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03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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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이 지난 독감에 안 죽고 살아난 게 그럼 우연이라고? 우리가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나 했는 줄 아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밀리타가 앙칼지게 대꾸하며 옆으로 휙 돌아섰다.
그는 자신이 죽인 니딘투벨의 기억과 훔쳐 니사에게 ‘바친’ 치료약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내며 ‘나는 결백하다’며 자신을 세뇌시켰다.
아스탈이 이라즈의 묘를 똑바로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닥쳐, 저놈의 면역력을 계산에 산입했어도 치사율은 98.9%였어. S보인자의 치사율이 99.9%고 R보인자의 치사율도 57.0%나 되는데 그 두 인자를 모조리 가진 놈이 스스로 이겨냈다는 게 말이 되겠어?”
“그렇게 궁금하시면 니사 그년한테나 물어보시죠. 난 저놈의 주치의가 아니라고요.”
밀리타가 계속 잡아떼자 아스탈이 불쾌한 듯 입가를 씰룩거렸다.
“오르마즈 놈의 주치의로 있었을 때가 그립지?”
“당신이라는 인간은 여전히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쳐있군요. 날 그리로 보냈던 게......”
“그렇게 빈정거려 봤자 넌 내 소유물일 뿐이야.”
아스탈의 마지막 한 마디에 밀리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스탈은 공신 묘역에서 막 장례를 끝내고 해산하고 있는 동맹군측 사람들을 문득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는 기분 좋겠군.”
“......”
“투견 두 마리 중에 한 놈을 배불리 먹여줬으니 이제 기진맥진해진 다른 놈에게 밥을 줄 차례인가.”
얇고 창백한 입술에 살짝 미소를 품는 아스탈에게 밀리타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아들 묘 앞에서 웃지 마시라고요.”
“웃고 싶은 걸 어쩌겠나. 거짓말을 잘 못 하는 게 내 제일 큰 흠인데.”
아스탈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타르서스는 곧 근위대가 재장악하게 될 게야. 한 달 후면 저놈들은 여기서 연합군하고 피말리는 싸움을 또 치러야 할 게야. 이번엔.......힘들겠지.”
“이젠......”
“네 역할은 끝났으니 이젠 돌아오도록 해. 20일쯤 후에 내 적당한 이유를 붙여 청원서를 보낼 테니 바하칼리로 돌아와. 괜히 여기 남아 있다가 같이 뒈지지 말고.”
‘20일 후에 돌아오라’는 말에 밀리타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스탈이 수십의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궁을 향해 걷고 있는 황제를 먼발치에서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놈만 뒈지면 이제 S로서의 리쿠 가는 사실상 끊기는 건가? 아, 아직 좀 남긴 했군. 하지만 그것들 처리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니......”
“타르서스를 근위대가 쉽게 장악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밀리타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스탈에게 대꾸했다.
“파이가 그곳으로 갔습니다. 쉽지 않을걸요.”
비꼬는 밀리타에게 아스탈이 기다렸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잘됐군. 함께 처리하면 더 간단하지.”
“누가요? 연합군의 그 멍청이들이 파이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요? 허, 수나 마구스까지 타르서스로 간 걸 모르시나요?”
밀리타의 빈정거리는 대답에 아스탈이 가리킨 건 황실묘지의 황궁 쪽 출구였다.
“한 놈 타르서스로 보냈어. 저 새끼가 알면 눈에 쌍심지를 켤 텐데 정말 아까워. 기왕 저놈도 갔다면 더 재밌었을 텐데.”
밀리타는 눈에 힘을 주었지만 아스탈이 가리킨 곳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주머니에 스코프가 있는 것을 떠올리고는 얼른 눈에 써 보았다. 그는 그제야 출구 부근에 누가 있는지를 구분할 수 있었다.
“총리가 왜 저기서 서성대고 있죠?”
“글쎄, 내가 올 때부터 저러고 있던걸.”
아스탈이 다시 이라즈의 묘를 향해 돌아섰다. 페로는 수행원 하나 거느리지 않은 채 손에 무언가 상자 하나를 든 채 곧 황제가 지나갈 황실묘지 출구에서 불안하게 서성대고 있었다.
