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606화 (605/1,132)

< -- 606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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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궁이 있는 타르서스의 수도 마잔다란 시는 그 거대한 대륙의 중심지답게 최소한 규모에서는 황도 아케메니아에 못지않게 넓은 오아시스 도시였다.

마잔다란의 오아시스는 30만여 마잔다란 시민들은 물론이고 그 일대 과수농업을 책임지는 최대의 수원(水源)인 만큼 직경만 50스타디아(7.5km)에 달했다. 그리고 오아시스를 빙 둘러 구(舊)시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오아시스를 내려다보는 북쪽의 작은 언덕에는 타르서스의 별궁과 정부 관료, 상류층들이 거주하는 신(新)시가와 타르서스 콜로니 아카데미가 있었다.

규모만으로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도시였지만 타르서스의 수입원이래야 과수농업, 보석과 천연광물, 수공예품과 직물산업이 산업이 고작이다보니 언뜻 보이는 풍경은 딱히 풍요롭거나 현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구시가에는 차보다는 당나귀와 마차가 몇 배는 많았고, 3,4층짜리 오래된 흙벽돌집들에 양쪽이 꽉 막힌 거미줄같은 골목은 하늘에서 나풀거리는 빨래들 때문에 가뜩이나 좁은 길이 더 답답해 보였다.

그런 골목 구석구석에는 청소년들, 한참 일해야 할 청년들이 할일없이 앉아 잡담을 하며 소일하는 모습을 유난히 자주 볼 수 있었다. 인구에 비해 경제규모도 작고, 교육수준도 낮고, 일자리도 적다보니 이곳의 젊은이들 절반 이상은 농번기에나 일하는 반 실업자 신세이거나 가족, 친척에 기대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 중 질이 나쁜 자들이 지나가는 이방인들에게 괜한 시비를 걸거나 가벼운 패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겉에서 보이는 비호의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딱히 큰 중범죄가 잦은 험악한 지역은 아니었다.

타르서스인들이 유독 거칠고 외부인들을 꺼리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그들의 평판이 이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모든 건 ‘호족정치’에서 온 어쩔 수 없는 폐쇄성에 문맹률이 절반이 넘는 낮은 교육수준과 의식 때문이었다. 호족들 중 누구도 평민들이 ‘깨이는 것’을 원치 않았고, 심지어 자신들의 지역에 학교를 짓는 것조차 불허하는 경우가 많았다.

타르서스 망명정부 시절, 세나우스 2세가 이곳에 수백 개의 학교를 짓고 타르서스인들의 개화에 힘쓴 일도 있었지만 그나마도 아케메니아로 황실이 돌아간 이후 모조리 호족들의 개인 부동산으로 편입되고 학교는 폐쇄되어 버렸다.

그렇다보니 타르서스의 청년들 사이에서 그나마 ‘안정되고 좋은 직장’이라고 꼽히는 직할군 병사 선발에서도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 정도만으로도 당락이 결정될 정도였다.

실제 타르서스의 많지 않은 평민 출신 인텔리들, 혹은 나름대로 외부 문물을 많이 접한 상인 계층은 이 지역이 하루빨리 구태정치에서 벗어나 황실의 관료 통치에 적극적으로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호족들의 계속된 견제와 그들의 배후 지원을 받는 폭력조직, 독립운동을 빙자한 테러조직들이 이런 선각자들을 그대로 놔주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이 연 자선학교는 채 5년을 버티기가 어려웠고, 황실에 조금이라도 발을 들여놓으려는 사람들은 ‘생전 있어 본 일도 없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해괴한 논리로 매도당하기 일쑤였다.

코리온을 따라 오랜만에 고향의 공기 내음을 맡은 우베 역시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물론 그 덕택에 고향에서 쫓겨나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기도 했었지만.

“우와, 이거 딱 우리 동네 분위기네.”

