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11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
.
.
“‘영감’이 제법 쓸만한 놈들을 보냈군.”
코나가 구부정한 허리와 어깨를 천천히 펴고 일어서며 이 냉장창고에 번지는 신선한 피비린내를 가슴 깊숙이 들이켰다. 바싹 얼어붙은 쿠마르는 아스탈이 이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던 ‘야수같은’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했던 것인지를 실감해야 했다.
아스탈은 ‘그년은 필요하다면 내 목도 웃으면서 벨 거야.’라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어쩌면 농담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죽은 6명은 신분을 숨기고 아크반 가에 들어온 코나에게 처음부터 가장 충성했던 자들이었고, 바로 서너 시간 전까지도 호수가의 술집에서 껄껄대며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자들이었다. 심지어 어제는 그들 중 한 명의 아내가 쌍둥이를 낳았다며 손수 꽃다발과 손수 짠 아기옷까지 가져가 선물하기도 했던 그였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6명의 자경단원들은 하나같이 목이 반쯤 잘린 채 이 습하고 더러운 창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목을 잘라 거꾸로 걸어놓으면 도살장 작업반이 새벽에 알아서 처리한다더군.”
코나가 손가락으로 천장의 빈 갈고리를 가리켰다. 각자 자신이 죽인 시체 옆에 조용히 서 있던 피다이들은 마치 기계처럼 도끼를 하나씩 뽑아들었다.
“앞으로 타르서스에서는 채소하고 물고기만 먹어야겠어.”
옷을 털고 일어난 코나가 터벅터벅 창고 밖으로 걸음을 옮기자 잔뜩 겁에 질린 쿠마르가 허겁지겁 그의 뒤를 따랐다.
“뭐 언제는 고기 잘 드셨나요.......”
애써 태연한 척 하려던 쿠마르는 자경단원, 아니 쌍둥이 아빠의 목 없는 시체가 바로 옆에서 쿵 소리를 내며 갈고리에 걸리자 지레 놀라 어깨를 들썩했다.
“네가 병신같이 저놈들 앞에서 내 이름을 말한 덕분이지. 자이센 가에서 내 목에 건 현상금이 좀 올랐다지?”
“원래 2천만 골드였지만........페로 녀석이 3천만으로 올렸습니다.”
“6명 죽이는 것보다 1명을 죽이는 편이 더 손쉽다면 앞으로는 그렇게 할 테니까 알고나 있어.”
“아, 알겠습니다.”
쿠마르가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코나가 이렇게까지 말했다면 최소한 그 자신은 당장은 죽지 않을 터였다.
쿠마르는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이 여자를 다시금 쳐다보았다. 물론 그도 이 일에 투입되기 전, 이 여자에 대한 파일을 본 일은 있었지만 그곳에 나와 있는 그의 성격은 겉으로 보이는 사무적인 냉혹함뿐이었다. 하지만 쿠마르는 며칠이나마 그와 함께 있으면서 어느 정도 그를 파악할 수는 있었다.
누가 들으면 웃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가 생각한 이 여자의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치리만큼 ‘선하다는’ 점이었다. 항상 흐리멍텅한 눈동자, 무표정함, 속내를 절대 보이지 않는 가는 눈동자는 자칫 남에게 ‘나약함’으로 비출 수도 있을 그 선함을 감추기 위한 갑옷일 뿐이었다.
비록 지금은 제국 역사책에까지 남을 악당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사실 평소의 코나는 바느질, 뜨개질과 자수를 좋아하고 달콤한 열대과일, 과자와 케익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평범한 여자였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손수 만든 소품이나 퀼트, 직접 구운 과자를 선물할 정도로 세심했고, 술자리에서도 사람을 깜짝깜짝 웃기곤 하는 재밌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차 안에 있던 뜨다 만 아기옷을 보며 쿠마르는 ‘내가 지금 헛것을 본 건가’하며 고개를 저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스스로의 생각에 ‘옳지 않은 일’은 절대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그 기준이 다른 사람과 조금 차이가 있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정치적인 문제, 혹은 자신의 안전 따위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바로 행동에 옮겼고, 상관인 제수스 자이센 일가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50년 가까이 군에 몸 바치는 동안 헌병대 간부라면 몇 번쯤은 말려들기 마련인 비리 사건에 단 한 번도 연루된 일이 없었고, 심지어 뇌물을 받은 절친한 동료들을 잡아 즉결처분하는 데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괜한 호사가들은 그런 그를 살인강도로 공개처형당한 아버지, 약물중독이 되어 자식들을 내버린 어머니, 혹은 맏딸로서 동생들을 혼자 돌보아야 했던 고된 어린 시절 때문이라 멋대로 갖다붙이곤 했다. 하지만 쿠마르가 보기에 코나는 그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보통은 그쯤이면 조직 내에서도 따돌림을 당하거나 수많은 적을 만들었을 테지만 그의 뒤에는 상관이며 후원자인 제수스가 항상 있었다. 제수스 자이센은 광신도 헤네티 출신 헌병대 하급 사관에 불과했던 이 여자의 가능성을 제일 먼저 읽어낸 사람이었다.
사실 코나는 당시까지도 출세의 보증수표였던 간택자도 아니었고, 학력 역시도 의무교육만 마쳤을 뿐 고등교육의 문턱은 넘어 본 일도 없었다.
제수스는 그런 이 고집불통에 범죄자의 딸이 교리청 종교재판소 수사관, 헌병대대장을 거쳐 준장인 헌병감에 오를 때까지 뒤를 받쳐준 은인이었고, 타협이라고는 모르는 이 대쪽같은 헌병장교와 잘 어울리는 우직하고 믿음직한 상관이었다.
