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13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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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번 만찬에 우리는 못 들어간다는 게 맞아요?”
잠시 후 있을 만찬을 위해 별궁 주방에 그득하게 쌓여 있는 음식과 재료들을 올려보며 자이납이 군침을 꿀꺽 삼켰다.
“정확히는 우리는 못 들어간다‘가 아니고 ’몇몇 사람들만 들어간다‘가 정확할걸.”
우베가 망고 2개를 슬쩍 집어 한 개를 자이납에게 내주며 냉큼 대답했다.
“그 말이나 그 말이나.”
주방을 둘러보던 자이납이 말장난을 치는 우베를 살짝 째려보았다. 하지만 우베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듣자하니 자기네 안전을 보장해달라는 명목으로 너하고 카토를 출입 금지시켜달라고 했다던데? 뭐 카토 녀석까지 그러는 건 좀 무리라 결국 놈들이 물러났다지만. 카토 녀석도 없으면 리쿠 학장을 누가 지키라고. 그 허접한 직할군 경비병 놈들이?”
생각 없이 큰 소리로 말했던 우베는 한쪽에서 째려보는 직할군 경비병의 곱지 않은 시선에 급히 입을 가렸다.
“뭐 나야 워낙에 큰 공훈을 많이 세운 맹장이라 그렇다치고.”
“하이고오. 정말로 그러실까나요.”
자이납의 착각에 우베가 대번 혀를 쑥 내밀어보였다. 그리고는 망고즙을 빨아먹고 있는 이 철딱서니없는 아가씨에게 스리슬쩍 다가갔다.
“저녁 사준다는 약속 아직 유효한 거지?”
“하여간 쓸데없는 것만 잘 기억하긴.”
자이납이 입을 삐죽거렸다. 우베가 그에게 더 바싹 다가가며 능글능글한 표정을 지었다.
“저어기 오아시스변에 괜찮은 레스토랑들 모여있는 곳 있는데, 어차피 우리야 오늘밤에는 할 일도 없으니 같이 저녁이나 먹고 오지 뭐.”
자이납이 기다렸다는 듯 냉큼 되물었다.
“보나마나 비싼 데겠죠?”
“몰라, 어제 아침에 잠깐 산책 나갔는데 옛날 같이 사업하던 친구 놈을 만났거든. 그놈이 꼭 와 달라던데.”
우베가 주머니를 뒤적거려 명함을 내보였다. 슬쩍 약도를 보니 시장에서 멀지 않은 오아시스변 식당가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나 통해서 줄 좀 대 보려는 수작이겠지 뭐. 할 말도 있고 특별히 잘 해준다고 꼭 와 보라던데? 속 시커먼 거야 잘 알지만 뭐 나도 이쪽에 아는 인맥을 마련해 놔야 하는 건 사실이니까. 뭐 설마 돈이야 받겠어?”
‘특별대우’라는 말에 눈이 확 뜨인 자이납이 명함을 냉큼 받아들었다.
“특별대우면 잘생긴 남자 접대부라도 나오는 거예요?”
“아, 진짜…….”
흑심이 있던 우베가 대번 눈을 흘겼지만 어차피 자이납은 그에게는 별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비서관이면 비서관답게 구시라고요. 돈 안 받는다고 정말로 안 낼 생각이에요? 학장님이 아시면 ‘감히 공직을 앞세워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다니! 당장 목을 쳐!’ 하실 걸요?”
“얼씨구, 니가 언제부터 청백리였다고 그 타령이냐? 탈라스에서 저 피곤한 성격까지 닮아 왔냐? 근데 저 인간이 접대부 샀던 사람 참수한다는 말은 못 들었냐?”
우베가 다시 눈을 흘겼지만 자이납에게는 역시 무용지물이었다.
“난 그래도 낼 돈은 낸다고요.”
자이납이 제법 두둑한 돈지갑을 내보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너야 봉급 받아도 돈 쓸 데가 없으니 그렇지. 나처럼 식솔 딸려 봐. 어쨌든, 갈 거야? 안 갈 거야?”
“뭐, 약속은 한 거니 가긴 가죠 뭐.”
자이납이 조리대에서 망고 몇 개를 다시 집어 주머니에 냉큼 챙겨넣었다.
“좋아, 그럼 옷 갈아입고 30분 이따가 정문 앞에서 보기다?”