구시가 시장을 통과하는 차 안에서 자이납이 마치 어린애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는 도로변 노점상에서 산 노란 망고를 우물거리며 타르서스의 시장을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별히 세련된 맛이나 화려함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유달리 억센 타르서스인들의 왁자지껄함과 수수함이 배어나는 활기찬 공간이었다.

“여기 골목에 이런 차는 안 맞는데 왜 하필......”

우베가 운동장처럼 넓은 차 안을 두리번거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카렐이 내어 준 12인승의 이 대형 고급승용차는 외부인에게 적대적인 이곳에서 ‘나 다른 데서 온 귀빈이요.’하고 광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북적거리는 마잔다란의 좁은 시장통 골목에 끌고다닐 만한 차도 더더욱 아니었다.

물론 우베가 이렇게 투덜거리는 건 실내가 워낙 넓다보니 자이납에게 바싹 앉아 치근덕거릴 여지가 없다는 숨은 이유가 또 있었지만.

“근데 여기서 보석장사 했었다면서요?”

자이납이 우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자경단 개새끼들한테 상점이 작살나기 전까지는.”

우베가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자경단이요?”

자이납이 입에 묻은 망고즙을 옷소매로 닦아내며 물었다.

“말이 자경단이지 호족들 수하이기는 매한가지야. 그래도 마잔다란은 지방장관도 와 있고 외지인도 많이 들락거려서 좀 나은 편인데 웬만한 소도시만 가도 그네들이 완전히 실세니까.”

우베가 옛날 생각이 난 듯 차창을 열고 시가지를 죽 둘러보았다.

“그럼 여기는 호족이 없는 거예요?”

자이납의 물음에 우베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 마잔다란은 호족들 공동구역이라는 것만 달라. 10개 호족가문들이 구시가를 각자 구역으로 나눠서 통치하고 있어. 자기네끼리 눈치도 봐야 하고, 신시가에 있는 지방장관 눈치도 봐야 하고 하니 좀 난봉질이 덜한 것뿐이지.”

“시장 구역이 아크반 가의 것이더냐.”

뒷자리에서 들려온 고운 음성의 짧은 물음에 자이납의 표정이 환해졌고 우베의 어깨는 긴장감에 움츠러들었다.

“구시가의 보석거래소와 시장구역 절반이 아크반 가의 것입니다. 청과시장, 도살장, 낙타시장 등등이 포함되어 있죠.”

우베의 대답에 뒷자리의 코리온은 가타부타 대답도 않은 채 파일만을 살폈다.

“이런.”

줄줄이 길을 가로지르고 있는 염소떼에 놀란 카토가 급히 차를 정지시켰다. 행렬의 길이, 그리고 뒤따라오는 인파의 물결을 보아 차가 제대로 지나가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듯 보였다.

“다른 길로 가야겠습니다.”

차를 막 후진시키려던 카토는 차 뒤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흰 베일 차림의 한 사람을 발견했다. 베일 속에서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지만 카토는 아랑곳없이 차를 바로 후진시켰다.

“으엑!”

쿵 하고 차를 울리는 충격에 깜짝 놀란 자이납이 차창 밖으로 몸을 쑥 내밀었다. 코리온 역시 보고 있던 파일을 내려놓으며 뒷 유리를 돌아보았다.

“뭐냐?”

“나오지 말고 안에서 기다리십시오.”

카토가 짐짓 놀란 표정으로 차에서 급히 뛰어내렸다. 사실 황제가 시킨대로 하기는 했지만 그의 생각에도 너무 세게 받은 것 같은 생각에 눈앞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워낙에 큰 대형승용차다 보니 이런 차에 받혔다면 아무리 따져보아도 몇 군데 부러졌거나 운이 없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맙소사.”

카토가 이마를 짚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그의 걱정대로, 흙투성이가 되어버린 한 여자가 차 뒤쪽에 쓰러져 있었다. 게다가 그의 가디언으로서의 감각에 느껴지는 생명 반응도 전혀 없었다. 행여 잘못되지나 않았는지 여자의 목을 급히 짚어보려던 카토는 그가 눈을 번쩍 뜨자 지레 놀라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으읍.”