최소한 교단이 몰락할 때까지는 그러했다.
따져보면 노예폭동 당시의 제수스는 이전의 그 우직함과 유별난 자존심, 심지어 그를 믿고 폭동에 동참한 아랫사람까지도 버린 배신자였다.
그는 노예폭동의 어용지도자가 된 대가로 자신은 상급귀족을, 그리고 측근들의 면천을 약속받았지만 폭도로 낙인찍혔던 대다수의 ‘노예’들은 철저히 외면했었다.
물론 제수스의 오른팔인 코나도 그 ‘면천 대상’의 하나였다. 그리고 마음만 먹었다면 그를 따라가 당당한 ‘시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상급귀족 제수스의 새 오른팔이 되어 어쩌면 이전보다 더 나은 지위를 얻을 수도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자이센 가의 가신으로 남아 페로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당시 제수스와 함께 면천을 받아 이후 투모카프를 따라왔던 사람들, 혹은 그 후손들이었다.
하지만 코나에게는 자신에게 약속된 면천, 그리고 제수스에 대한 사적인 충성보다 ‘버림받은 노예들’이 더 중요했다. 그렇기에 그는 평소 성격대로 기꺼이 무기를 들어 자신의 오랜 상관이며 은인, 동시에 배신자의 머리를 서슴없이 부숴 놓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악당으로 낙인찍혔고, 가족과 친척들은 몰살당했고, 그 자신은 그때까지 살아온 세월보다 더 긴 세월을 도망자로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자신의 당시 결정을 후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은 엉뚱하지만, 쿠마르는 이 예측 불가능한 여자가 혹시라도 타르서스의 ‘의롭지 못한’ 호족들을 잡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닐까도 걱정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일단 한 가지를 노리면 그것만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었지 이것저것 다 따져가며 깊숙이 파고들거나 동정심, 사회문제 따위를 따져가며 부주의하게 생각의 범위를 넓혀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그는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는 절대 아니었고, 다만 눈앞에 닥친 것 외의 다른 일은 의도적으로 ‘생각지 않을’ 뿐이었다.
쿠마르는 아스탈이 이 여자를 가리키며 한 ‘들개’ 혹은 ‘하이에나’라는 표현이 퍽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것이 코나의 스타일이었고, 장점이며 동시에 단점이었다. 그는 외골수지만 줏대없이 움직이며 명예 따위나 노리는 소영웅도 아니었고, 정치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정치를 몰라서는 아니었다.
따져보면 이번에 죽은 6명의 자경단원들도 기분좋은 술친구였고, 집에 가면 누군가의 남편이고 다정한 아빠였지만, 밖에서는 호족들의 수하에서 시장 상인과 시민들을 등쳐먹는 보통의 악덕 자경단원일 뿐이었다.
코나는 ‘일만 끝나면 저 새끼들은 치워야겠어.’라며 종종 말하곤 했었고, 그가 이들을 ‘조금 일찍’ 제거한 것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가 언젠가는 타르서스 호족들도 정말 몰살시키겠다고 나설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할 일이 있는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이런 ‘야수’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할 일을 주는 것’ 뿐이라는 아스탈의 말을 그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역시 그 양반은 대단해. 저런 여자를 누가 다루겠어.’
쿠마르는 코나를 따라 냉동창고를 나와 바깥의 후텁지근한 공기를 비로소 들이켰다. 창고 안쪽에서는 시체를 거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그럼 저 피다이들은 이제 어떻게.......”
“어떡하긴. 죽일 놈은 충분히 많은데 무슨 걱정인가.”
냉동창고 밖으로 빠져나온 코나는 멀리 남쪽 언덕 위로 보이는 타르서스 별궁의 반짝이는 실루엣을 잠시 응시했다.
“곧 저기서 만찬이 있다고 하니, 우리가 손님이 되어 줘야지.”
“어느 정도 선까지 죽일 건가요?”
쿠마르는 이번 계획의 책임자인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코나는 별 쓸데없는 것을 다 묻는다는 듯 표정을 찡그리며 그를 돌아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쿠마르도 자신의 질문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바로 인정했다. 코나에게 있어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미리 고도의 계산을 거쳐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제거 대상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부도덕한 자’에 한해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것이었다.
“가디언 자이납, 가디언 카토, 하심, 우베라는 놈이 같이 있다고 했나?”
“예.”
코나는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펼쳐들며 무표정하게 물었다. 쫓기는 그에게는 조금 우스운 비유지만, 파일을 살피며 작은 눈을 빛내고 있는 그의 모습은 수사관 시절 목표를 쫓던 그의 모습을 언뜻 연상케하고 있었다.
“가디언 둘을 함께 두면 어려워. 하나쯤은 잡을 수 있겠지만.”
“......”
“그네들을 둘로 갈라놓도록. 자이납이라는 놈과 우베라는 놈이 이곳에 익숙하고 머리회전이 빠르다지?”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 둘이 임기응변에 빠르고.......”
“그 둘을 연회에 참석 못 하게 해라. 가능한 그 장소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만들어.”
“알겠습니다.”
파일을 넘겨주고 앞서가는 코나를 지켜보며 쿠마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똑같은 놈 둘이 만났는지도 모르겠군. 잘 맞겠어.”
쿠마르는 별궁에 있을 코리온, 그리고 앞서가고 있는 저 냉혹한 응징자를 번갈아 머리에 떠올렸다. 출신 신분이며 성장환경, 심지어 학력과 생김새까지도 극단적으로 달랐지만 둘은 어느 면으로는 너무도 비슷했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