통에 뭐 하나 맡기기도 겁이 나. 솔직히 오렌 그놈이 제일 맘에는 드는데.......”
황제가 그제야 속내를 드러내며 술 한 모금을 들이켰지만 오르마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가 이렇게 우유부단하니 네 원대로 안 풀리지.’
오르마즈가 내심 비웃음을 퍼부었다. 이미 장남 오렌을 맘에 두고 있다는 황제가 아들들이 있는 자리에서 아랫사람에게 ‘셋 중 누가 제일 나은 것 같냐’고 묻는 것부터가 사실 난센스였다.
“저 셋을 수베르로 보내서 능력을 테스트해 보려고 해. 한 10년 정도 미리 정지작업을 한 다음에 수베르를 황제령에 편입시켜야겠어. 거기 정도면 아켐이나 하임달처럼 환경이 열악한 곳의 거주민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 거야.”
오르마즈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는 것을 포기한 황제는 하고 싶었던 말을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오렌 놈이 제일 잘 해서 능력을 증명해 주면 후계자로 지명하는 일이 훨씬 쉬워질 거야.”
“좋은 생각이십니다.”
오르마즈는 겉으로는 또다시 성의 없는 대답을 했지만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씹고 있었다.
‘안 되면 어쩌려고?’
황제는 이번에는 그의 무책임한 대답에도 별로 화를 내지 않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에지드와 후사인 두 놈이 손을 잡고 형의 일을 훼방놓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형은 형인데 말이야.......쌍둥이라고 안 할까봐 걸핏하면 그 두 놈이 손잡고 형을 누르려고 하니 큰일이야.”
‘네놈이 한 짓은 이미 잊었구나.’
오르마즈의 저주어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의 넋두리는 계속되었다.
“어떤가? 괜찮겠지?”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문제는 아랫사람인 소인이 감히 무어라 말씀드릴 게재가 아니옵니다.”
오르마즈는 철저하게 모르쇠로 일관하며 안 그래도 답답한 황제의 속을 바싹바싹 태웠다.
오르마즈가 계속 뒤로 빼자 황제가 잠시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의 일에 오르마즈의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고 생각한 그는 결국 주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테번 놈하고 바니샤드 그 두 놈은 왜 이리 조용한 걸까?”
“쳐들어오기라도 바라십니까.”
이번에도 냉소적인 물음에 황제가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그대가 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건 알아. 하지만.......”
황제가 막 화를 내려고 하는 찰나, 오르마즈가 비로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서툰 입을 막을 ‘필요한 말’을 꺼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둘을 싸움 붙이십시오.”
황제가 막 하려던 말을 꿀꺽 삼키며 이 ‘개국공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떻게?”
“칼릴에서 곧 광산 개발업자 선정이 있을 예정입니다. 테번 녀석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서 최초로 발견된 대규모 철광이지요.”
“그래, 나도 들은 적이 있어. 그걸 바탕으로 대규모 군수단지를 계획하고 있는 모양이더군.”
황제가 바로 아는 척을 했지만 오르마즈는 여전한 표정으로 하던 말만 이었다.
“문제라면.......테번의 지역이 비옥한 농업지대지만 변변한 지하자원은 없다보니 그런 대규모 광산을 개발할 기술력과 자본을 지닌 자체 업자가 없다는 점입니다. 어떨 수 없이 다른 지역 개발업자를 끌어들여야 하는데, 지금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건 바하칼리의 광업조합과 타르서스 광업 합자회사뿐입니다.”
“그런데?”
“바하칼리의 광업조합은 빌루이 카파키의 소유입니다. 테번이 바보가 아니니 경쟁세력에 전략시설을 맡기지는 않을 겁니다. 남는 건 타르서스의 합자회사 하나입니다. 황실에서 60%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이거 제법 돈이 되겠는걸.”
전혀 엉뚱한 쪽에서 주판을 굴린 황제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돈 생각에 빠져있는 황제에게 오르마즈는 청천벽력같은 한 마디를 던져놓았다.
“회사가 사업을 따거든 바니샤드에게 모든 지분을 팔아버리십시오. 최대한 비싼 값에.”
순간 황제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로 역정을 냈다.
“뭐? 황금알 낳는 거위를 알도 낳기 전에 남 주라고?”
“황금사과를 던져야 싸움을 붙이지요. 누가 돌을 놓고 싸우겠습니까.”
“하지만.......”
