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609화 (608/1,132)

< -- 609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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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말이 없던 그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한 듯 조금 전 자신이 니사에게 내놓았던 서류들을 급히 들쳐보기 시작했다.

“마구스 혈통들이 다 닮았다? 그 말은.......이 포로들의 외모만으로도 마구스 혈통인지 어느 정도는 추정할 수 있다는 뜻인가?”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니사가 힘없이 대답했다.

파일을 급히 넘겨보던 카렐은 이들 중 ‘특정한 스타일의 외모’를 지닌 사람들이 유독 잔혹하게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바로 눈치챘다. 그리고 그들의 처형 확인서 끝머리에는 ‘시체 및 유류품 소각 완료’라는 섬뜩한 문장이 감찰관의 서명과 함께 남아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초기 강경파 세력들이 마구스의 혈통을 ‘말살’ 하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의 리더는 도리어 그것을 탐내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하지만 그래 봤자 이론일 뿐이었습니다. 마구스님들의 자손은 하렘 내관들의 엄격한 감시를 받기는 하셨지만 후계자 신탁이 있기 전까지는 ‘보통 인간’ 과의 금욕의무를 제외하면 별 제한 없이 신분을 감춘 채로 자유롭게 성장하셨습니다. 일란성 쌍둥이도 다른 곳에서 자라면 전혀 딴사람이 되는 것처럼 외모, 성격이나 재능 또한 모두 달랐습니다. 신탁이 있기 전까지는 주변 친구들도 그 정체를 알 수 없었습니다. 누설하는 건 바로 제거됨을 의미했으니까요.”

“그래 봤자 신탁을 못 받으면 결국 제거되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카렐의 비꼬는 말투에 니사가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 민병대들이 마구스 혈통이라고 생각해 처형한 사람 중에 절반 이상은 전혀 무관한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저 생김새가 비슷하고, 뛰어난 재능이 있는 교단 고위직이라는 것이 유일한 추정 근거였으니까요. 민병대가 하나하나 유전자검사를 할 만큼 기술이나 시설을 갖춘 것도 아니었고, 그럴 정성을 들일 생각도 없었고,”

니사가 모렌 박사를 힐끔 흘겨보았다. 지레 죄책감에 사로잡힌 모렌 박사가 더듬더듬 변명처럼 말했다.

“그런 시설이나 기술이 있었다고 해도 마구스 혈통을 확실히 가려낼 수 있는 유전적 특성이나 특정 염기서열을 알지 못한 이상은 어차피 어려웠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생식세포는 형성 과정에서 최대한의 다양성을 위해.......”

“됐어, 됐어 난 지금 종의 다양성 문제에 관한 생물학 강의를 듣자는 게 아니니까.”

카렐이 손을 저으며 모렌 박사의 복잡한 설명을 막았다.

“뭐,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고는 해도 최소한 가려낸 기준 정도는 알 수 있겠군. 트라카 교단 포로 중에서는 골격이 좋고.......이게 특성인가? 마구스 가문별 특성이? 이건 그냥 개인적인 호기심이니 알려주면 고맙겠는걸.”

카렐이 그 무지개빛 눈을 반짝거리며 니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니사가 마지못해 설명을 시작했다.

“대신관인 다하카르 혈통은 6척(180cm)이 되지 않는 중키에 희고 동안(童顔)형의 얼굴, 흑갈색 눈동자와 갈색 머리칼이 특징입니다.”

서류를 뒤적거리던 카렐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장난스레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이거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되겠지만 대신관이라는 말에 머릿속에 확 떠오르는 이미지하고는 조금 차이가 있는데? 명색이 ‘공포의 신’의 현신 치고는 너무 공포스럽지가 않은걸?”

황제의 엉뚱한, 아니 어처구니없는 지적에 모렌 박사가 입을 가리고 재빨리 웃음을 참았다.

