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605화 (604/1,132)

< -- 605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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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선택은 그대들의 몫이네.”

아리아노가 두 팔을 벌려보였다.

“이전같은 호족으로서의 권리를 지키겠나? 아니면, 초강경 머저리 유학자놈 손에 집단 매장당하겠는가? 그놈이 탈라스에서 무슨 짓을 해 놓았는지 내 구차하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은데.”

호족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코리온이 탈라스에서 원주민 여자들을 납치하고 집단강간한 비적떼와 노략질과 아동 매매를 한 포로들을 얼마나 확실하게 응징했는지는 이미 황제령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궁형, 그나마 몸을 지지는 가중형까지 처해진 채로 사막에 버려진 200여명은 결국 그곳에서 한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숨이 끊어져 짐승도 먹지 않는 사막 쓰레기가 되었고, 포로들은 모조리 광산 노예가 되어 북부로 팔려가고 말았다.

물론 호족들은 그들과는 경우가 달랐지만 맘먹으면 끝장을 보는 코리온의 성격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아리아노에게 협조한다면, 딱히 더 얻는 것은 없다손 치더라도 최소한 지금까지처럼 단순무식한 타르서스인들에게서 유지로 떠받들어지며 어깨 펴고 살 수는 있을 터였다.

“그쪽에서 필요한 정보만 제공해 주신다면.......”

아들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힌 자블리스가 이를 갈며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나머지 가문들도 다 끌어들이지 않으면 일이 어려워질 텐데?”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자블리스가 냉큼 나섰다. 그가 앞장서자 나머지 호족들은 짐짓 어쩔 수 없는 척 가만히 있는 선에서 소극적인 동의를 나타냈다. 아리아노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달콤한 사과차 마지막 한 모금을 입에 넣었다.

“좋아, 그럼 내가 여기 머무르면서 중개 역할을 하지. 그대들의 거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기는 근위대 병영이 될 게야.”

아리아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 허름한 천막을 나섰다. 바깥에는 그와 함께 도착한 20여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이 바쁘게 짐을 부리고 있었다. 아리아노는 은하수가 보이는 맑은 하늘을 올려보며 씨익 웃었다.

“뭐, 있어보니 여기도 아주 나쁜 곳도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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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94년 무렵, 콜로니 각지의 분리독립을 막기 위한 세나우스 1세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유평을 내세워 남-서부를 분열시키려는 계획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수에니를 황제령에 병합해 재정을 확충하려는 그의 노력도 나름대로 가시화되고 있었다.

그 해의 봄, 제국 변방인 아라무트의 정글은 베흔이 이곳에 칩거했던 오르마즈를 처음 찾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후텁지근하고 불쾌한 기운이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방문객’은 그때의 그 성질급한 가디언들처럼 대놓고 불평을 해 대거나 짜증을 내지도 않은 채 묵묵히 길을 걷고만 있었다.

한낮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그는 고개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말 한 마디, 다른 움직임 하나 보이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망토와 구부정한 자세 때문에 얼굴도, 체형도, 심지어 키도 바깥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특별히 고급스럽게 차려입은 것도 아니었고, 오다가 소나기라도 만났었는지 진흙이 엉겨붙은 낡은 신발에도 특별할 것은 없어보였다.

그가 걷는 길 한쪽의 논에서 일을 하던 농부들이 이 정체불명의 사람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지만 길지는 않았다. 그들은 무슨 특별한 ‘규칙’이라도 있는 듯, 그 사람에게서 의도적으로 시선을 외면하고는 자기 하던 일에 다시 집중하는 척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그가 멈춰 서며 올려본 곳은 짙은 녹색의 정글 사이로 비죽 튀어올라 있는 바위산이었다. 마치 거대한 석순을 누군가 꼭대기만 칼로 싹둑 잘라낸 듯, 가파른 절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그 산의 꼭대기는 밑에서 보기에는 제법 평평해 보였지만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는 아래에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산의 아랫자락에는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다. 50여 가구가 삼직한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지만 웬만큼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곳에 뛰노는 아이들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과, 마치 유령도시 같은 묘한 정적에 싸여 있는 것을 눈치채는 것은 금방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곳은 외지인들이 반경 500스타디아(75km) 이내에서 처음 만날 수 있는 사람의 거주지였다.

“보아하니 영감님 찾아가시는 모양이군.”

마을 입구 샘에서 물 한 모금을 떠 마시던 그 사람은 오랜만에 들려 온 사람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돌렸지만 얼굴은 망토의 그늘에 가려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말을 꺼낸 건 마을 입구, 정자에 앉아 있던 쭈글쭈글한 얼굴의 마을 촌로였고, 그 주변에도 대여섯명의 노인들이 모여 마황이니 대마초를 피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으려나?”

