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608화 (607/1,132)

< -- 608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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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납의 행동을 처음부터 계속 살피고 있던 우베가 낮은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흐음.”

그새 자이납이 그 고급스런 나무상자를 그 밑에 있던 조잡한 상자와 재빨리 바꿔치기했다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비슷한 부류’인 우베뿐이었다. 그는 짐짓 못 본 척 딴청을 피우며 얼른 자이납의 뒤에 따라붙었다. 자이납은 코리온이 시킨 대로,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연료를 쏟아부었다.

“안에 뭐 있는지는 확인해야지?”

우베는 상자에 막 불을 붙이려는 자이납의 옆에 쭈그려 앉으며 슬쩍 말을 건넸다. 자이납이 그에게 눈을 흘겼지만 우베도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하긴, 너 정도면 들어보기만 해도 안이 텅텅 비었다는 정도는 눈치 챘겠지. 5대5 어때?”

“집어 쳐요.”

“그래, 기술을 쓴 건 너니까 7대3 정도까지는 양보하지.”

“오호, 서부에 있을 때 사창굴 갔던 거 약혼녀 베이라한테 입 다물어준 사람이 몇 명이었죠?”

“이씨.”

우베가 대번 이를 드러냈지만 자이납은 태연한 표정으로 씨익 웃음까지 지으며 상자에 불을 던졌다. 우베가 자이납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짜증을 부렸다.

“도대체 그걸 언제까지 우려먹으려고.......”

“생각해봐요, 하다못해 폐하까지 한 건수씩 다 우려먹었는데 나만 아무 조건 없이 입 다물어 줬다고요? 제기랄, 이거 왜 이렇게 냄새가 나?”

불이 붙은 나무상자는 짙은 연기를 뿜으며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보통의 나무상자라면 별 흔적 없이 그냥 타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마치 안에 다른 물건이라도 들은 양 악취와 연기를 뿜으며 제법 그럴싸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차 안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코리온도 그 모습에 비로소 안도하며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내가 쓸 만한 무기상 소개해 주면 어쩔 거야?”

우베가 자이납을 다시금 붙들며 속삭였다.

“내가 미쳤어요? 저런 걸 팔게? 돈 궁할 것도 없는데.”

자이납의 배째라 식의 고집에 우베가 버럭 화를 냈다.

“젠장, 이 사기꾼 같으니, 뭐라도 해 줘야 할 것 아냐?”

자이납은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마잔다란 시내에서 근사한 저녁 한 끼 사줄 테니. 됐어요?”

우베는 그제야 마지못하는 척 물러났다.

사실, 그가 실제 원했던 것도 돈보다는 자이납같은 미녀와 ‘한 건수’ 만들어보는 것이었으니 별 손해는 아니었다. 물론 남자라면 환장하는 이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와 ‘저녁만 먹고’ 돌아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 그 여자 정체가 도대체 뭐지?”

황제의 부름을 받고 133층 집무실에 올라온 니사는 그곳의 무거운 분위기에 잠시 당황했다. 집무실의 큰 책상에 앉은 카렐은 물론이고 한쪽에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보안국장 루토, 그리고 유전자은행장 자그룰라 모렌 박사가 사뭇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를 의식하며 서 있었다.

“루토, 자네가 있으면 가뜩이나 무거운 분위기가 더 썰렁해지겠는걸.”

카렐의 눈짓에 루토가 눈치를 보며 재빨리 자리를 비워주었다.

“자자, 내 아랫사람들 들들 볶자고 마련한 자리는 아니니 제발 표정들 좀 풀게나. 내 가장 아끼는 두 명의 의사님들.”

카렐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손수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둘만 남았으니 구차하게 서로의 신분 따위는 감추지 말자고. 내 둘 다 교단 출신이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니사 라말라 박사야 어차피 신분을 모조리 드러내놓고도 등용된 사람이니. 그대만 좀 자연스러워지면 돼. 하오마 교단 간택자이고 의학교 모범 졸업생, 하마타 유전학 연구소 초급 연구원이었던 자그룰라 모렌 견습모간.”

카렐이 모렌 박사에게 씨익 웃음을 지으며 갓 내린 차 한 잔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신분이 모조리 드러나 버린 모렌 박사는 이 모든 것이 니사의 고자질 때문일까 하는 생각에 눈을 흘겼지만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둘은 생면부지의 사이였다.

“수고하실 일만 남았군요, 라말라 신관님.”

모렌 박사가 갓 들어온 니사에게 비꼬듯 말했다. 니사는 황제가 무언가 심각한 질문을 하려는 것임을 눈치챘지만 짐짓 웃음까지 지으며 황제가 손수 내민 찻잔을 받아들었다.

“지난번 사에나 쉐너 중랑 이야기를 할 때 그대가 그렇게 이상한 태도를 보이던 것에서 어차피 눈치는 챘어.”