“오랜만이다. 가디언 카토. 내 짐은 잊지 말게.”

여전히 맑고 번득이는 눈을 크게 뜬 수나 마구스는 작은 목소리로 짧게 인사말을 건네고는 다시 눈을 감으며 마치 침대에 눕듯 바닥에 편안하게 드러누워 버렸다.

“세, 세상에......”

주저앉아 있던 카토는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 상태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겉보기로는 수나 마구스는 어디 한 군데 다친 곳도 없이 멀쩡했다.

“도대체 어찌 되었느냐!”

카토는 차에서 내리려는 코리온을 급히 가로막으며 문을 다시 닫았다. 사방에서 구경꾼들이 몰려들면서 부근이 북적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으니 염려 마십시오.”

코리온을 일단 저지한 카토는 쓰러져 있던 수나 마구스를 번쩍 안아들고 우베의 옆에 앉혔다. 그리고는 그가 주의를 준 대로, 유난히 큰 그의 가방도 함께 싣고 허겁지겁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뭐 하는 짓이냐? 척추라도 다치면 어쩌라고 그렇게 마음대로 환자를 안고 옮기는 거냐!”

의사이기도 한 코리온의 호통에 카토가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타르서스 별궁의 부속병원이 이 일대에서는 제일 시설이 좋으니 그리로 모셔야겠습니다. 이 길은 말고 돌아서 가겠습니다.”

카토가 조금은 험하게 차를 빼서 골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얼떨결에 수나 마구스의 옆자리를 차지하게 된 우베가 차의 유리문에 기대 흐느적거리고 있는 이 ‘피해자’의 베일에 살짝 손을 가져갔다.

“우와.”

비록 반쪽의 얼굴밖에 보지 못했지만, 여자의 ‘미모’에 유난히 예민한 우베의 가슴을 뒤흔들기는 충분했다. 그는 옆에 있는 자이납에게 ‘쥑인다’며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어보였다. 환자를 옆에 두고 엉뚱한 데 정신이 팔린 그의 모습에 뒷자리의 코리온과 하심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어디든 최대한 빨리 가기나 해라. 내 직접 확인할 테니 움직일 수 있는 상태라면 여기 뒷자리로.......”

“걱정 마십시오. 늑골과 왼쪽 요골이 부러진 것 같지만 호흡에 무리가 없는 것을 보니 심각한 상태는 아닙니다.”

수나 마구스의 흙 묻은 어깨를 짚으려 했던 코리온이 움찔하며 손을 떼었다. 느닷없이 말을 하는 이 ‘피해자’에게 놀란 건 바로 옆에 있던 우베, 코리온 옆에 있던 하심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지간해서는 잘 놀라지 않던 코리온이었지만 이번만은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수나 마구스는 오른손으로 더듬더듬 명함을 꺼내 뒷자리의 코리온에게 넘겼다.

“병리학자 페이 코다 박사입니다. 제 몸 정도는 알 수 있으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코리온이 급히 표정을 가다듬으며 상석에 다시 넓게 어깨를 펴고 앉았다.

“아랫사람의 잘못이 곧 내 잘못이요. 내 일체의 병원비를 부담하고 해당 기간의 일실손해와 위로금을 기꺼이 지급할 것이니 잘못을 용서해 주시오.”

수나 마구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카토가 거칠게 모는 차는 시장통을 빠져나와 신시가의 고급주택 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황족이신 코리온 리쿠 대군이신 줄로 압니다. 원리주의 거두이신 분께서 설마 허튼 말씀은 하지 않으실 줄로 알겠습니다.”

“내 얼굴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소.”

코리온이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타르서스의 이런 정세에서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는 상황이 썩 유쾌한 것만도 아니었다. 혹시라도 무슨 음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코리온이 눈가에 힘을 주며 흰 베일 너머 상대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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