“저렇게 몽땅 감춘 사람치고 무사히 돌아오는 건 못 봤어. 난 못 온다는 데 3골드.”

“글쎄, 또 모르지, 난 온다는 데 걸어 볼까나?”

촌로들의 말장난을 뒤로하고, 그 사람은 다시 마을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이 을씨년스런 마을에는 아이도, 젊은이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고 , 집 한쪽에서 멍한 얼굴로 담배니 대마초를 피고 있는 건 수명개조 이전 세대의 구부정한 노인들 뿐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논밭에 일을 나갔다고 해도 마을이 이렇게까지 텅텅 빈 건 어딘지 어색한 풍경이었다.

어쨌든 그 의심스런 마을을 태연하게 가로질러 지나간 그 사람은 조금 전 올려보았던 그 바위산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구불구불 이어진 그 가파른 바위 사이로 난 길은 어지간한 담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히 발을 디디기도 두려워 보일 정도였지만 그 사람은 마치 평지를 걷듯 지금까지처럼 구부정한 자세 그대로 계속 걸었다. 그리고 그가 올라가는 동안, 단 한 명의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다.

거의 1시간을 걸려 꼭대기에 오르는 동안,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쉬지도, 머뭇거리거나 숨을 헐떡인 일도 없었다. 그리고 꼭대기에 올랐을 때도 천천히 고개를 치며들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말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구부정하던 어깨를 비로소 펴면서, 6척이 훨씬 넘는 큰 키가 여전히 뜨거운 햇빛 아래 드러났다.

이 바위산 꼭대기에 있는 건 마치 누군가의 궁전 같아 보이는 거대한 요새였다. 야트막하고 긴 담이 주변을 완전히 둘러싸고 있는 덕분에 안쪽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담에 화려하게 장식된 코발트빛 화려한 타일만으로도 이곳 주인이 얼마나 대단한 세력가인지, 그리고 덧붙여 호사스럽고 고상한 취향까지 갖춘 사람임을 한눈에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요새의 화려함에 어울리지 않게, 입구에는 무장을 갖춘 경비병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영감님 만나러 오셨나?”

조금 전, 마을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 앞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마초에 취해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노인의 힘없는 목소리가 아닌, 젊은 사람의 위협적이고 또렷한 음성이었다. 마치 수도승처럼 푸른 로브를 몸에 걸친 2명의 청년이 요새 입구에서 이 정체불명의 손님을 응시하고 있었다.

망토 차림의 사람은 입을 열지 않은 채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그에게 자루를 든 명의 청년이 다가와 갑자기 씽긋 웃음을 지었다.

정신을 잃었던 ‘손님’이 다시 눈을 뜬 곳은 작은 인공연못과 분수대가 있는 회랑이었다. 그는 왔을 때 차림새 그대로, 연못 옆의 고급스런 등나무 비치베드 위에 얇은 비단 한 장을 가슴에 덮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에는 뜨거운 햇빛을 막기 위한 작은 차양막까지 쳐 있었다.

주변에는 반나체 차림의 미녀들과 아름다운 소년들 십여 명이 이 손님을 가리키며 저희들끼리 쑥덕대고 있었지만 대놓고 접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원자와 고객도 구분 못하는 한심한 노인네들 때문에 괜히 미인들만 기다리다가 김샐 뻔했어. 마을 노인네들도 약을 너무 했나 갈수록 흐리멍텅해지는 것 같아.”

회랑 반대편에서 웬 구부정한 노인 한 명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하얗게 눈이 내린 머리에는 섬세하게 만들어진 금제 서클렛이, 흰 비단 로브에는 이곳의 담 색깔처럼 아름다운 코발트색 자수가 놓여 한눈에도 이곳의 ‘주인’임을 알아볼 수 있는 차림새였다.

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인상에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걸음새 때문인지 언뜻 보기에 대단한 위엄 따위가 느껴지는 모습은 아니었다.

“지원자는 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조건 미인들의 접대를 받아야 하지만, 고객들은 원하는 경우에만 접대를 해 주거든. 물론, 그대를 접대하고 싶어서 반쯤 미친 연놈들은 보다시피 충분해.”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고는 반쯤 금으로 때워놓은 앞니를 살짝 드러내고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손님’은 노인을 말없이 응시만 할 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상대의 시선에 태연하게 맞받아치던 그 노인은 잠시 후, 연못가의 미인들에게 손을 저었다.

“꺼져.”

노인의 손짓에 십여 명의 미남미녀들이 허둥지둥 자리를 비웠다.

따스한 오후의 햇볕이 내려쬐는 이 화려한 회랑에는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검은 옷 차림의 손님, 그리고 노인만이 남아 있었다.

