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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607화 (606/1,132)

< -- 607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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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두 번째로 당황한 코리온은 명함을 든 채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누가 보기에도 상대를 겁먹게 만드는 그 자신의 위압적인 눈빛과는 달리, 수나 마구스의 표정은 평온하기까지 했지만 무슨 이유엔지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텅 빈 물속을 의미없이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에 코리온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그 물 표면의 작은 울렁임처럼 엷은 눈웃음이 스쳤다.

내심 당혹스러워진 코리온이 무조건 먼저 입을 열었다.

“수명개조 당대 같으니 근골계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겠소. 평소 몸 관리를 잘한 듯 보이나 혹시 모르니 가면 정밀검사를 해 보도록 하시오.”

“눈이 빠르시군요.”

수나 마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수명개조 당대’라는 말에 제일 놀란 건 우베였다. 그는 또다시 쓸데없는 관심을 보이며 수나 마구스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맙소사, 수명개조 당대세요? 전혀 그렇게는.......”

수나 마구스는 우베의 쓰잘데기없는 관심을 무시하며 코리온에게 계속 말을 건넸다.

“어떻게 알아보셨는지 알아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얼굴까지 가리고 있는데.”

“신체균형도 좋아 보이고, 피부는 관리를 잘 한 듯 보이나 목 부근에만 주름이 약간 있군. 광노화가 쉽게 일어나는 곳도 아니고, 유전적인 소인도 없는 것 같으니 자연적인 노화밖에는 더 있겠소.”

“역시 대단하십니다. 보통 잘 알아보지들 못하는데, 이렇게 정확히 집어내시니 지금까지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던 사람으로서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저 역시도 스스로에게 그다지 객관적이지는 않으니 혹시 제 외모에서 따로 신경 쓸 곳이 있는지, 그리고 제게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수나 마구스가 베일을 살짝 치우고 코리온에게 얼굴을 모두 내보였다. 물론 그의 시선은 보통 사람들이 모두 피하는 코리온의 눈동자에 정확히 멎어 있었다. 코리온은 그의 시선이 도발적인 것인지, 아니면 그저 생각없이 쳐다보는 것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의 입술은 수나 마구스가 물어본 질문에 착할 정도로 성실하게 대답해주고 있었다.

“수명개조 당시 30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 되었겠군. 골격이 크고 당당하니 무인이 되었다면 대성했겠으나 손을 보니 무기를 잡은 일은 없던 것 같고, 임상에서 환자를 돌보는 의사도 아닌 것 같군. 평소 몸관리를 잘 하였는지 신체의 비례와 근육의 발달 상태가 이상적이고. 피부색은 진한 편이지만 자외선에 장기간 노출된 것 같지는 않은 것을 보아 이곳 마잔다란에 온지는 오래되지 않은 것 같소.”

“정확하시군요.”

수나 마구스가 냉큼 맞장구를 쳐 주었다.

평소 말수도 적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던 코리온이 이 낯선 사람의 물음에 마치 모범생이 보고서라도 쓰듯 신이 나서 줄줄이 대답을 읊어대는 모습에 하심이 기가 막힌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코리온이 계속 말을 이었다.

“복장은 화려함과 거리가 머나 고급이며 위엄이 있고, 또한 혼자 차려입기는 번거로운 차림새인데, 화장은 하지 않았고, 그 모두를 스스로 챙길 꼼꼼한 성격도 아닌 것 같으니 짐작컨대 몸종 혹은 하인이 따로 있을 것이요.”

“저어......”

하심이 코리온을 말리려 했지만 그는 듣고 있지 않았다.

“외모와 꾸밈새로 보아 남자 역시 많이 따랐을 것 같으나 손목의 팔찌 흔적 외에는 다른 장신구가 전혀 없고, 끼었던 흔적도 없으니 혼인은 애당초 하지 않았거나 사별 혹은 이혼한지 오래된 사람인 것 같군. 조금 전 가디언 카토에게 안겼을 때 몸이 뻣뻣해지며 자세도 어색했고, 가슴에서 머리를 의식적으로 떼던 것을 보아서 다른 사람과의 신체접촉을 꺼리는 성격인 것 같고. 불확실한 추정이지만 남자와의 접촉 경험은 거의 없거나 결벽 성향이......”

“학장님. 그런 말씀은........”

보다 못한 하심이 옆구리를 쿡 찌르자 비로소 코리온이 입놀림을 멈추었다.

“으음?”