이번엔 니사가 모렌 박사를 흘겨보았지만 박사도 모른다는 듯 어깨만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니사는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냉큼 대답했다.

“소인이 교단에서 했던 일에 관해서는 따로 제게 묻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 물론이지. 난 약속은 아주 잘 지키는 사람이야.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베흔에게서 아주 제대로 배웠지. ‘악당’이냐, ‘라이벌’이냐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거든.”

카렐이 마지막으로 따른 자신의 차 한 모금을 홀짝 들이켰다.

“다행히 쉐너 가에서 아주 협조를 잘 해 줬어. 사에나 쉐너 중랑장의 어머니가 목을 매 자살하기 하루 전날 다녀간 게 누구였는지도 친절히 알려주었고. 워낙 옛날 자료라 찾는데 좀 애를 먹기는 했지만 역시 명문가라 다른지 다행히 오래된 자료도 모두 가지고 있더군. 내가 꼭 보여줄 필요까지는 없겠지?”

니사가 이를 살짝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이건 자살사건에 대한 수사 차원이니 교단 문제는 아닐걸세. 그러니 부담없이 대답해 주었으면 좋겠어.”

“오해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곳에 갔던 건 절대 나쁜 의도가 아니었고.......”

무어라 변명하려는 니사에게 카렐이 얼른 손을 저었다.

“알아, 알아. 자네는 성전 끝날 무렵에 강경파에 잡혀가 처형당한 줄로 알았던 사람이 쉐너 가에서 아직 생존해 있다는 정보를 어찌저찌 접해서 기쁜 마음에 찾아간 것이겠지. 같이 간 일행들은 동료 신관들이었나?”

“......그렇습니다.”

니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렐은 그의 앞에 거의 300명 가까운 명단이 적혀 있는 서류 뭉치를 불쑥 내밀었다.

“서류상으로는 모두 처형당한 것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야. 51년부터 59년까지, 민병대에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나지 못하고 처형된 서열 50위 이내의 고위 신관들이지.”

“.......”

“보아하니 그 본인도 주변에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던 모양이던데? 얼굴도 고친 것 같고. 아마 슈엘러 경이 데려가기 전에 미리 입막음을 시켰겠지. 옆에 있는 모렌 박사처럼 말이야.”

카렐의 눈웃음에 지레 움찔한 모렌 박사가 막 마시던 차를 쏟을 뻔했다.

카렐이 손가락을 치켜들며 물었다.

“내가 궁금한 건 두 가지야. 당시 처형된 것으로 되어 있는 포로 중에 실제로 죽지 않고 아직 생존해 있는 게 누구인지, 그리고 명색이 강경파 수장이던 슈엘러 경이 자신의 정치적인 정체성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교단 포로를 빼내서 사가(私家)에 데려간 이유가 무언지.”

카렐의 물음에 니사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의 의지를 보아.......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언젠가 알게 되실 내용 같습니다.”

“알아주니 고맙군.”

카렐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사에나 경의 어머니는 이들 중 누구지? 등에 활 문양 문신이 있었다면.......”

니사는 명단은 들쳐보지도 않은 채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카렐의 시선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분 성함은 가오케레나 빈트 에아.......입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잘 아는 모렌 박사가 깜짝 놀란 눈을 휘둥그레 치켜떴다. 충격을 받은 카렐 역시 입술에 잠시 힘을 주고 있었다.

“지금 ‘빈트 에아’라고 했나?”

“잘 빈 에아 마구스의 딸이셨고 이미 후계자 신탁을 받은 분이셨습니다. 당시 에아 교단 3신관이셨고, 아버지 잘 마구스와 함께 포로가 되셨습니다.”

“잘 마구스면.......53년에 다른 마구스들에게 배신당하고 황궁 앞에서 목판에 산 채로 나무못이 박혀 죽은 5명의 마구스 중 하나였던가?”

“그렇습니다. 그 처형에 항의하는 뜻으로 오르마즈 경께서 모든 공직을 버리고 물러나셨지요.”

니사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렐이 그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다시 물었다.

“약간만 확대해석하면.......사에나 중랑장의 어머니인 가오케레나는 사실상 마구스였군? 이미 후계자 신탁까지 받은 상태였으니 아버지의 죽음과 동시에 마구스가 된 것 아닌가?”

니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습니다.......저희는 그분을 정식 마구스로 대해드리려 했지만.......”

“몰락한 자신의 모습이 옛 아랫사람들 눈에 띄었으니.......애써 잊고 살던 지난날을 다시 떠올리면 마구스로서의 자존심이 용서치 않았겠지. 그래, 그대들 얼굴을 다시 보느니 차라리 목을 매고 싶었을 거야. 내 꾸짖을 사안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사람을 무조건 찾아간 건 큰 실수였군, 라말라 박사.”

“그때 일은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니사가 눈물로 글썽해진 뺨을 얼른 닦아냈다.