그런 둘에게 니사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아마 실제 만나보셨다면 생각이 달라지셨을 겁니다. 비록 하나같이 곱고 아름다운 외모셨지만 그 형형한 눈빛은 사람들을 압도하고 빨아들이는 마력이 있었지요. 다하카르께서 상징하시는 공포는 그런 것이 아니고 불의를 응징하고 나약한 인간들을 뭉치도록 만드는 강력한 지도력을 뜻하는......”

“됐어, 교리 강의는 그만하고, 다음은?”

자꾸 대화가 옆으로 빠지려 하자 카렐이 짜증스레 그의 말을 다시 끊었다.

“2교단인 트라카 혈통은 6척이 훨씬 넘는 큰 키에 단단한 골격, 짙은 갈색 피부에 서글서글한 인상, 크고 검은 눈과 검은 반곱슬머리가 특징입니다.”

이번에도 아니나다를까 카렐이 또 끼어들었다.

“이거 두 가문을 뒤바꿨으면 솔직히 더 어울렸겠어. ‘온화함과 빛의 신’의 현신이고 흰 옷만 즐겨 입는 것 치고는 또 무언가 언밸런스한데? 후계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어떤 사람 생각해도 마찬가지고.”

니사는 이번에는 황제의 쓸데없는 참견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3교단인 에아 혈통은 말씀드렸다시피 큰 키와 마른 몸매, 길고 뾰족한 얼굴로 어느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고.”

“그 정도면 ‘지혜의 신’ 이미지로는 그럭저럭 비슷하군.”

카렐이 이번에 처음으로 씽긋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4교단 스루바라는 5척 8촌(174cm) 내외의 약간 작은 키에 근육질의 다부진 몸, 크고 검은 눈, 두툼한 입술이 특징이셨고, 5교단 샤마시는 6척 6촌(198cm)이 훨씬 넘는 장신에 우람한 상체, 털이 많고 굵은 팔다리......”

니사의 설명을 찬찬히 듣고 난 카렐이 어깨를 으쓱했다.

“앞의 두 교단만 빼면 그럭저럭 이미지가 잘 어울리는군. 어째 요즘은 교단에 관한 공부를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 이러다가 황제가 개종했다는 루머라도 퍼지면 어쩌지?”

“저희로서는 쌍수들고 대환영입니다.”

니사의 농담같은 대답에 카렐이 껄껄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뭐 그 문제는 원리주의 유학자들이 전원 동의해 주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지. 어쨌든, 그럼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남았군.”

카렐이 다 보고 난 파일을 일단 덮고는 니사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답해 보게. 그럼 이제 사에나 쉐너 경이 새로운 에아 마구스인가?”

황제의 직접적인 물음에 니사가 멈칫거렸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사에나 빈트 에아는 후계신탁을 받지 못했습니다. 돌아가신 가오케레나 마구스님의 경우는 이미 신탁을 받은 상황이었기에 마구스로 대우해 드리는 데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사에나 경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신탁은 물론이고 유언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들 입장에서는 ‘순수하지 못한 피’까지 섞여서?”

“순혈이 아닐 경우, 출생과 동시에 제거됨이 원칙입니다.”

카렐은 이런 말을 눈 하나 깜짝 않고 서슴없이 하는 니사를 슬쩍 흘겨보았다.

“죽은 마구스에게 다른 자손이 없는데도?”

“아직 이런 선례가 없기에 일개 신관인 제가 말씀드릴만한 사안이 아닙니다. 소인 그저 원칙만 말씀드릴 뿐입니다.”

한쪽에 말없이 앉아있던 모렌 박사는 턱을 똑똑 두드리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황제와, 그런 황제를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니사의 모습에서 한 편의 정치극을 쉽사리 읽어낼 수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수하이며 특별한 혈통을 가진 사에나를 어떤 식으로든 ‘이용할’ 생각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니사가 황제의 그런 속셈을 읽어냈을지, 읽어냈다면 어떻게 대응할 생각일지를 알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집무실 문 앞에서 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사에나이옵니다.”