정신을 차린 코리온이 하심을 휙 돌아보았다. 자신이 남을 보면서, 혹은 분석하면서 얻은 이런저런 정보들을 모조리 말해준다는 건 사실 말도 안 되는 바보짓이었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코리온이었다.

그 사이, 일행이 탄 차는 타르서스 별궁 단지의 출입문을 지나 막 접어들고 있었다. 코리온은 자신이 생각없이 마구 지껄였다는 데 지레 놀랐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부속병원 앞에 먼저 들를까요?”

“그, 그래.”

코리온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되찾으며 앞자리의 수나 마구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다시 차 문에 기댄 채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마르코스 비서관, 피해자를 외과 병동에 데려다주고 오도록 해라. 내 책임지는 환자이니 각별이 신경을 써 주라고 이르고.”

“예.”

입에 귀밑에 걸린 우베가 여전히 그에게는 관심도 없는 수나 마구스에게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차는 야자나무와 고무나무가 가지런히 세워진 별궁의 아름다운 정원을 가로질러 한쪽의 부속병원 앞에 멈춰섰다. 재빨리 차에서 내린 우베가 수나 마구스 쪽의 차 문을 열어주었다.

“다시 뵈올 일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베에 기대 몸을 일으킨 수나 마구스가 코리온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코리온은 어딘지 꺼림칙한 그의 인사에 대답하고픈 맘이 별로 들지 않았지만 일단 예의상 입에 발린 말이라도 꺼냈다.

“쾌차하기를 바라겠소. 힘든 일이 있으면 마르코스 비서관을 통해 내게 바로 연락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수나 마구스는 자리에 남은 자이납에게 살짝 눈웃음을 던지고는 병원 안으로 천천히 사라져갔다. 카토는 다시 차를 돌려 별궁 본관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우.”

자신이 잠시나마 자제력을 잃었다는 데 충격을 받았는지, 코리온은 내내 침울해진 표정이었다. 하심이 그런 그에게 물 한 잔을 내밀며 웃음을 지었다.

“중요한 일도 아닌데 뭘 그리 신경쓰십니까.”

“그저.......느낌이 특별해서. 방금 그 사람 말이요.”

물잔을 받아든 코리온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내내 조용하던 앞자리의 자이납이 갑자기 깜짝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어머나. 깜박 졸았네.......엉?”

“무슨 일이냐.”

“방금 그 사람, 짐을 놓고 갔는데요?”

자이납은 수나 마구스가 앉았던 자리에 있던 상자를 냉큼 들어보였다. 한 변이 사람 팔 길이 정도 되어 보이는 단단한 나무 상자였다. 누군가 꽤 신경을 써서 만들었는지, 네 귀퉁이에는 섬세한 구름 문양 조각이 되어있었고 매끈한 표면도 깔끔한 옻칠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그 상자와 꽤 비슷하지만 조금은 조잡해 보이는 다른 상자가 또 하나 있었다.

“제가 가서 돌려주고 올까요?”

“잠깐.”

하심이 자이납의 어깨를 짚었다. 상자 위에는 ‘새 주인에게 쓸모 있는 물건이 되기를 기원합니다.’라는 짧은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새 주인’이 누굴 뜻하는 걸까요?”

하심이 긴장된 표정으로 코리온을 돌아보았다. 코리온이 운전석의 카토에게 평소 잘 내지 않는 큰 소리로 명령했다.

“당장 차를 돌려라! 병원으로 당장 돌아가! 마르코스 비서관에게 연락해서 그 사람 잡아두고 있으라고 해!”

“예? 아, 알겠습니다.”

차의 방향을 돌린 카토는 방금 떠나온 부속병원을 향해 최대한의 속도를 붙였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깨달은 자이납은 손에 상자를 들고 이도저도 못한 채 당황하고만 있었다.

“도대체 그 사람 정체가 뭐죠?”

우베에게 할룩스로 연락을 보내려던 하심은 곧 생각을 접었다. 무언가에 잔뜩 놀란 듯 병원에서 허겁지겁 달려나오는 우베의 모습이 이미 그들의 시야에 들어와 있었다.

“학장님! 학장님!”

차를 발견한 우베가 얼른 달려와 창을 주먹으로 쾅쾅 두들겼다. 코리온이 창을 열며 그에게 눈을 부릅떴다.

“그 여자는?”

“모, 모르겠습니다, 외과병동에 들어간 것까지는 기억나는데.......깨어나 보니 복도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일행의 당혹스런 시선은 아직까지 자이납의 손에 들려있는 나무상자로 향했다. 코리온이 손을 뻗어 그에게서 상자를 받아들었다.