카렐이 이번에는 한 무더기의 쉐너 경 관련자료를 내놓으며 물었다.

“그래서 그 분풀이로 슈엘러 경을 협박했나? 정신병자가 될 지경까지?”

카렐의 이번 질문에는 니사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슈엘러 경 말년에 볼만했더군. 지독한 불면증에 악몽, 몽유 증세까지 있었고, 이유 없는 전신 통증을 호소하고, 가끔 헛소리까지 하고, 마누라에 자식들 두들겨 패고.......그러다가 쓰러져서 또 며칠 못 일어나고.......난 방탕한 생활 때문에 알콜과 약물중독이 와서 그런 줄 알았지 그 정도로 심했는지는 몰랐어.”

카렐은 니사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참을 기다렸지만 결국 그는 자진해 입을 열어 주지는 않았다. 물론, 카렐도 그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비록 세간의 평판은 좋지 않았을지언정 개국공신의 죽음에 사교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얼마나 큰 정치적, 사회적인 파장이 될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 니사가 울먹이듯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무어?”

카렐이 조금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분께서는 관련이 없으십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고.......그것만은 믿어 주십시오.”

카렐은 눈물 속에서 가늘게 떨리고 있는 니사의 눈동자를 말없이 응시했다. 어쨌든 그 역시 한 명의 마구스---비록 단 한 번도 제대로 대접은 받아보지 못했다지만---가 자살한 데 대한 무거운 책임을 지고 죄책감 속에서 살아왔을 터였다.

“휴우.”

카렐이 낮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으며 서류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사실 그렇게 망가져 버린 슈엘러 경이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는 상황까지 몰아붙인 것이 페로와 카렐이었으니 의도하지는 않았다 해도 따져보면 공범 역할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일을 크게 만들어 괜히 정치적인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카렐은 일단 이 자리에서는 그 문제에 관해 그만 추궁하기로 했다. 대신 다른 물어볼 것들도 많았다.

“그럼 애당초 슈엘러 경이 아버지의 죽음으로 마구스가 된 그런 시한폭탄을 집에 몰래 데려간 이유가 뭐지?”

“아시다시피 슈엘러 경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니사가 카렐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마구스 혈통은 근친혼을 통해 여러 대에 걸쳐 우수한 인자만을 철저히 추려낸 결과입니다. 그래서 저희와 같은 보통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었던 것이고.......가오케레나 마구스님 역시 마찬가지셨습니다.”

“마르고 날씬한 것도?”

“근친혼만을 통해 이어졌기 때문에 마구스님들의 외모와 재능은 그 선대 조상님들과 놀랄 만큼 흡사합니다. 6척 3촌(189cm) 가까운 큰 키에 마른 체구, 빼어난 이공학적 재능은 에아 교단 마구스 혈통의 특징입니다. 가오케레나 마구스님 역시 18세에 수학 학부과정을 마치셨고, 30세가 채 되기 전에 이미 약리학과 화학에 박사 학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결국은 유전자를 탐냈다?”

“당시 슈엘러 경에게는 3남 1녀가 있었지만.......2명은 자폐성향이 있고, 나머지 2명도 지능이 평균 이하고, 외모 역시 보잘것없습니다. 교단에 관해 잘 알고 있던 슈엘러 경이라면 충분히 욕심을 낼 만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해 못 할 일도 아니군.”

슈엘러 경의 자녀들을 떠올린 카렐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슈엘러 경이 여동생의 정치적 공세에 맥없이 몰락한 데는 그 자신의 처신이 잘못된 것도 있었지만 든든한 처가, 혹은 그런 아버지를 받쳐 줄 변변한 적생자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말단 전사 시절, 정글의 주둔지에서 얼떨결에 얻은 그의 첫 부인은 글조차 읽을 줄 모르는 고작 16살의 시골 소녀였고, 특별히 심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지능 또한 약간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사에나의 말처럼 슈엘러 경은 그런 조강지처도 평생 버리지 않은, 나름대로 책임감 있던 남편이었지만 그런 그의 성실함이 좋은 결과로 보답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부인에게서 선천적으로 똑똑한 자식을 기대하기도 어려웠고, 남편이 전장으로 떠나 있는 동안 그런 부족한 어머니 손에 자라난 자식들도 그런 한계를 극복할만한 가정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다.

물론 슈엘러 경에게는 그 이후에 얻은 비교적 똑똑한 몇 명의 서자들이 있었지만 적서가 엄격한 제국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가문에서 별 힘이 없었다. 종권이 중요한 사회에서, 자식을 어떻게 길러내느냐 역시 ‘힘’을 결정짓는 것이었다.

“그래서 슈엘러 경이 정신이 나가버린 후에도 어렵게 얻은 귀한 딸자식은 차마 미워할 수가 없었군. 쯧쯧, 불쌍한 사람 같으니.”

카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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