황제가 입가를 꾹 다물었다. 그다지 똑똑한 황제는 아니었지만, 오르마즈가 던져 준 힌트의 뒷내용을 어느 정도 추론해 내기는 충분했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헛갈릴 그를 위해 친절히 설명을 해 주었다.
“칼릴은 칼림의 장악지역과 바니샤드 장악지역과의 경계입니다. 철광사업 진출은 필히 다수의 인력송출과 인프라 시설 구축을 동반합니다. 칼릴 같은 저개발지역의 경우는 용병을 빙자한 무장병력도 함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니샤드는 철광사업권을 핑계로 칼릴에 진출하려 할 테고, 아차 한 테번은 계약을 파기하려 들 겁니다.”
“바니샤드가 바보가 아니니 들어 줄 리가 없지.”
황제가 의자에 기대앉으며 잘난 체를 했다.
“그런데 돈은 적당히만 받으면 됐지 왜 최대한 받아? 다시 말하지만, 바니샤드도 바보는 아니라고.”
“아뇨, 사기극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많이 받으셔야 합니다. 실제 금액은 접어두고 최소한 대외적으로 나타나는 금액만이라도 말입니다.”
오르마즈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야 황실에도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둘러댈 핑계거리가 생깁니다. 사람들이 둘을 싸움 붙이려는 황실의 계략으로 알지 않고 돈 없고 가난한 황실이 급한 나머지 바니샤드를 속여먹은 사기극으로 인식하도록 말입니다.”
“아하. 10짜리 욕을 먹지 말고 5짜리 욕을 대신 먹으라는 건가?”
황제가 다시금 앞서나가며 되물었지만 오르마즈도 이번은 고개를 젓지 않았다.
“지금은 지방세력들이 각자의 영역에 줄을 긋고 있는 중대한 시기이니 다른 지역에 진출할 ‘명분’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겁니다.”
“칼릴에 진출하려는 바니샤드하고, 지키려는 테번하고 풀리지 않을 분쟁거리를 만들어 주는 셈이군?”
황제가 턱을 고인 채 생각에 잠겼다. 이번 일은 황실 재산의 큰 부분, 심지어 미래의 큰 수입원까지 베팅해 바니샤드와 테번의 딴생각을 한동안이나마 묶으려는 정치적인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 소심한 황제가 정말로 나서 줄지 오르마즈도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답지 않은’ 짓이기에 통할 가능성은 도리어 더 높았다. 오르마즈가 이 제안을 한 것도 재정 문제로 궁지까지 몰린 황제가 결국은 뜻을 따라주리라는 기대감에서였다.
“이번 일은 자네가 직접 처리해 주겠나?”
내심 걱정이 앞선 황제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지만 오르마즈는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바니샤드는 저를 잘 알고 있으니 제가 책임자로 나선다면 바니샤드가 도리어 조심스러워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황실 재산인 만큼 황실 사람이 나서야 구색이 맞습니다.”
“그럼?”
“황실을 대표해 태자분들이 나서시는 것이 제일 모양이 좋겠지만 그 분들께는 수베르의 일이 급하니.......장녀이신 유평 옹주마마께 막후 기획을 맡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평’이라는 말에 황제의 표정이 대번 흙빛이 되었다. 말이 옹주였지 유평은 여전히 남극에서 평민과 다름없이 살고 있었고, 황제 역시 어린 시절 이후 그 ‘딸 아닌 딸’의 얼굴을 본 일은 거의 없었다.
“그 애가 도대체 왜 여기서.......”
하지만 오르마즈는 이 겁 많은 황제가 화를 내며 거절하기 전에 재빨리 속내를 감추었다.
“이 거래는 황실 재산 문제이니 싫든좋든 황실 사람이 나서야 합니다. 세 분 태자 저하께서 나서실 정도의 중대사라면 테번이 눈치 챌 가능성도 높고, 바니샤드 역시 폐하의 진심을 꿰뚫어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
“그렇다고 다른 대군이나 군 중에서 이런 일을 맡길 만큼 믿음이 가는 분도 없지 않습니까? 옹주마마께서 드물게 명민하신 것이야 이미 잘 알려져 있고 말입니다. 물론, 걱정하시는 이유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바니샤드나 테번과 직접 만나는 일은 없도록 하고, 막후 기획을 하고 이름을 파는 선에서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오르마즈는 유평이 행여 이번 일을 기화로 딴생각을 품을지도 모른다는, 황제의 당연한 걱정을 재빨리 차단했다. 의심과 걱정이 뒤섞인 황제의 시선이 잠시 오르마즈를 향했다.
‘옹주의 이름을 판다면 결국은 자네가 관여하지 않을 수 없겠지?’