“하, 학장님, 내용물이 확실치 않으니 열지 않으시는 편이.......”

“그럴 것 같지는 않군.”

코리온은 무슨 예감이라도 들었는지, 자이납에게서 받아든 상자를 서슴없이 확 열었다. 지레 겁먹은 우베가 뒤로 움찔했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흐음.......”

코리온이 입술에 힘을 주었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1척 정도 길이의 자그만 석궁이었다. 실전에 쓰일 수 있을까 싶은 작은 크기였지만 그저 단순한 무기는 아닌 듯, 보랏빛 비단보에 곱게 싸인 채 상자 안쪽의 틀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하심이 조심스레 가리킨 건 석궁 측면에 길게 박혀있는 노란 토파즈였다. 마치 금속판이나 석판처럼 그림과 글자가 섬세하게 조각된 토파즈가 반짝거리며 눈을 어지럽혔다.

“다른 건 몰라도 전쟁터에서 쓸 물건이 아닌 건 확실하군.”

석궁을 상자에서 떼어내려던 코리온이 잠시 멈칫했다.

“이게.......장전되어 있는 것이냐?”

이런 것을 단 한 번도 다루어 본 일 없는 코리온이 자이납에게 먼저 물었다. 석궁을 자세히 살펴본 자이납이 바로 고개를 저으며 손을 뻗었다.

“아뇨, 그냥 꺼내셔도 되겠는데요. 볼트 창도 빠져 있고 줄도 풀려 있는데요?”

코리온이 뽑아든 그 석궁은 한 손에 딱 잡힐 만한 크기였다. 자이납이 신기한 듯 위아래로 돌아보며 다시 참견했다.

“군인이 쓰기는 너무 작고요, 그나마 위력이 약해서 요즘은 안 쓰죠, 호신용이나 암살용으로나 쓸 크기에요. 보안국이나 치안군 짭새들 쓰는 것도 딱 이만하거든요.”

코리온은 자이납의 참견을 듣는 둥 마는 둥 석궁의 위아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자이납의 말대로, 실전에서 쓰인 물건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몇 번 사용한 흔적은 있지만 누군가의 손때나 흠집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장식 역시 실전에서 쓰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하고 섬세했다.

코리온에게 한 뼘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손에 들린 석궁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자이납이 눈을 가늘게 뜨며 얼굴을 바싹 가져갔다.

“후와, 이런 고급품은 처음 봐요. 전에 고용주 집에 있는 골동품 콜렉션에서 본 것도 1만 골드가 넘는다고 들었는데 이건 그것하고도 비교가 안 되겠는데요? 이 정도면 위력도 보통이 아니겠네요? 듣자하니 옛날에 교단 코메트에서 쓰던 것들 중에서도 어떤 거는 요즘 갑주도 펑펑 뚫을 만큼 쎄다고 하던데 어쩌면.......”

“그래. 사교도들 물건이군.”

코리온이 얼굴을 찡그렸다. 코리온의 긴 손가락 끝이 향한 곳은 석궁의 측면, 알 수 없는 낯선 문자와 바람 문자가 뒤섞여 새겨져 있는 토파즈 석판이었다.

“하마타 감마.......파이.......하가 마나이오 파투브.......젠장.”

코리온이 그답지않은 거친 표현까지 쓰며 석궁을 차 바닥에 동댕이쳤다.

“엄마야.”

기겁을 한 자이납이 떨어진 석궁을 얼른 집어들고 어디 상한 곳이 없는지를 살폈지만 섬세하기는 해도 명색이 무기여서인지 딱히 흠이 간 곳은 없었다.

“무슨 뜻이길래.......”

하심이 조심스레 물었지만 코리온은 얼굴을 찡그린 채 손만 저었다.

“혹세무민하는 불길한 물건이니 당장 태워 없애버려라.”

“예? 이 멋진 걸요?”

깜짝 놀란 자이납이 석궁을 품에 와락 껴안으며 어깨를 들썩했다.

“그리고 이곳 경비병들에게 연락해서 조금 전 그 여자를 당장 잡아오도록. 카메네이 중랑! 내 눈앞에서 당장 태워 없애라니까!”

“예.......에.”

자이납이 코리온과 하심의 눈치를 보며 석궁을 슬금슬금 상자 안에 도로 담았다. 그는 라이터와 연료를 꺼내는 척 가방을 뒤적거리고는 차 문을 열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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