“황제한테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런데 저놈이 왜.......”
페로를 가리키며 한 아스탈의 말에서, 밀리타는 이번에 타르서스로 간 사람이 누군지를 바로 깨달았다. 밀리타의 휘둥그레진 눈이 여전히 싱글벙글하고 있는 아스탈을 똑바로 향했다.
“그, 그년을요?”
“그렇게 오랫동안 보호해 줬으니 이제 밥값을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아스탈은 밀리타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묘지 출구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밀리타가 허겁지겁 그를 따라가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시는 건가요? 그년은 안된다고요. 그년은 반쯤 미친......”
“내가 그년을 왜 좋아하는지 아나?”
아스탈이 밀리타의 팔을 덥석 잡으며 하얀 이를 살짝 드러냈다.
“그년의 야수같은 면을 좋아하는 거야. 생긴 것부터가 꼭 하이에나 같지 않나?”
밀리타가 입술에 힘을 꽉 주며 조심스레 대꾸했다.
“그래서, 그년이 야수처럼 파이를 죽이면 어쩌시려고요? 수나 마구스가 퍽이나 좋아하겠군요.”
“내 지금 말하지 않았던가? 야수같은 면을 좋아한다고.”
아스탈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마구스든, 지 상관이든 누구든 걸리는 놈은 무조건 죽여버릴 수 있는 결단력 말이야. 황실과 손잡았다는 말 한 마디에 100년 넘게 충성을 바쳐 온 제수스의 대가리를 서슴없이 짓뭉갰을 때처럼. 그게 코나 시디크 년의 매력이지.”
파랗게 질린 밀리타에게 아스탈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투모카프 그 새끼가 부모 원수 갚겠다고 수십 년을 쫓아다녔어도 꼬랑지도 제대로 못 밟았으니 능력 하나는 확실한 거 아닌가? 도리어 그 빌어먹을 원수 덕택에 함정에 말려들어 뒈지기까지 했으니 좀 불쌍하긴 해. 저 손자놈도 그럴는지 궁금한데.”
당황한 밀리타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고는 아스탈에게 설득하듯 말했다.
“설마 수나 마구스까지.......”
“그쯤이면 살 만큼 살았지. 내 확신하지만 그년도 코나 시디크는 맘대로 조종하지 못할걸.”
아스탈에게 무언가 계속 따져 물으려던 밀리타는 교대를 위해 지나가는 한 무리의 경비병들에 깜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아스탈은 당혹감에 떨고 있는 그를 돌아보며 여전한 표정으로 짧게 말했다.
“잊지 마라. 20일 후에 연락줄 테니까 잔말 말고 돌아와. 행여라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어찌될지는 네가 더 잘 알 테지?”
아스탈은 밀리타의 왼쪽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었다.
“명심해라, 델타. 넌 나 아스탈, 아니 람다의 여자라는 걸.”
태연하게 돌아서서 멀어져가는 아스탈의 뒷모습을 보며, 밀리타가 자리에서 부르르 떨었다.
“20일......”
밀리타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타르서스.......타르서스가 넘어가면 끝인가.......”
그는 수행원들과 걷고 있는 황제를 다시금 돌아보았다.
“날 다시 불러들이겠다고? 내 운명을 짓밟은 게 누군데.”
밀리타가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그때, 그의 눈에 막 들어온 건 아직까지 황실묘지 앞에서 서성대고 있는 페로의 모습이었다. 손에 든 상자와, 출구로 다가오는 황제의 모습을 몇 번이나 번갈아 쳐다보던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숨을 내쉬며 황궁을 향해 다시 돌아서고 있었다.
“댁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스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밀리타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내 운명을 누가 찾아주겠어.......내가 해야지.”