황제의 기묘한 웃음이 그다지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오르마즈는 씨익 쓴웃음만을 지어보였을 뿐이었다. 황제 역시도 당장 죽이고 싶을 정도로 자신을 미워하고 있음을 오르마즈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능력 때문에 차마 그럴 수는 없는, 마치 계륵같은 존재라는 것이 걸림돌일 뿐이었다.
“옹주를 보고 맡기는 게 아니고 자넬 보고 맡기는 거야.”
황제가 확실한 선을 그었다. 그리고는 자리로 되돌아가 직접 ‘위임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글을 쓰고 있는 황제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는 오르마즈의 시선에 얼마나 잔혹한 미소가 감돌고 있는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로.
“유평은 곧 올 거예요.”
남극의 술집에 찾아온 오르마즈에게 평소처럼 바하칼리산 럼 한 잔을 내주며 유레트가 입가에 선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굳어있는 오르마즈의 얼굴을 올려보며 그도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아닙니다. 그저.......”
오르마즈는 유레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갑작스런 시선을 받은 유레트는 조금 당황한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낮은 한숨을 내쉰 유레트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어.......부탁이 있어요.”
“네?”
“혹시 좋은 남자 있으면.......소개해 주세요.”
“.......”
“유평을 위해서라도.......제가 빨리 결혼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오르마즈가 입술에 힘을 꽉 주었다. 유레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래요, 딸아이를 위해서예요. 그건 꼭 알아주세요. 그 애를 위해서.......”
유레트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오르마즈는 살며시 손을 뻗어 어느새 거칠어진 그의 손등을 짚었다. 멍하니 앉아있던 유레트는 조심스레 오르마즈에게 다가와 그의 품에 살며시 안겼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하지만 어떡해요.......제겐 너무 과분하고.......어울릴 사람은 따로 있는데.”
오르마즈는 자신의 어깨에 턱을 건 채 흐느끼는 그의 좁은 등을 말없이 어루만져 주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빈민가에서 태어나, 술집에 팔려가다시피 했던 이 여자는 행운인지 불운인지 황족을 낳는 운명의 여인이 되어야 했다.
그때, 바깥에서 들려 온 누군가의 발소리에 유레트가 급히 눈가를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술집 문이 부서지듯 확 열렸다.
“오르마즈 왔어?”
남극성당 교복 차림의 그 아가씨는 박사과정 생도를 뜻하는 금색 줄무늬 머플러를 확 벗어 술집 한쪽에 무성의하게 집어던졌다. 교복 품이 커서인지, 입은 사람의 덩치가 너무 작아서인지, 흰색 무명포는 마치 포대자루라도 뒤집어 쓴 것처럼 보였다.
“콜로니 제일의 바람둥이께서 납셨으니 한 번쯤 안겨 줄까?”
그는 자신을 향해 돌아서는 오르마즈의 품에 무작정 달려들며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는 조금 전까지 어머니 유레트가 안겨 있던 그의 옷자락에 코를 묻고는 가슴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오르마즈는 그를 안은 채 유레트를 문득 돌아보았다. 둘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유레트는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부엌 쪽으로 돌아섰다.
“얘기하고 계세요. 출출하실 테니 간식거리라도 챙겨 올게요.”
“어딜 봐.”
유평이 오르마즈의 고개를 억지로 자기 쪽으로 돌리며 키득거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높아?”
유평이 멀뚱하니 서 있는 오르마즈를 자신의 얼굴 높이에 억지로 끌어내렸다. 6척 2촌(186cm)나 되는 오르마즈는 5척 2촌(156cm)밖에 되지 않는 이 자그만 아가씨와 마주서느라 무릎을 반쯤 굽힌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이제 35살이 된 이 ‘옹주’는 보기드문 미청년이었던 친아버지 샤미르, 나름대로 평균 이상의 외모를 지닌 어머니 유레트의 핏줄이라고 보기는 최소한 외모에서는 많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매섭게 번득이는 긴 눈매와 야무지게 다문 입술은 지금까지의 ‘황족’들 중 누구보다 강인한 인상을 남기는 얼굴이었다.
“어머니 표정이 심각한 거 보니까 뭔가 중요한 일이 있나 보죠, 오르마즈?”
오르마즈와 얼굴을 바싹 들이댄 유평은 비로소 진지해진 표정을 지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완전히 돌변하는 그의 표정에 오르마즈는 순간 전율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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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 The Iron Vein [출판본] - 제1부 : 세상의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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