“알았어요, 알았어.”
자이납은 우베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주방의 식재료들이 들어오는 작은 후문으로 별 생각 없이 나섰다. 그때, 그의 눈에 띈 건 어둑어둑해지는 정원을 가로질러 혼자 어딘가로 바삐 걷고 있는 카토의 모습이었다.
사실 이곳에 온 이후 카토의 행동은 어딘지 이상했다. 그는 리쿠 학장의 곁에는 가능한 가지 않으려 했고, 어느 순간 사라졌다 싶으면 몇 시간씩 안 보이기가 일쑤였다. 물론 그 덕택에 자이납이 학장의 곁에 더 오래 있을 수 있게 된 건 사실이었지만 이 눈치 빠른 아가씨가 마냥 좋아만 하고 있을 바보는 아니었다. 자이납이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카토를 응시했다.
“어라? 어딜 가는 거지?”
황명을 받고 타르서스에 내려온 사에나는 조금 얼떨떨한 상태였다. 그는 차에 함께 탄 황제 주치의 니사를 몇 번이나 쳐다보았지만 그 역시 처음처럼 별 말이 없었다. 아니, 도리어 그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박사에게는 아무 감정 없으니 그렇게까지 날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에나는 평소 성격처럼 니사에게 대놓고 말했지만 워낙에 음성이나 어투 자체가 쌀쌀맞다보니 누군가를 달래주는 것으로 들릴 말은 아니었다. 물론 여전히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니사의 어깨를 덜어 줄 말은 더더욱 되지 못했다.
사에나는 창밖으로 지루하게 펼쳐진 타르서스의 사막을 지켜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곳에 오기 직전, 사에나는 황제에게서 죽은 어머니 가오케레나의 신분과 그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에게는 딱히 기쁜 일도 아니었고, 도리어 받아들이기 당혹스러운 내용이라는 편이 더 정확했다.
그가 사교에 관해 아는 것이라고는 학창시절 역사책에서 배운 수준을 넘지 못했고, 어린 시절부터 유학을 배우고 자라난 명문가 귀족으로서 도리어 막연한 혐오감까지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황제의 말을 듣고 나온 직후, 핏줄에 대한 호기심에 조사해 본 에아 교단 마구스 혈통은 더더욱 충격이었다. 어머니 가오케레나는 그 아버지 잘 마구스와 고모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었고, 할아버지 잘 역시 전임 마구스인 어머니와 친형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렇다보니 사에나 자신도 어쩌면 마구스의 지위를 노릴 수 있을 것이라는 황제의 뚱딴지같은 ‘언질’이 도리어 소름끼치기까지 했다. 비록 공감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아버지 슈엘러 경이 왜 그리 어머니를 멸시했는지 알 수는 있을 것도 같았다.
어쨌든 그의 가방에는 그간 보안국에서 입수한 사교 관련 자료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고, 늦바람 공부를 하게 된 ‘바람 어’ 책자와 사교 경전까지 들어 있었지만 그에게는 아직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로서는 죽기 전 딸에게 귀띔 한 마디 해 주지 않은 무심한 어머니를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가방에서 머리를 삐죽 내밀고 있는 어머니의 석궁을 바라보며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책에 있는 바람 어 문자와 비교해가며 그 석궁에 붉은 산호로 새겨진 글자를 더듬더듬 읽어보았다.
“하마……타……가오코? 케레나……사에……나……하, 하가 마나이오 파투브…….”
그는 이것이 무슨 내용인지 니사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저 ‘사교 신관’이 자신의 서툰 바람 어 실력을 비웃을 것이라는 생각에 차마 내키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고민을 니사가 먼저 덜어주었다.
“‘신이시여, 위대한 어머니의 운명을 받은 가오케레나 사에나를 지켜 주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발음이 어려운데 빨리 익히시는군요.”
사에나는 석궁을 쳐다보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가오케레나‘와’ 사에나겠지.”
“아뇨, ‘가오케레나 사에나’입니다.”
순간 정신이 퍼뜩 든 사에나가 눈을 무섭게 부릅뜨며 니사를 채근했다.
“무슨 뜻이지? 어머니 이름은 가오케레나고 이 석궁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교단 시대에 만들어진 건데 왜 여기 내 이름이 있는데?”