카렐과 모렌 박사, 니사가 잠시 서로를 돌아보았다. 잠시 후, 카렐이 니사에게 손짓을 보냈다.

“생각해보니 시종들도 다 나갔군. 자네가 문 좀 열어주게나.”

황제가 시키는대로 문을 열어주던 니사는 큰 키의 이 새 황제 비서관을 힐끔 올려보았다. 병실에서 막 나온 듯 아직 군데군데 상처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이젠 지팡이 없이 불편하나마 두 다리로 걷고 있었다. 그 역시 ‘교단 고위신관’인 황제의 주치의에 관해 들은 일은 있었는지 그를 내려다보며 잠시 눈가에 힘을 주었다.

“보안국에 인수인계 마치고 지금 막 비서실에 왔습니다, 폐하.”

사에나는 이제야 허리를 굽힐 수 있는지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머리를 깊이 숙였다. 카렐은 그의 허리에 늘어져있는 빈 고리와 볼트 창을 힐끔 쳐다보았다. 사에나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보안국에서 쓰던 석궁이 있던 자리입니다. 비전투시에 상께서 계신 곳에 들 때는 경호대 외에는 무장을 할 수 없다고 해서......”

“경호대 가디언들에게 뺏겼겠군.”

“그렇습니다.”

“첫 번째 수업 치고는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겠어. 듣자하니 석궁을 잘 쏜다고 하던데, 그다지 흔하게 배우는 무기는 아니지. 보안국에 와서 배운 건가?”

카렐이 실실 웃으며 사에나를 슬쩍 떠 보았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 제게 장난감 석궁을 주면서 가지고 놀게 하셨습니다. 그 뒤로 취미로 자주 쏘곤 했습니다. 사후에 남기신 유품 중에도 석궁 몇 개가 있어서 제가 쓰고 있었습니다.”

카렐이 피식 웃으며 니사에게 무언가 말하려는 듯 슬쩍 눈웃음을 던졌다.

“아참, 내 깜박 잊은 게 있었어. 생각해보니 자네한테 업무 인수인계를 해 주어야 할 우베 녀석이 리쿠 학장을 따라 타르서스에 가 있지 뭔가.”

“괜찮습니다. 어차피 보안국에서 다루던......”

“아냐아냐. 어차피 지금은 그 일을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으니 자네는 다른 임무를 좀 해 줬으면 해.”

“말씀만 하십시오.”

“거기 니사 라말라 박사가 자네 할 일을 말해 줄 걸세.”

“예에? 무얼 말씀이십니까.”

이번에 놀란 건 사에나가 아니고 니사였다. 눈이 휘둥그레진 그에게 카렐이 씽긋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에나 자네도 타르서스에 좀 가 줬으면 좋겠어. 가서 누군가를 좀 만났으면 좋겠군.”

카렐의 속셈을 눈치챈 니사가 입술에 힘을 꽉 주었다. 카렐이 사에나를 의도적으로, 그리고 아주 노골적으로 교단에 접근시키려는 속셈임이 분명했다.

“선대 황제들과는 확실히 많이 다르시군요.”

니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카렐의 속내가 교단에 단순히 자기 사람을 심는 것이든, 장기적으로 그들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 집어넣으려는 것이든, 지금껏 교단에 이런 ‘관심’조차 보인 황제는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몸도 낫지 않은 친구를 보내는 건 좀 미안하지만.......짐을 다 싸거든 내게 다시 오게. 좀 복잡하지만.......해 줄 말이 있으니. 그리고 라말라 박사 자네가 만남을 좀 주선해 줬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명 받자옵겠습니다.”

사에나는 군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자리에 남은 카렐은 니사에게 갑자기 씨익 웃음을 지었다.

“뭐 하나? 안 따라가고?”

“예? 아, 알겠습니다.”

니사가 사에나를 따라 황황히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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