“내 목표였던 사람이 다음날 고객이 되어 찾아오는 건 사실 아주 흔한 일이야.”

‘영감’이 키득거리고 웃으며 비치베드 옆 조그만 의자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그 ‘손님’의 비치베드 옆 테이블에 붉은빛 과실주 한 잔을 놓아주었다. 연륜이 고스란히 묻어난 주름살, 언뜻 보기에 보통의 시골 노인과 같은 평범하고 후덕해 보이는 눈빛은 그 속에 감추어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밀들을 완벽하게 위장하고 있었다.

‘영감’이 손님에게 잔을 손수 권하며 마치 친구처럼 말을 이었다.

“그것도 내가 옛날에 포기한 건수라면 내가 굳이 예민해질 필요도 없지. 그렇게 공을 들이고도 실패한 건 자존심이 상하지만 나도 수십이나 되는 비싼 지원자들을 날렸으니 본전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거든.”

영감은 최대한 고상하게 먹어도 부족할 그 예쁜 과실주를 품위없이 홀짝대고 들이키기 시작했다. 반면 그의 앞, ‘손님’은 이런 비치베드가 아주 익숙한 듯 옆으로 돌아누워 한 팔로 몸을 비스듬히 세우고 아주 우아하게 잔을 입에 가져갔다.

노인이 그런 그를 쳐다보며 또다시 이를 드러냈다.

“물론, 내가 원했다면 그 많은 지원자들에 들인 돈의 만 분의 일도 안 되는 돈으로 지금 해결할 수도 있겠지.”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의 말에 지레 놀라며 이 위험천만한 잔을 내던졌겠지만 그 ‘손님’은 별다른 반응조차 없이 잔을 훌쩍 비우고 옆에 내려놓았다. ‘영감’이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빈 잔에 새 술을 부어주었다.

“내 궁전에 찾아온 고객은 안 건드리는 게 내 사업 철칙이니. 뭐, 외부에서야 ‘암살교단’이라고 부르기야 한다지만 변변한 교리도 없는 게 교단은 빌어먹을 교단. 뭐, ‘침묵의 자매들’ 교단이 우리 아라무트 암살단을 13번째 교단으로 안 받아줬어도 나로서는 섭할 건 하나도 없었어. 어차피......”

수다스러울만큼 계속 떠드는 ‘영감’의 입을 순식간에 막은 건 그 ‘손님’이 탁자에 내려놓은 작은 보라색 주머니였다.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영감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돌았다.

“훗, 눈에 익은 물건이군. 이걸 가져왔을 정도면.......”

“3명. 가능하겠지?”

두 번째 잔까지 비운 ‘손님’이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여자의 목소리였지만 원래부터 곱지 않은 음성에 거칠고 억양이 센 코윈 사투리까지 섞인 덕분에 듣기 좋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금액에 3명이라.......누군지는 물을 필요도 없겠군.”

영감이 또다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는 한다 안 한다 대답 대신, 손님이 내민 주머니를 그대로 품에 챙겼다.

손님이 비치베드에 편안하게 드러누우며 짧게 조언했다.

“모두 곧 수에니에 갈 거다. 한때 동종업자로서 충고하지. 비밀스런 암살보다는 우발적인 사고로 위장하는 게 나을 거다.”

‘영감’의 유순하던 눈동자에 짧게나마 매서운 불꽃이 스쳤다.

“요구조건? 아니면 그냥 충고?”

“요구조건으로 해 두지. 지금 생각해 보니 그쪽도 전문가로 자존심이 있을 테니 충고는 적합지 않군.”

“마구스들도 처리했던 우리가 고작 태자들 셋 정도야.......”

다시 온화한 노인의 인상으로 돌아간 ‘영감’이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뒤돌아서려던 그는 비치베드에 누워 있는 이 ‘손님’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천하의 바람둥이께서 정말로 접대에 생각 없는 건가? 나보다 저것들이 더 원할 텐데?”

“얘기 끝냈으니 기꺼이.”

영감은 회랑 한쪽에서 여전히 얼굴을 내밀고 있던 조금 전 미남미녀들에게 손짓을 보내고는 왔던 곳으로 다시 멀어져갔다. 그리고는 다시 연못가로 모여드는 그들 십여 명에게 엄한 표정을 지으며 명령했다.

“특별한 손님이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놈은 절벽에 세울 테니 각오해라.”

그들 중 제일 먼저 다가온 한 미소년이 이 ‘손님’의 가슴 위에 몸을 기대며 그의 검은 후드를 조심스레 벗겨냈다. 아직 뜨거운 오후의 햇빛 아래, 그의 회색빛 눈동자는 마치 소나기 뒤 무지개 같은 오팔 광택을 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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