사에나의 날카로운 물음에 니사가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하지만 하는 수 없다는 듯 결국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가오케레나’는 전임자이신 잘 마구스님의 어린 시절 아명(兒名)이었습니다. 마구스 가문의 전통에 따라 후계자를 선임하면서 본인의 아명을 물려주게 됩니다. 그래서 중랑장님의 어머니께서 후계자 선임과 함께 아버지의 아명을 물려받고 ‘가오케레나’가 되신 겁니다.”
“어린 시절의 원래 이름은……뒤로 밀리고? 그 뒤의 후계자에게 주기 위해?”
니사도 사에나의 재빠른 추측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마치 죄인을 노려보듯 이글거리는 사에나의 매서운 눈길에 벌벌 떨던 니사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어머니의 아명은 뭐냐?”
사에나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기도 모르게 니사에게 명령조로 대하고 있었지만 그 스스로도, 사에나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하고 있는 니사도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설마……사에나?”
“그, 그렇습니다.”
순간, 사에나가 턱에 힘을 꽉 주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버렸다. 어머니는 자신의 딸에게 아명을 그대로 물려준 것이었다. 완전히 몰락해버린 마구스가 도대체 무슨 속내로 그랬던 것인지는 이제 알 수 없지만.
사에나는 황제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무척이나 좋아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달가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석궁은 가오케레나 님께서 후계자 신탁을 받으면서 아버지 잘 마구스님에게서 받으신 겁니다. 후계자 신탁의 상징물이니 소중히 다루어 주십시오.”
“…….”
사에나는 괜한 심술에 석궁이 든 가방을 발로 툭 걷어찼지만 일부러 석궁과 먼 곳을 찼다는 정도는 니사도 눈치 챌 수 있었다.
“어머니가 선물로 주신 게 없지는 않지. 이렇게 폼 나는 게 아니어서 그렇지.”
사에나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허리춤의 낡은 석궁을 번쩍 들어보였다. 꽤 오래된 이 암살수용 석궁은 헤네티 부대의 오래된 마크가 남아있는 것을 보아 아마도 아버지가 민병대 시절 노획물을 둔 창고에서 슬쩍 가져온 것 같았다. 어머니의 그 번쩍거리는 대단한 석궁과는 비교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단순한 제식 석궁이었지만 제식 무기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명중률 하나는 최고여서 지금까지 헌병대 생활 내내 계속 그의 허리춤을 지키고 있었다.
평소 습관처럼 줄과 볼트가 든 창을 살피던 그는 오래 전 누군가 서투르게 칼로 긁어낸 것 같은 여러 개의 자국을 발견했다. 바람 어를 전혀 모르던 지금까지는 그저 쓰다가 생긴 흠집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었지만 이제와 자세히 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쐐기꼴의 그 흔적은 틀림없이 ‘문자’였다.
“하마타……사에나 쉐너 하가 마나이오 파투브…….”
사에나는 석궁의 옆을 자기도 모르게 얼른 손으로 가렸지만 니사가 그것을 놓쳤을 리가 없었다. 사에나는 휘둥그레진 니사의 시선을 무시하며 괜한 헛기침을 했다.
“다 왔군요.”
니사가 망토 후드로 얼굴을 가리며 밖을 내다보았다. 이 일행이 마잔다란의 타르서스 별궁에 도착한 건 황궁을 출발하고 꼬박 하루가 넘게 지난 후였다. 이곳엔 이미 코리온 일행이 도착해 있었지만 황제는 ‘카토를 제외하고 학장 일행과는 절대 만나지 마라’라며 엄명을 내려놓은 후였다. 그리고 사에나의 명에 따라 움직일 5백의 보안국 헌병들 역시 황제의 명을 받아 비밀리에 이곳 타르서스로 집결하는 중이었다.
곧 호족들과의 만남이 있을 타르서스 별궁의 뒷문에서 그를 기다려주고 있는 건 황제 호위대장 카토의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는 차 안에 니사와 사에나, 그리고 2명의 호위가디언들만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들어가라며 손짓을 보냈다.
“부속병원 뒤쪽으로 가도록 해.”
이들이 탄 차는 별궁의 정원을 미끄러지듯 가로질러 별궁 부속병원의 구석진 쪽문 앞에 멈춰섰다. 같은 시각, 병원 뒤편에서 누군가 숨어서 이 행렬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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