밀리타는 급히 표정을 정리하고 페로를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제롬의 장모이기도 한 아리아노 라자루스 법무대신의 심정은 이래저래 복잡했다. 황성을 공격하던 연합군 대군은 탄현성까지 퇴각했고, 사위 제롬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황제인 수우, 그리고 그가 총애하던 황비 구르베스는 언젠가부터 공식 석상에서 자취를 감춘 후였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잇따라 벌어지면서 사람들의 이런저런 억측이 오갔지만 명색이 법무대신이고, 신임 총리대신으로 유력시되는 그조차 막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베흔과의 유별난 친분을 자랑하던 그인지라 베흔만 있었다면 어떻게 살살 구슬려서 상황파악을 했겠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고, 사오시안트에 남은 보안국장 쿠베 녀석과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그는 반쯤 본 서류를 구석에 동댕이치고는 차창 밖으로 머리를 쑥 내밀었다. 몇 시간이나 이어져 온 지긋지긋한 타르서스 사막의 밤 풍경은 마치 배경 그림처럼 지금도 똑같았다.
“도대체 언제 도착해?”
아리아노의 신경질섞인 물음에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쿠베가 얼른 시계를 보았다.
“거의 왔습니다.”
“아까도 똑같은 대답이었어.”
“시간감각이 무뎌지셔서 그런 겁니다. 조금 전 물어보신지 8분밖에 안 지났거든요.”
아리아노는 조금 전 내던진 서류를 다시 집어들며 엄한 차에 불만을 터뜨렸다.
“도대체, 셔틀로 30분이면 갈 거리를 이게 도대체 몇 시간째냐고.”
“우리만 이런 게 아니고 적들 역시 이렇게 움직여야 할 걸 생각하면 그럭저럭 위로는 되지요. 그 빌어먹을 ‘격벽식 방어체계’가 죄지 차가 죄겠습니까.”
이번에도 쿠베의 능숙한 대답에 아리아노도 짜증스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수에니 반도에서 출발한 것이 한낮이었으니 거의 반나절을 차 안에서 똑같은 광경만 지켜본 셈이었다.
그렇다고 차를 세워놓고 바람을 쐴 만큼 바깥공기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정수리가 익을 만큼 뜨거운 한낮은 물론이고 자정이 가까운 지금까지도 바깥공기보다는 냉방이 되는 차 안의 시원한 공기가 훨씬 나았다.
서류 한 장을 넘긴 아리아노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파일을 덮어버렸다. 그곳에는 ‘배신자들’의 처리방안에 대한 법무대신의 공식적인 협조를 요구하는 근위대의 질의서가 들어 있었다.
그는 법무대신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중앙 상급귀족 라자루스 가의 종장이기도 했다. 그렇다보니 사실 그는 지금 난처한 결정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릴라크 그 망할 년 같으니. 이모 낯짝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그는 머리를 싸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카렐 편에 붙어버린 릴라크는 예리노프 가로 시집간 그의 동생이 낳은 조카였다. 그리고 그가 운명을 결정해야 할 대상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오늘 아침만 해도 ‘걔가 틀림없이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거다’라며 울고불고 사정하는 동생을 달래주느라 진땀을 빼야만 했다.
비록 동생 앞에서는 ‘힘을 써 줄 테니 염려마라’고 말했지만 릴라크를 구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힘없이 돌아가던 동생이 ‘차라리 우리가 구명받는 편이 낫겠어.’라고 혼자 중얼거린 건 일단 못 들은 척 하긴 했지만.
게다가 이번에는 그의 장녀 오르테가 인질인 레곤 대공주를 놓치면서 상황은 더더욱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타르서스의 호족들을 설득하는 이번 임무에 그가, 아니 연합군 전체가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했다.
“한심한 년, 제롬 그 새끼한데 시집보낸 게 도대체 잘 한 일이었는지......”
아리아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며칠 전에는 ‘식충 뚱땡이년’ 때문에 예쁜 코가 부서졌다며 울고짜는 딸을 달래주느라 또 애를 먹었던 그였다.
“빌어먹을 타르서스 고집덩어리들을 도대체 어떻게 달래야 하려나.”
아리아노는 사오시안트에서 가져온 ‘협상 조건’들을 다시금 살피며 마지막으로 맘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아크반 가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 그네들을 이용할 수밖에. 우리가 직접 나서서 속 썩을 필요는 없겠지.”
“지금쯤 아크반 가 수장놈은 우릴 기다리면서 똥줄이 바싹바싹 타고 있겠지요.”
쿠베가 마찬가지로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의 ‘만남’이 있을 사막의 캠프 불빛이 멀리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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